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이해하게끔 끊임없이 대화

창원시 대방동에 자리한 ‘박준수 한의원’을 찾았다. 박준수(56) 원장은 보여줄 게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근력 측정기를 내밀었다. 왼손에 쥐고 힘껏 잡아당겼다. ‘30’이라는 숫자가 나왔다. 다시 박 원장은 입을 벌려 보라고 했다. 들여다보고 난 후 “양쪽 턱 균형이 맞지 않다”면서 작은 스펀지 같은 것을 왼쪽 어금니에 물게 했다. 다시 왼손에 근력 측정기를 쥐고 당겨 보았다. 이번에는 ‘45’라는 숫자가 나왔다. 단지 스펀지 하나를 입에 물었을 뿐인데, 힘이 1.5배 증가한 것이다. 박 원장은 “몸 균형을 맞추면 원래 에너지가 최대화되어 나올 수 있다”고 했다. 박 원장이 환자 한명 한명을 대하는 방식이다. 단순히 처방만 내리는데 그치지 않고, 환자들이 이해하게끔 소통하려 노력한다.

‘한번 아니면 죽어도 아닌 것’

박준수 원장은 남해에서 태어났다. 6남매 가운데 외아들이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너 못 낳았으면 이 집 귀신 될 수 있었겠나’라고 말씀하셨죠. 그러니 저한테는 오냐오냐하셨죠.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습니다. 매우 엄하셨습니다. 제가 바깥에서 싸워 울고 들어오면 밥을 안 주셨어요. 그래서 강해질 수밖에 없었어요. 초등학교 때 세 살 많은 형이랑 붙어서 코피까지 흘리며 맞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집에 들어갈 때는 이기고 돌아온 것처럼 했지요.”

박 원장은 진주봉래초·진주중·진주고를 나왔다. 어릴 때부터 이른바 유학생활을 한 셈이다. 어디든 그렇듯 외지에서 왔다고 텃세 부리려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미 아버지로부터 단련된 박 원장은 호락호락하게 당할 리 없었다. 연필 따먹기에서 졌는데도 이를 부정하려는 친구들이 있으면 주먹질을 해서라도 받아냈다.

박준수 박준수한의원 원장./박민국 기자

가치관 또한 아버지 테두리 속에서 형성됐다. 한번 아니다 싶으면 죽어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죠. 가치관·도덕적 관념에서 그 척도는 하나여야 한다고 말이죠. 즉 그 잣대를 나한테는 후하고, 남한테는 엄하게 들여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후배들한테 싫은 소리도 많이 하죠. 좋게 말하면 공·사 구분이 확실한 거지만, 주변 사람들로부터 ‘여유가 없고 딱딱하다’는 얘길 많이 듣습니다.”

‘한약 신비로움에 진로 변경’

지금 박 원장 취미는 사진찍기다. 보유하고 있는 카메라만 6대다. 그는 사진에 대해 ‘흐르는 시간을 잡아 놓은 것’이라 생각한다. 사진은 큰 틀에서 그림과도 연관성이 있다. 박 원장은 한때 미술에 대한 꿈을 안고 있었다.

“학창 시절 그림을 좀 그렸죠. 대학도 미대를 가려 했습니다. 물론 판·검사 되길 원했던 부모님은 반대하셨죠. 그런데 그건 둘째치고, 고등학교 때 몸이 많이 안 좋았어요. 지금 병명으로 ‘과민성 대장염’이었어요. 병원도 다니고 했지만 효과를 못 보며 긴 시간 고생했죠.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한약 한 채 지어먹으니까 거짓말처럼 몸이 싹 낫더라고요. 그 경험을 하고 나니 한의학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죠. 그러면서 한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학 입시 3개월을 남기고 진로를 바꾼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동안 공부도 소홀히 했던 터였다. 몸이 좋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스스로 게으름을 부리기도 했다. 한창 공부할 고3 여름 방학 때 수박 장사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뚜렷한 목표가 눈에 들어오면서 공부에 대한 의욕도 자연히 따라왔다. 3개월간 죽어라 공부만 했다. 원광대학교 한의대에 합격했다.

박준수 박준수한의원 원장./박민국 기자

하지만 한의학에 흥미를 붙이는 데에도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예과 1학년 수업이 서양식 교육 위주로 진행되더라고요.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퇴서를 내려 했어요. 그러자 아버님께서 한 학기만이라도 다녀보고 결정하라고 하셨죠.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이 좀 흐르면서 어쨌든 본과 1학년이 되었어요. 그때 본초학을 배웠어요. 그걸 공부하니까 ‘세상 모든 병은 내가 다 고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한의학에 완전히 빠져들게 되었죠.”

고향 남해 뒤로하고 창원으로

박 원장은 대학 졸업 후 경험을 좀 쌓다가 29살 때 개인 한의원 문을 열었다. 고향 남해에서였다. 애초 돈 욕심 같은 건 없었다. 단지 부모님 모실 수 있는 곳이라는 이유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리 신 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못 됐다.

