"와 진짜 덥다. 이런 날 학원 가야 해? 우리 땡땡이칠까?"

"인정. 근데 우리 저번에도 한 번 그래서 오늘도 그러면 엄마한테 전화한다고 했어…."

아직 엄마의 전화를 무서워하던 저학년도 아니고, 고학년도 아닌 4학년, 5년 전의 '나'.

초등학교 시험이 아직 사라지지 않아 학원에서 시험 대비를 했다. 그날도 여느 날과 같이 친구 2명과 편의점 앞에서 만나 학원으로 걸었다. 학원은 그다지 멀지 않은 자리에 위치해 8분 정도 걷고 있었다. 11시 48분 아직 수업까지 12분이나 남았다. 지금 들어가면 4시까지 꼼짝않고 앉아서 수학 문제만 풀어야 하겠지. 친구들과 계단에 앉아 포우 게임을 했다. 음식도 주고, 운동도 시켜주고, 똥도 치워주니 11시 59분이다. 한숨을 푹-쉬며 터덜터덜 2층으로 올라갔다. 땡땡이 모양이 박혀있는 촌스러운 실내화를 신고, 바로 앞에 있는 수학실로 올라갔다. 분수의 나눗셈, 곱셈 등등… 우리가 배우는 것은 너무 헷갈리는 부분이 많았다. 그냥 포기하고 포우나 안고 부둥부둥 살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첫째이자 장녀인 나에게 기대가 많겠지? 수행평가면 수행평가, 경시대회면 경시대회 항상 참 잘했어요이다. 그러니 첫 시험인 이번 평가에 호들갑을 많이 떨 것이다. 그렇게 예비 시험지 3개를 다 풀고 나니 2시간 30분 정도가 흘렀다. 이젠 엉덩이가 근질근질해진다. 씻지 않아 근질근질한 것이 아니라 엉덩이뼈가 뻐근해진다는 것이 맞는 표현인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즈음 선생님이 15분 동안 쉬고 오라고 했다. 나의 친구들과 눈이 맞았다.

'이때야!', '가자', '하나, 둘, 셋!!!'

딸랑!

우리는 1m도 안 되는 짧은 다리로 열심히 달렸다. 달리고 달려 우리의 아지트, 난간 사이에 모였다. 쭈그리고 앉아 서로를 쳐다보니 얼굴이 토마토가 되어 헉헉거렸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학원 1시간 30분을 땡땡이쳐서도 맞지만, 서로의 생각을 읽었다는 것에 신기함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난간 사이에 앉아서 장미도 만지작거리고, 주인 모르는 자전거도 타보고, 지나가는 경찰차에 충성을 다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놀고 있을 때 즈음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나, 걸린 건가?

'아빠 전화 받자마자 죄송하다고 해야지.'

"아빠 죄…."

아빠는 말을 하지도 듣지도 않았다. 통화음 너머로 들리는 소리는 오직, 서글프다 못해 울부짖는 울음 소리뿐이었다. 직감적으로 느꼈다. 너무나도 힘들고, 아파보이는 소리의 주인공은 우리 엄마다.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갔다. 내가 방에 들어오자 아빠의 발소리가 들리며 검은 옷을 꺼냈다. 지금 바로 부산으로 가야하니 얼른 준비하라는 말을 뒤로 방을 떴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울음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어쩌면 저 소리는 우는 것이 아니라 너무 열심히 웃는 것이라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 소리는 11살이 듣기에는 너무나도 이른, 슬픔에 젖어 흘러내리는 소리이기에.

