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외침, 메이데이 (5) 1979년생 익명
고졸과 대졸 차이를 '기술'로 좁힐 수 있다 믿었다. 기댈 데 없는 삶. 기술에 기대겠다고 조선소로 들어갔다.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를 겪었다. 그날의 비명이 귓가에 박혔다. 아이가 신나서 소리라도 지르면 그날로 되돌아간다. 아이 그림 속 나는 '도깨비'다. 겨우 정신 잡았지만 조선소를 벗어나지 못했다. 2주 전에도 조선소에서 폭발 사고로 사람이 죽었다. 아이가 부모 뒷바라지 필요 없을 때까지 나는 살아있을까. 아니. 그때까지 못 살 수도 있겠다.
기댈 곳이 없었다. 학교 공무원인 아버지와 새어머니 밑에서 3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자랐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집안일에 관심이 없었고, 새어머니와 사이도 좋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교통사고가 났다. 꼼짝없이 병원 신세를 지는데 영장이 날아왔다. 11개월 동안 침대 위에 누워 있는데 군대에서 오란다. 때마침 국회의원 아들 병역 비리가 터졌다. 그 물살에 휩쓸려 다리에 철심을 박은 채 입대했다. 군대에서 그 생각만 했다. '나는 무슨 일을 할 때 행복할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른에게 기댈 수 있었더라면, 상의라도 했을 텐데….
전역하고 공장으로 들어갔다. 경기도 송탄 미군 부대 근처에서 LED 화면 백라이트를 만들었다. 직업은 돈벌이 수단이었다. 조장을 맡다가 정규직을 제안받았다. 회사 동생과 술자리에서 월급 얘기가 오갔다. 입사도 나보다 늦고. 얘는 사원, 나는 조장. 내가 일을 가르쳐줬다. 그런데 나보다 연봉이 높았다. 이유는 하나. 고졸과 대졸 차이였다. 월급도 성적순이었다. 배신감에 불신까지 밀려와 사표까지 냈다. 사회는 이런 건가. 내가 바꿀 순 없으니 기술이라도 배워야겠다 싶었다.
"형, 저 대신 조선소에 갈래요? 돈 많이 준대요." 그때 '조선소' 세 글자를 처음 들었다. 회사 후배가 제안받은 일자리가 내게로 넘어왔다. 회사에서 한 달에 160만~180만 원 벌었다. 조선소 사람들은 300만 원 넘게 가져간단다. 무조건 가야겠다. 포항과 삼척, 울산에서 일했다. 그전까지 경기도와 충남도 내륙에서만 지냈기에 바다는 생소했다. 월급이 밀리거나, 허름한 달방이 숙소였다. 낯선 타지에서 별일 다 겪었다. 사수는 동갑이었다. 동갑내기 친구 옆에서 조수로 일했다. 그땐 창피하기보단 기술을 배워야겠단 생각밖에 없었다.
조선소 전체 조회 시간이면 남자들끼리 우르르 몰려왔다 사라지는 무리가 있었다. 무슨 일하는 사람인가 했는데 파워공이란다. 일당이 어마어마했다. 남들은 시급 4700원 받을 때 일당 16만~17만 원이라니. 월급이 몇 배 차이 났다. 돈을 좇아 도장에서 파워공으로 넘어갔다. 내게 직업은 돈벌이 수단이니까. 그때 울산에서는 조선소 사람들을 내보내려 했다. 조선소는 늘 그랬다. 필요할 땐 단가를 올려서 사람을 모았다가, 급한 일이 정리되면 단가를 쳐낸다. 먹고 나가라는 거다.
신분 따른 불합리한 차별 '염증'
기술 배우려 조선소 파워공으로
일감 줄어들까 현장 나간 그날
사람들 덮친 크레인에 아수라장
2017년 2월, 거제 삼성중공업으로 내려갔다. 울산과 달리 일이 많았다. 업체에서 일을 받아오면 검사 날짜까지 어떻게든 마무리해야만 했다. 업체별로 통계를 낸다. 누구는 4박 5일 만에 끝내는데 너희는 똑같은 인원으로 더 걸렸다면서 일을 적게 준다. 업체는 서두르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일하다 죽거나, 장애가 생긴다. 태반이다.
'그날'이 왔다. 그라인더 작업을 하고, 샌딩을 쳤다. 쇠에 붙은 불순물을 제거하면서 표면을 까칠까칠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그래야 페인트가 잘 붙는다. 작업 과정에서 나온 모래가 계속 쌓였고, 그걸 치웠다. 1.2t짜리 분진백에 모래를 쓸어 담았다. 타워 크레인 신호수를 불러 치워 달라고 했다. 타워 크레인이 분진백을 가져가고 자리에 남은 먼지를 치우고 있었다. 검사 감독관은 현장 작업 상태를 지켜봤다.
그런 거 있지 않으냐. 어떤 사람이 길 가다 위를 쳐다보면 다 같이 올려다보는 거. 골리앗 크레인이 지나갔다. 타워 크레인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 어? 어? 어? 신호수가 있는데 멈췄다. 찰나였다. 골리앗 크레인이 밀었다. 신호수가 있는데 골리앗 크레인이 밀었다고? 이건 있을 수 없는 사고였다. 큰 쇳덩어리가 팍 고꾸라졌다. 벼락 치는 줄 알았다. 여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가 귀에 박혔다. 그날을 생각하면 여자 비명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옆에 있던 도장부 이모들이 보이지 않는 팀원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울었다.