“어느 어르신이 문을 열고 들어와요. 젊은 제가 앉아 있으니 ‘아버지는 어디 계시느냐’고 물어요. 제가 한의사라고 하니 그냥 가 버리는 겁니다. 시골 어르신들 처지에서는 젊은 제가 믿음직스럽게 다가올 리 없는 거죠. 또 이런 일도 있었어요. 고향이다 보니 아는 선배가 연락해서는 한약을 좀 봐달라는 거에요. 부산에서 큰돈 주고 지은 건데 괜찮은 건지 어쩐 건지 감별 좀 해달라는 거죠. 시골이고, 또 고향이라는 독특한 정서가 있어 한의사로서 일하기에는 그리 녹록하지 않은 환경이었죠.”

그렇게 남해에서 시간을 이어가는 사이 아버지·어머니 모두 세상을 떴다. 박 원장은 이제 더 이상 남해를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7년 생활을 접고 창원으로 오게 됐다.

“경북 포항, 전남 광양으로 옮겨볼까도 했지요. 제철소가 있는 곳이라 경기를 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지요. 그래도 결국에는 경남 안으로 눈 돌렸죠. 토박이들이 적어서 오직 실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창원을 택했죠. 1993년에 지금 자리한 창원 대방동에서 개원했습니다. 남해 한의원을 정리하니 빚만 남아서 한동안 고생 좀 했지요. 집사람과 한 달 10만 원으로 생활하자고 계획 짰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창원에 오니 너무 좋았어요. 개원하고 두어 달 지나 ‘왜 이제야 왔을까’라고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여기서는 환자들을 정성껏 대하고, 또 노력하는 만큼 인정받을 수 있었거든요.”

박준수 박준수한의원 원장./박민국 기자

한 해 두 해 가면서 창원에서 완전히 자리 잡았다. 그러던 중 뒤늦게 학구열이 불타올랐다. 사실 박 원장은 이전까지는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 다닐 때도 탈춤에 빠져 한량처럼 전국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30대 중반 들어 공부 삼매경에 빠졌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제가 아들 둘·딸 하나거든요. 한날은 술 한잔 먹고 집에 들어갔는데, 5살 된 큰아들이 ‘아빠, 나는 착한 어린이야’라고 뜬금없이 묻는 거에요. 그 소릴 듣자 ‘나는 과연 착한 한의사일까’라는 의문이 들더라고요. 반문해 보니 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였어요. 또 다른 계기도 있었어요. 어느 아주머니가 전화로 뭘 묻기에 제가 별로 성에 차지 않는 답을 했나 봐요. 그랬더니 ‘당신은 박사도, 교수도 아니면서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하느냐’고 하는 거에요. 그때부터 정말 공부에 매달렸죠.”

이후로 하루 4시간 이상 자 본 적 없을 정도로 책을 팠다. 그렇게 7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박사 학위도 따고, 대학 강의도 나갔다. 하지만 사람 몸 돌보는 일을 하면서도, 정작 자기 몸은 살피지 못했다. 몸에 이상이 찾아와 다섯 달 동안 고생을 했다. 그 탓에 한의원도 잠시 휴업하기도 했다.

./박민국 기자

3년 임기 경남한의사회장 맡아

박 원장은 한의사로서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부분이 있다. ‘환자들에게 진정으로 옳은 의료인은 뭘까’에 대한 부분이다.

“진료해서 이상이 없으면 약은 지어주지 않는 게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환자들은 약 처방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서운하게 생각해요. 그런 측면에서 요즘은 의료인의 친절은 과연 뭔가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박준수 박준수한의원 원장./박민국 기자

박 원장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아니다’ 싶으면 나서야 하는 성격이다.

1993년 한약조제권분쟁 당시 경남비상대책위원으로, 지난해에는 정부 정책에 맞서 경남비상대책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올해 4월부터는 3년 임기인 경남한의사회장을 맡았다. 가욋일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옳은 일이다 싶으면 행동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뒤에서만 군소리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경남한의사회장을 맡게 된 건 선배들로부터 부름을 받은 거죠. 큰 포부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맡아야 할 일이기에 내가 좀 희생하면 되겠다 싶었죠. 올해는 산청세계전통의약엑스포도 있어서 일이 좀 많네요. 제가 원래 저혈압인데, 한의사회 일 3개월 하고 나서 혈압이 높아졌어요.”

본업, 그리고 공부에 투자하는 시간도 부족할 터인데, 조직일까지 맡은 것이다. 늘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그 속에서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절대 소홀히 하지 않으려 한다.

부인은 같은 남해 사람이다. 박 원장 아버지 눈에 들어 한평생 동지가 되었다. 중·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오랫동안 일하다 지금은 집안일만 돌보고 있다. 아들 둘은 아버지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고, 딸은 의대생이다. 박 원장은 딸에게 ‘한의학을 이해하는 양의사’가 되길 바라고 있다.

박준수 박준수한의원 원장./박민국 기자

“아이들과 늘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서울 출장이 있거나 그러면, 한 달에 가족 얼굴 몇 번 보기도 어렵죠. 그래도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마련하죠. 주로 여행을 많이 합니다. 애들이 ‘우리처럼 가족 여행 많이 하는 집은 없을 거야’라고 합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아버지 아닌가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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