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황제가 나라를 건국했을 때는 제도가 미비하고 민심이 불안해 작은 허물이라도 범하면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교사(校事)라는 관직을 만들었으니 이는 힘으로 천하를 장악하려는 사람의 임시방편이지, 덕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에게 맞는 법도가 아니다. 그러나 교사가 점차 황제의 신임을 얻게 되자 제 마음대로 감찰을 하게 됐다. (감찰 대상이 될지 안 될지 여부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것이라는 인식이 퍼지자) 조정에서는 관리를 선택할 때 근면하고 신중하게 하는 자는 소홀하다 하고, 바빠서 허둥대는 자는 능력 있다고 했다. 또 일을 처리할 때 각박하고 난폭하게 시행하면 공정하고 엄격하다 하고, 이치에 따라서 하면 겁이 많고 박약하다고 했다."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사람 정효가 한 말이다. 황제의 신임을 한 몸에 받게 된 감찰관이 '폭주 기관차'가 되어 칼을 마음대로 휘두르자, 그 폐단을 통박한 글이다. 이 상소가 전해진 후 위나라 교사 제도는 폐지됐다.

2019년 하반기 한국사회를 달구는 '조국 정국'에서 칼 자루를 쥔 검찰은 1700여년 전 위나라 교사를 떠올리게 한다. 시대와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그때와 지금이 딱 떨어지게 조응하는 건 아니지만, 대체적인 흐름은 얼추 비슷하게 볼 구석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적폐 청산이란 시대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검찰에게 힘을 실어줬다. 그러자 검찰은 '폭주 기관차'가 되어 급기야 지휘권자인 법무부 장관 집을 터는 일까지 벌이고 있다. 외견상 검찰 수사는 온당한 것처럼 여겨진다. 살아있는 권력에도 칼을 댈 수 있어야 한다는 대통령의 이야기를 잘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내막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장관 낙마를 목표로 한 달 넘게 먼지 털이 수사를 하고 있으며, 또렷한 혐의가 드러나지 않자 장관을 모욕하고 압박하는 언론 플레이까지 곁들이고 있다. 검찰 개혁을 기치로 내건 장관에 맞서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 하는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위나라 교사도 그랬다. 공정하고 합리적인 잣대로 감찰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그 대상이 누구든 주저 없이 칼끝을 조준했다. 자리와 권세를 보전하기 위해 없는 죄도 만들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감찰 대상이 될지 안 될지 여부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것이라는 인식이 퍼졌다'는 대목은 흡사 21세기 검찰공화국을 설명하는 듯 해 가슴이 서늘하다.

정효가 교사의 전횡을 고발하기 전 두서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남겼다.

"요즘 유학자들은 상앙과 한비를 스승으로 삼고 법가 학설을 배워서, 유가 학설은 실제 사정에 어둡고 실용에 적합하지 않아 세상이 널리 쓰이지 못한다고 앞다퉈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풍속 중에서 가장 심한 폐단으로 국가를 창업한 사람이라면 삼가야 한다."

동양사를 훑어보면 많은 유학자들이 생산적인 논의는 도외시한 채 공리공론만 일삼은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 '유협열전(遊俠列傳)'에서 "유(儒)는 글로써 법을 어지럽게 하고, 협(俠)은 폭력으로 법도를 훼손한다"고 했다. 원래 <한비자>에 등장하는 이 구절은 후인들이 유학자나 협객을 비난할 때 종종 인용하는 명구다.

하지만 후한 사람 왕충은 <논형(論衡)>에서 한비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는 유가가 지닌 역할을 예와 의리로 표현하면서, 이를 무시하면 그 무리는 자멸하고 만다고 주장한다. 

▲ 중국 후한 말 사상가인 왕충과 그가 쓴 논평.
▲ 중국 후한 말 사상가인 왕충과 그가 쓴 논평.

두서를 잇는 이 이야기는 이른바 한 사회가 예치(禮治)를 도외시하고 법가에 경도될 경우-만사를 가혹한 형벌로 재단하는-위기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말이다. '정치의 사법화'가 심화되고 있는 작금의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지적이다.

교사라는 직책을 운용했던 위나라는 신상필벌, 그 중에서도 필벌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삼국지> '조충전(曹沖傳)'에는 이런 일화가 등장한다.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일이 많았으므로 형벌을 적용할 때 매우 엄하고 가혹했다. 조조의 말안장이 창고에 있었는데 쥐가 갉아먹자, 창고 관리자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이 관리자는 조조가 사랑한 아들, 조충이 기지를 발휘해 살아나긴 했지만 '말안장 관리 소홀죄'도 사형에 처해질 만큼 형벌이 심했다는 건 아무리 긴장이 높은 시대였다고는 하나 사람들을 마음으로 복종하게 만들기 어려웠다.