나는 병원의 지하에 들어갈 때까지 누구의 장례식인지 몰랐다. 어린 내 동생은 엄마가 우니 자신도 슬퍼졌는지 눈물을 방울방울 떨궜다. 누나로서 난 내 동생을 달랬다. 하지만 나로선 달랠 수 없었다. 무척이나 궁금해했던 장례식의 주인은 엄마의 아빠, 외할아버지였다. 나는 외갓집과 그닥 친하지 않았다. 외갓집에는 와이파이도, 텔레비전도, 재밋거리도 없었기에 외할아버지를 만날 기회가 나이가 찰수록 차츰 사라져갔다. 쿰쿰한 냄새를 띠는 지하 장례식장에 발을 들이니 검은 액자에 들어있는 할아버지의 사진이 보였다. 그리고 검은 한복을 입고 사진 앞에서 손과 발, 온몸을 떨며 엄마보다 더한 슬픔에 잠긴 외할머니가 보였다. 안 된다며 가지 말라며 자신도 데려가라며 하늘에 비는 할머니의 모습은 시선을 발끝으로 향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주는 밥을 먹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으니 사촌들이 모두 모였다. 큰이모, 작은이모, 우리 엄마, 삼촌, 외할머니까지. 모두가 모였다. 그렇게 믿고 싶다. 엄마는 장례식장에 도착한 손님들께 인사를 했다. 그때마다 작은 손수건을 눈가에 가져다 댔다. 그건 반짝이는 엄마의 눈을 삭히게 했다. 사촌인 소연이는 나보다 한 살 어려 3학년이다. 우리는 구석에 앉아 서로의 포우를 보여주며 소개해주었다. 그렇게 또 밤이 왔다. 칠흑 같은 밤이 오니 엄마는 까칠까칠한 나무 장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용서를 빌었다. 그 말은 어린 나로서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내 동생처럼 방울방울 눈물을 떨구는 엄마의 모습을 보니 쉽사리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몇 분이 지나도 잠이 들지 않자 또다시 긴 시간 동안 보지 못할 소연이랑 이야기를 나누자 생각하며 깨웠다. 소연이도 잠에 들지 못했는지 곧장 일어나 아까 우리가 있던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슨 얘기를 할까 고민 중이던 찰나 소연이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우리를 사랑했어. 오토바이도 태워주시고, 아이스크림도 사주시고…."

앞니가 다 빠진 소연이기에 아이스크림 발음이 어눌했지만, 아까와 같은 마음이 틀림없다. 슬픔에 잠긴 소연이를 기다려주기로 하며 그 아이의 말을 되새겼다. 사실 생각해보면 오토바이도 아이스크림도 모두 나에게 해주신 것들이다. 할아버지는 소연이만 좋아하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는 구석에 앉아서 울음을 삼킬 것이다. 엄마는 항상 그랬다. 내 동생이 아파도, 내가 아파도, 아빠가 아파도, 할아버지가 아파도. 외할아버지는 거창에서 넓은 논을 운영하셨다. 빨간 트랙터를 이용해 넓은 논을 메꾸는 일을 하셨다. 작업은 항상 2인 1조로 했지만 할머니를 편히 두기 위해 혼자 움직이셨다. 거창군청에서 노인 복지로 혼자 움직이시는 할아버지를 도와주기는 했지만, 그날은 아니었나 보다. 태어나 엄마의 목소리가 엄마가 아니라고 생각이 든 첫날이었다. 할아버지는 트랙터에서 내리시다 그 빨간 기계에 오른쪽 다리가 깔렸다. 사고를 들은 엄마는 곧장 나가고 싶었겠지만 근무 중이라 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와 동생, 아빠까지 할아버지가 계시는 작은 병원에 갔다. 할아버지의 오른쪽 다리는 하늘을 향해 뻗어있었다. 천장에는 하얀 붕대가 흩어져 내려와 있었고, 할아버지는 초록색 유리병에 든 음료로 목을 축이고 계셨다. 좁은 탁자 위엔 허연 수증기를 내뿜는 가습기가 있었다. 아빠는 병실로 들어와 안부를 묻고, 곧바로 엄마와의 전화로 넘겼다.

"아빠 괜찮아? 많이 아파?"

그때 엄마의 목소리가 어려 보였다. 내 동생이 훨씬 더 어릴 때 화가 나서 유리컵을 던진 적이 있다. 유리컵은 벽을 맞고 깨져 엄마의 발에 푹-박혔다. 엄마는 신음을 내며 피를 흘렸고, 동생이 뒤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다가왔다.

"엄마 괜찮아? 많이 아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 뿐,

우는 소연이를 달래주고 다시 잠자리로 돌아오려고 하니 눈에 아른거렸다. 장례식장의 잠자리 뒤쪽에는 작은 창고가 있었다. 사람 한 명이 들어가면 조금 남는 그런 곳이었다. 엄마는 다리를 감싸고 눈물을 삼켰다. 엄마를 안아주고 싶은 욕구가 들었지만, 엄마를 안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 위로를 해주기 위해선 '공감'이 먼저 필요하다고 배웠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눈물에 공감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죽음이. 누군가의 안녕을 바라는 그 마음을 공감하기 힘들었다.

