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칼럼]대학가요제 단상

완연한 가을이다. 상념도, 사랑도 깊어지는 계절이다. 사람으로 치면 중장년에 해당된다. 희망의 꽃봉오리 부푸는 봄날을 지나, 땀흘리며 노력하는 왕성한 청년기인 여름날을 보내고 맞는게 인생의 가을이다. 수확의 기쁨을 맛보길 누구나 기대하지만 지난 여름의 끝처럼 태풍매미와 유사한 악재를 만나기도 한다. 인생이 새옹지마라지만 악재를 만났을 때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런 때일수록 훌훌 털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젊음이 부러워지기도 한다. 지난 4일, 한밤중에서 새벽까지 이어진 대학가요제는 젊음에 대해 생각케 하기에 충분했다. 카메라가 빚는 영상효과 덕분인지 그들의 지치지않는 열정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동시에 젊음은 욕구분출로만 그치지않는 정제됨도 필요하다 싶었다.

70년대와 다른 2003년

오늘날 대학가요제는 물론 27년전 태동시기와 위상이 같지않다. 70년대말은 지성인들의 아마추어리즘이 잘 살아있으면서도 암울한 사회상과 맞물려 있어서,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인 지는 몰라도 지금 들어도 격조가 있는 음악으로 와닿는다. 문화향수거리가 많지 않았던 그때 대학가요제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대학문화 전반의 분위기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80년대 말까지 정치성을 강하게 띠던 대학문화는 90년대 들어 많은 혼란과 동요를 거쳐 대량소비문화로 대대적으로 반전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대학주변은 노래방 비디오방 커피점 록카페 등 각종 소비문화에 포위되다시피 했고, 대학생들은 현란한 볼거리 먹을거리로 온통 관심이 기울었다. 관심사도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보다 개인의 성취와 애정문제에 더 무게가 실렸다.
이날의 14편의 곡에도 그런 오늘날 대학생의 관심사와 대중문화판의 흐름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이미 음악뿐 아니라 예술전반에 경계허물기는 대세가 되었다. 대학가요제라고 다를 바 없었다. 노랫말이 연애담이 주를 이루는 건 말할 것 없고, 클래식한 오페라풍과 국악풍이 퓨전되어있는 건 물론이었다. 극과 극을 오가는 실험적인 아마추어리즘도 있었다.
예상대로 대상은 경북대의 남성 듀오 ‘솔레노이드’가 부른 <강요>라는 곡에 돌아갔다. 그 팀이 돋보인 것은 노래의 완성도도 있겠으나, 젊은이다운 패기와 열정이 느껴지는 가사, 가창력이 한 몫했다. 가진 자, 힘있는 자들이 강요하는 세상에 대한 풍자를 하면서 ‘자유롭고 싶은’열정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가요제 행사 전반에 대해선 재고가 필요해 보인다. 이미 연예산업이 도를 넘어선 현재, 대학가요제는 또 하나의 연예인을 부르는 잔치로 전락했다. 행사의 행태가 바뀐 것에도 분위기는 감지된다. 주객이 전도됐다고 여겨질 만큼 초청된 가수들이 많다. 그들은 두세팀이 경연한 뒤 중간중간 나와 분위기를 돋웠다. 과거의 1부가 경연, 2부가 초대가수들 무대였던 형식과 확연히 다르다.
이 또한 경계허물기의 하나인 진행방식인 지 몰라도, 마치 ‘대학가요제’라는 행사에 할당된 시간을 채우기 위해 초청가수들의 기성노래판을 선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주객이 전도되어서야

가수들이 대학가요제 수상곡을 부르기는 해도, 최신 인기가요 중심이 되는 건 물론이다. 각종 지역의 축제행사에서 인기가수를 불러 시끌벅적하게 한판 놀아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대학가요제를 오로지 대학문화의 연장선상에서만 파악할 수는 없다. 일정부분 상업적 요소가 깔려 있는 탓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학가요제가 가수 등용문이 아니라면, 오늘날 부지기수로 넘치는 또 하나의 유사 가요제여서는 안된다. 대학생이 주인공이라면서 객체로 머물게 해선 안된다는 의미다.
27살이나 먹은 대학가요제, 이젠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점검과 변화가 필요하다. 더구나 대중을 향해 공중파로 생중계될 정도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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