위나라는 왜 그렇게 가혹한 형벌체제를 도입했을까? 위나라를 개창한 무황제 조조는 군웅이 할거하던 후한 말에 태어났다. 이 시기는 왕조체제가 뿌리부터 흔들린 혼란기였다. 엄격한 법도에 의거해 조직과 군대를 다스리지 않을 경우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가 사람을 뽑는 원칙도 덕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조가 내린 영(令)에 이런 게 있다.

"한신과 진평은 나쁜 평판과 비웃음 사는 부끄러움을 가지고도 마침내 국가 대업을 이룩해 명성이 천년을 이어가고 있다. 오기는 탐욕스런 장군으로서 부인을 죽이고도 스스로 행동이 옳다고 믿었고, 사방에 뇌물을 주어 관직을 구했으며 어머니가 사망했어도 고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위나라에 있을 때 진나라는 감히 동쪽에 있는 위나라를 침범하지 못했고, 그가 초나라에 있을 때는 한 위 조 세 나라가 남쪽에 있는 초나라를 넘보지 못했다. 빠짐없이 각기 아는 사람을 추천하라!"

조조는 정치군사적 투쟁이란 엄중한 현실에 직면하여 덕을 중시하고 재능은 경시하여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제로는 부실한 추천제도를 겨냥해 '유재시거(有才是擧 재능만 있으면 추천할 수 있음)'라는 기준을 대담하게 제시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조직 논리로 법가를 택했다.

그런데 첫 통일왕조인 진(秦)나라가 법가를 국시로 삼아 일패도지했기에 한나라 말기에도 법가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았다. 법가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상앙을 보자. 상앙은 진나라 재상이 되자 정치제도를 엄격한 법령을 토대로 한 제국형으로 바꿨다. 그러자 1년 후 진나라에서는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줍는 사람이 없었으며, 백성들이 분에 넘치는 물건을 함부로 받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법이 너무 각박하고 엄격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 줄 몰랐다. 

▲ 진나라 재상 상앙. 그가 만든 법령은 너무도 엄격하여 모든 이들이 몸서리칠 정도였다.
▲ 진나라 재상 상앙. 그가 만든 법령은 너무도 엄격하여 모든 이들이 몸서리칠 정도였다.

한나라 사람 유흠이 지은 <신서>에는 "상앙은 위수 강변에서 하루만에 죄인 700여명을 참수했다. 위수가 온통 붉게 물들고 호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여 원망과 원한이 산처럼 높아졌다고 한다. 참으로 엄청난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상앙은 천성이 각박하고 모질었다. 피에 굶주린 사람처럼 살인을 하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을 정도다. 

물론 재능과 법가를 앞세운 조조의 판단은 옳았다. 50년 가까이 사분오열된 난세를 정리하고 한나라를 대신해 위나라를 건국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가 선택한 길은 생전에 이미 증명된 셈이다.

그러나 조조 이후 이같은 법가 시스템은 곧 심각한 난관에 봉착한다. 통일왕조에 버금가는 나라를 세웠음에도 교사로 대표되는 징벌적 문화가 민심을 이반시켰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곳에서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생겨날 리 없었다. 법가 문화에 길들여진 이들은 새로운 파워 집단이 생기자 곧 거기에 몸을 의탁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래서 위나라는 불과 45년만에 사마씨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조조 후계자들은 이런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교사제 폐지는 때늦은 결정이었다.

▲ 강력한 법가주의 였던 위무제 조조
▲ 강력한 법가주의 였던 위무제 조조

두서보다 앞선 한나라 사람 저소손은 이를 예견했던 것일까? 그는 "험한 지형은 적을 막기 위한 것이고, 무력과 형벌은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족히 믿을 게 못된다. 무릇 선왕은 인의(仁義)를 나라를 세우는 근본으로, 고새문법(固塞文法 견고한 요새와 통치법률)을 지엽으로 삼았다"고 지적한다.

십 수만에 달하는 사람들을 도륙해 공포정치의 대명사로 불렸던 명태조 주원장 또한 말년에 이런 영을 내렸다.

"그동안 간사한 무리들이 무거운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확실해질 때에는 특별히 형벌을 추가하였다. 덕분에 간악한 무리를 절멸시켰지만 이런 조치는 수성(守成)하는 군주가 오래 쓸 방법이 아니다. 내 뒤를 잇는 군주는 법률에 의거할 뿐, 가혹한 형벌을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신하가 이런 형벌을 쓰자고 주청하는 경우는 모든 신료들이 탄핵상소를 올려 중형에 처하도록 하라!"