둘째 날이 오고 엄마가 한없이 작아졌다. 어제 엄마는 물 한잔조차 들이키지 못했다. 차가운 할아버지의 몸을 영안실에 넣어두고 마음 편히 물 한잔 넘기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던 것일까. 밥과 고기, 시래깃국. 엄마는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다댔지만 그것을 입속으로 넣어 삼키진 못했다. 마치 포우가 먹기 싫다고 거부하는 모습 같았다. 그렇기에 억지로 먹을 순 없다. 포우도 억지로 먹으면 오히려 NO를 외치며 뱉어냈다. 그래서 억지가 아닌 자의로 엄마 밥을 어떻게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니 시간이 많이 지났나 보다. 모두가 밖을 향했다. 나도 엄마와 아빠를 따라 나갔다. 따라 나간 곳은 바로 옆 건물에 있던 화장장이었다. 그곳이 무얼하는지는 커서 알게 되었지만 그곳이 안녕을 얘기하는 곳이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호기심은 나를 큰 기계 앞으로 이끌었다. 작은 발자국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나서니 아빠가 나를 잡아챘다. 뒤로 끌고선 눈을 가렸다. 눈이 검해지니 감각은 귀에 집중되었다. 가장 앞에는 외할머니, 대각선으로는 큰이모, 작은이모, 삼촌과 엄마가 뒤를 지켰다.

"아버지. 여태 수고하셨어요. 그곳에서는 부디 편하시길."

삼촌의 먹먹한 인사를 끝으로 기계음 소리와 함께 모두가 주저앉았다.

마지막 날이 왔다. 절대 오지 않을 것 같던 날이다. 할머니 댁까진 1시간 30분 정도가 걸렸고, 그사이 난 하루 동안 돌봐주지 못했던 포우를 열심히 돌봤다. 꼬질꼬질하다 못해 꾸질꾸질해진 포우를 씻겨주는 데만 50포인트다. 깨끗해지니 밥 달라고 방정이다. 이 아이를 부둥부둥 껴안고 살면 내가 먼저 파산할 것이 예상 간다. 포우는 내가 관심을 주지 않으면 넘어지고, 울고, 무감각해지다가 죽는다. 내 저번 포우도 2주조차 지나지 않아 죽었다. 포우를 씻기고, 밥을 먹이니 벌써 도착이다. 앞에 내리니 많은 사람들이 대기 중이었다. 남자는 중간에 서서 나무 상자를 어깨에 메고, 여자들은 앞뒤를 지키며 산을 올랐다. 험한 산길 중 엄마는 작은 돌에 걸려 넘어졌다. 아파선지 눈물을 멈추지 않았지만 내가 손을 내밀기도 전, 벌떡 일어났다. 걷고 걸으니 무덤이 보였다. 그 무덤은 봉우리가 파진 사다리꼴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나와 있으라고 하니 우린 아무 말 하지 않고 나와 토끼풀로 놀았다. 화관, 팔찌, 반지까지 3종으로 만드니 모두가 내려간다. 길을 돌아가 할머니 댁에 도착하자마자 제사 음식 냄새가 코를 찌른다. 심부름을 하고 엄마 옆으로 갔다. 제사를 해야 하니 남자는 가장 앞, 여자는 뒤였다. 엄마는 내 옆에서 2번씩 반복하여 절을 올렸다. 큰이모를 시작으로 김씨 일가 여자들의 눈물이 터졌다. 옆에 내가 있었기에 계속해서 울음을 입에 머금고 뱉지 않았다. 뒤에서 운다고 해도 멈출 수 없던 터라 제사는 이어져갔다. 삼촌과 큰집의 삼촌이 막걸리를 손바닥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나무 잔에 따랐다. 그러다 중간에 멈춰 음식과 술을 마시고, 다시 절을 이어나갔다. 엄마는 아까처럼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전처럼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지도 않았다. 맞다. 모두가 무감각해진 순간이었다.

시간이 지나 서로가 웃으며 할아버지를 얘기할 수 있게 된 것은 5년이 훌쩍 지나 내가 중학교 마지막을 보내고 있을 때다. 나는 할아버지가 떠나가시고 난 후 몇 달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나의 엄마도 맞지만, 한 사람의 소중한 딸이었다. 엄마는 평소 아들을 갖고 싶어하던 외할아버지 곁에서 3번째 딸로 태어나 구박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어린 마음에 할아버지도 구박하라고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 아빠거든~!" 하며 말장난을 쳐주곤 했다. 내가 생각한 우리 엄마는 항상 이런 모습이었다. 친구처럼 장난도 쳐주고, 눈이 동글하게 웃으며 슬픔이라곤 모르는 사람. 하지만 그건 내 고정관점이고, 편견일 뿐이었다. 엄마도 사람인지라 슬픔에 눈물 흘릴 줄 알았고, 어떨 땐 우리를 위해 슬픔을 삼킬 줄 아는 어른이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 이별을 겪는다면 엄마처럼 슬픔에 삼켜지진 않을 것이다. 5년 전, 내가 본 엄마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작았고, 슬픔의 사경을 헤매는 어린아이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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