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극한에서 노래한 문화 빨치산 시인 한하운 이야기

멀지 않았던 예전의 들녘 곳곳엔 사월의 봄바람 따라 하늘거리는 보리밭을 자주 볼 수 있었지만, 요즘은 애써서 찾지 않으면 좀처럼 구경하기가 어렵다. 그래서인지 어느 시점 자주 들어보았던 보리 타작이란 말조차 낯설게 들릴 때가 많다.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83년 따뜻한 봄날, 평소 존경하며 잘 따르던 신부님과 함께 소록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시절 외부인의 출입이 흔치 않았지만, 신부님 어머니께서 의료봉사를 하고 계셨기에 자연스럽게 허용되었다. 하루 동안 소록도 전체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한센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환자의 거주지에서 오래 했던 동료를 떠나보내는 장례식에 참석하며 그들의 슬픔을 지켜보았다. 이 같은 연유로 대학 재학시절 동아리 친구의 부모님(치유가 되었지만 병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는 모습)이 계신 경기지역의 음성 한센인 마을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식사를 하며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때의 기억은 생생하며 한센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소록도를 떠날 즈음 중앙공원의 한자리를 차지하며 드러누워 있는 바윗돌을 보게 되었다. 신부님께서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가 새겨져 있는 시비라고 하시면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다.

이 시비는 일제강점기 시절 소록도에 4대 원장으로 부임한 수호 마사히데(周防正季)가 지휘대로 사용하기 위해, 수십 톤이 넘는 바위를 완도에서 운반하도록 수용환자들을 강제노역시켰다. 수백 명의 한센인들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지렛대로 움직여서 이동해 온 것이라 한다. 이때 바위를 옮기던 한센인들은 채찍에 맞아 살점이 찢어지고, 심지어 잠시 내려놓고 쉬는 동안 자신의 발등이 바위에 짓눌려 발가락 모두가 떨어져 나가도 고통을 느끼지를 못해, 비로소 눈으로 보고 흩어진 발가락을 무명천에 싸서 주머니에 넣고 다시 노역에 시달렸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을 강제노역에 희생되게 한 이 바위를 두고 '죽어도 놓고, 놓아도 죽는 바위'라 할 정도였으니, 그 당시 소록도 한센인들의 원한과 분노는 오죽하였을까. 그런데 이러한 사연을 가진 바위에 하고많은 좋은 글 중 한하운의 '보리피리'가 새겨져 있는 연유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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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하운 시인.

시인 한하운(1920~1975). 본명은 태영, 또 다른 이름은 '문둥이'였다. 함경남도 함주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936년 17세의 나이에 '나병(한센병)' 진단을 받았다. 중국 베이징대학 농학원을 졸업하고 1944년부터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에 근무하였으나 이듬해 병이 악화되어 직장을 그만두고 숨어든다. 이때 이름을 '어찌 내 인생이 떠도는 구름이 되었느냐'라는 뜻의 하운(何雲)으로 바꾸며 크게 상심하였다.

이후 함흥학생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1948년 월남했다.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구걸을 하며 연명을 했으며, 명동거리에서 시를 파는 사람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창작활동은 학창시절부터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문단활동은 1949년 이병철의 소개로 <신천지> 4월호에 '전라도길' 외에 12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전개되었다. 같은 해에 첫 시집 <한하운시초>를 정음사에서 출간했다.

그런데 <한하운시초>의 재판이 출간되면서 작자와 작품이 구설수에 오르는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나시인 사건'으로 1953년 여름, 주간지인 <신문의 신문>이 '문둥이시인 한하운의 정체'라는 타이틀로 한하운을 문화 빨치산이란 말로 매도하였다. 심지어 한하운이란 이름마저 국가 멸망의 저주를 상징하는 것이며, 시의 내용마저 적색 시라고 호도하였다. 또한 그것도 모자라 한하운은 허구의 인물이라고 날조하며 떠들어댔다.

여기에 사실 확인을 위해 취재를 지시한 사람이 서울신문사 사회부장으로 있던 오소백이었다. 최초의 <한하운시초> 중에 '데모'라는 시가 실려 있는데, 거기에 "피빛 깃발이 간다"라는 표현이 있었다. 당시 평론가 이모라는 사람이 정음사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관계로 문제를 일으킨 것이었다. 물론 동기는 시시했지만 이 문제는 경찰 뿐만 아니라 국회에서까지 논란이 되었고, 결국 한하운이란 인물이 실존함은 물론 그의 시도 불온하지 않다고 밝혀지면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 사건을 취재하도록 하면서 사건을 확대했다 하여 오소백과 사회부 차장 문제안 기자가 신문사에서 파면을 당했다. 그러나 그 취재과정에서 한하운으로부터 걸작의 시를 얻게 된다.

서울신문 편집국에 허름한 옷차림을 한 청년이 나타났다. 오소백은 시청 출입 기자를 통해 그가 유명한 문둥이시인 한하운이란 것을 알고 자리를 권했다. 그의 눈에 비친 한하운은 운동선수처럼 몸이 튼튼해 보였다. 조용히 지켜보던 그는 한하운에게 실제로 시인이라면 시를 한 수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시인은 기자의 물음에 답한 후 앉은 자리에서 한 편의 시를 써주고 자리를 떠났다. 바로 '보리피리'였다.

오소백을 비롯한 사회부 기자들은 그가 돌아간 뒤 시를 보고 매우 놀라워하며, '보리피리'를 낭독하며 모두 좋은 시라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기자들이 한하운이 만진 펜에 레프라(한센병)균이 묻었다고 소란을 피운 통에 오소백은 원고지로 펜을 돌돌 말아 휴지통에 내던졌다고 한다. 그 당시 일반인들은 여전히 한센병에 대해 무지했다. 병이 완치되어도 접촉을 기피했고 아주 무서운 천형의 병으로 간주하던 시절이었다.

이 시는 한하운에 관한 기사와 함께 신문에 실려 대중에게 알려졌으며, 1955년에 간행된 한하운 제2 시집의 표제시가 되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보리피리'는 작곡가 조념(1922~2008)이 만든 민요조의 가곡이다. 좋은 가곡을 만들고 싶었던 조념 작곡가는 평소 많은 시집을 접하고 있었는데,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를 보고 작곡할 결심을 했다. 그는 시속에 굽이굽이 숨어있는 한에서 전쟁을 겪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한을 발견했다고 한다.

시에 마땅한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고심하고 있을 때, 꿈속에서 아름다우면서 신선하고 특이한 선율을 들었다고 한다. "아, 이 노래다!" 하고 탄성을 지르며, 기억에 생생한 선율을 오선지에 옮겨 곡을 만들었다. 중앙방송국에서 당시 새 가곡을 소개하는 프로가 있었는데, 이 곡이 전파를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가자 청취자들의 반응은 대단하였다. 이 곡은 그 시절 정부가 외국에 우리 가곡을 소개하는 음반에도 수록되었는데, 조념이 최연소 작곡가였다.

'보리피리'는 나병에 대한 왜곡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일반인에게 아주 중대한 메시지를 던지는 시로 대표하며, 평생 한센인 구제 사업에 헌신하였던 시인 한하운의 공적을 기려 1972년 5월 17일 병원개원 56주년을 맞이하여 소록도 한센인의 애한이 서려 있는 바윗돌에 새겨졌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늴리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릴 때 그리워

피-ㄹ 늴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늴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늴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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