특무 조직을 통해 티끌만한 비위라도 발견하면 곧 죄를 덮어 씌워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던 그도 가혹한 처벌을 내세우는 사법기구가 정치를 압도하는 것이 나라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위나라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던 화흡이 한 말을 복기해본다. 그는 당시 관리 선발 책임을 맡고 있던 모개와 최염이 당대를 지배하던 선발기준인 '청렴'을 내세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천하 대기(大器 정치)는 관직과 인물에 달려있지, 절검(節儉)으로 판단할 게 아닙니다. 절검으로 만물을 판단하게 되면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사람들이 견디기 힘든 절검을 잣대로 관리 자질을 구분하려 한다면 일이 반드시 어그러질 것입니다. 위대한 가르침은 반드시 인정에 통하도록 해야 합니다."

화흡이 한 말을 21세기 한국사회에 대입해보자. 누군가가 고위직에 오른다.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반대파들은 의혹거리가 될 만한 것이라면 경중을 따지지 않고 이를 언론에 흘린다. 검찰이란 '교사 집단'도 그 인사가 기득권을 위협하는 이라면 티끌만한 흠이라도 찾아내려 혈안이 된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 인사는 '부패한 사람'이 되고 만다. 엄격하게 절검을 실천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그렇게 된다. 봉건시대처럼 목숨을 앗아가는 건 아니지만, 사실상 이 과정은 사회적 타살과 진배없다. 상식과 금도를 벗어난 의혹제기, 그리고 상식과 금도를 벗어난 수사는 가혹한 칼이 되어 곧 정치라는 대기를 좁쌀로 만들고 만다. 

다시 교사로 돌아가서 정효가 상소문에서 한 부연설명을 들어보자.

"처음 교사라는 직책은 행정에 관여하는 일이 없었다. 옛날 무황제께서 크게 사업을 일으켰던 초기에는 모든 관직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고, 병사들은 수고로움이 많았으며, 민심은 불안했다. 따라서 사소한 죄가 있어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교사직을 설치하여 그 일체를 다뤘던 것이다. 그러나 감찰하고 제어하는 데 방도가 있었으므로 교사가 함부로 방자하게 굴지 않았다…그러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황제의 신임이 높아지자) 폐단이 생기게 됐다. 그리하여 교사가 위로는 궁정과 조정을 살피고 아래로는 각 부서 관리들을 통솔하게 되었다. 법률은 붓 끝에서 만들어지고 법문과 칙령에 의존하지 않았다. 대신은 그들과 세력을 다투는 것을 두렵게 여겨 참으며 말하지 않고, 신분이 낮은 사람은 그들의 날카로움을 두려워하여 마음속에만 맺어놓고 고발하지 못한다."

교사를 꾸짖는 내용이긴 하지만 황제에게 올리는 상소문이기에 표현이 매우 완곡하다. 하지만 행간에 배어있는 논조는 준엄하다. 그때와 한국사회를 굳이 비교하자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겠다. 

교사직을 만든 초창기에 감찰하고 제어하는 데 방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교사가 자의적으로 권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했다는 말이다. 이 말은 한국검찰 권력이 정보부와 경찰 등 다른 권력 기관과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땐 나름대로 통제됐다는 말이다.(권력자가 검찰을 자의적으로 부린 경우는 제외하고)

▲ 한국 검찰의 압수수색 장면.
▲ 한국 검찰의 압수수색 장면.

그러다 폐단이 생기게 됐다는 말은 모든 합법적 형사권력이 검찰에게 집중되면서 부작용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법률이 붓 끝에서 만들어지고 법문과 칙령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말은 형식적 절차를 지키기는 하지만 사실상 대다수 범죄가 검찰 손끝에서 만들어졌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 다음 문장도 마찬가지다. 대신들이 그들과 세력을 다투는 것을 두렵게 여겨 말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유력 정치인이나 지도자급 인사들이 검찰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이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그들의 날카로움을 두려워했다는 건 장삼이사가 감히 그들과 맞서지 못하는 한국사회를 꼬집는다. 주무장관까지 이 잡듯 터는 마당에 어느 필부가 무슨 용기로 그들에게 맞서겠는가?

모든 권력이 감찰권으로 향하는 '교사 시스템'은 비단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활문화에 스며들어 사람들의 마음까지 황폐화시킨다. 정효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지금 누군가가 일을 처리할 때 각박하고 난폭하게 시행하면 공정하고 엄격하다 하고, 이치에 따라 하면 겁이 많고 박약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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