우리가 6층 높이에 있다면 사고 지점은 3층 정도. 난간에 기대면 아래가 보였다. 보지 말까, 볼까. 망설이다 아래를 봤다. 2초 봤나. 보자마자 고개 돌렸다. 보기 싫었다. 크레인에 달린 와이어가 휙, 휙, 휙 돌아가면서 여기저기 때리고 있었다. 와이어에 맞아 사람이 다치거나 붐대에 닿아 사람이 죽었다. 10대가 넘는 구급 차량이 오갔다. 아. 심각하구나. 그런 일을 겪으면 사람이 붕 뜬다. 넋이 나간다고 표현해야 하나. 일하기 싫었지만 그럴 수 있나. 가장인데 돈 벌어야지. 삼성중공업은 작업 중지가 떨어졌고, 그사이 다른 업체에서 야간작업을 했다. 한 달 정도 야간에 일하며 돈 벌었는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네 살배기 아이가 있다. 신난 아이가 소리를 지르면 그게 비명처럼 들렸다. 그날 내 머릿속에 박힌 비명 말이다. 시끄러워! 조용히 해! 아이에게 화를 냈다. 어느 날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그림을 그려왔다. 그림 속의 나는 도깨비였다. 왜 이렇게 그렸느냐 물었더니 아빠는 소리 지르고 무섭다고 했다.
아내까지 눈치 봤다. 아이가 시끄러우면 아내가 노심초사했다. 나 하나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내가 집에 피해를 주는구나. 힘들었다. 나도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고 싶은데. 정신과에 가야 하나. 내가? 사람들한테 이상하게 보이나? 공황장애도 생겼다. 아이와 친해지려고 기차여행을 갔다. 요즘 아이들은 기차 탈 일이 없으니까, 가면 좋아하겠지. 터널을 지나는데 식은땀이 났다. 여기서 뛰쳐나가고 싶다. 되뇌었다. 아이 손을 꽉 잡았다. 부산역에 내리자마자 다리가 풀렸다.
엘리베이터만 타도 떨어지면 어떡하지 불안했다. 피부 안에 수천 마리의 지렁이가 기어 다녔다. 1시간 넘게 긁었다. 시원하지 않았다. 별짓 다 해도 소용없었다. 병원에 가니 하지불안증후군이란다. 일종의 정신병이다. 꿈에서도 안전하지 않았다. 칼에 맞고, 도망 다니고, 잡혀가고. 독한 약을 먹어도 잠들지 못했다. 소모품으로 쓰이다 버려졌다. 사업주 찾아가서 죽여버리고 싶었다. 불가능한 일이니까 분노가 내게로 향했다. 내가 무능력해서 그래. 그러니까 걔들 밑에서 일한 거지. 자책했다.
삼성중공업 사고를 겪은 뒤 4년 넘게 치료받았다. 손해배상청구 소송으로 900만 원을 받았다. 처음에는 화해 권고 결정이 내려졌다. 우리가 걔들하고 싸웠나? 어떻게 이렇게 결과가 나올 수 있지? 이건 코미디지. 정신 질환으로 산재가 인정된 경우가 드물고, 판례가 없어 판결을 못 내린단다. 너무 웃긴다. 우리나라 조선소 세계 1위라고 떠들면서 노동자 처우는 후진국이다. 고향에서는 조선소 일한다고 하면 좋은 대접 받는 줄 알던데 절대 아니다. 조선소 쳐다보기도 싫었다. 산재 기간에는 그래도 치료받으면서 돈 받았지만 그마저 끊겨서 일하러 갔다. 이미 가정은 꾸렸고, 이 나이에 새로운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
네 살배기 아이 소리에 화 내고
계속된 불안증세에 정신적 고통
먹고살고자 일터로 복귀했지만
안전불감증 여전 사망사고 넘쳐
2020년, 다시 조선소로 갔다. 당시 몸무게가 86㎏이었는데 두 달 정도 지나니까 14㎏이 빠졌다. 크레인만 봐도 불안했다. 앉아서 쉬지도 못하고 계속 서성거렸다. 약 기운으로 버텼다. 조선소에서 일 못 하겠구나. 일하면서도 그 생각만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출근하고, 또 다음날 출근하고. 억지로 다녔다. 지금도 일부러 몸을 혹사한다. 몸이 피곤해서 곯아떨어지려고.
조선소는 여전하다. 2주 전에도 폭발 사고로 사람이 죽었다. 옛날하고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사고 나면 보여주기식으로 안전교육하고 사진 찍고 작업 중지 기간 풀고. 이러니까 사고가 일어나지. 안전교육하면서 우리 업무랑 전혀 상관없는 문제를 풀라고 한다. 우리가 볼 일도 없는 호스 색깔을 보고 무슨 용도인지 맞히는 문제였다. 용어 자체도 처음 보는데, 그 짓을 하고 앉아 있다. 이러니까 사고가 나지. 너무 어이없다. 조선소에서 사망사고가 너무 많이 일어나니까.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뒷바라지가 필요 없을 때까지 살아있을까. 그때까지 못 살 수도 있겠다 싶다.
중대재해처벌 등에 관한 법률로 사업자 구속된다고 해도 편법 쓴다. 다른 사람을 대표로 앉히는 거다. 일본에서는 조선소에 입사하면 관리자도 의무적으로 현장에서 근무한다더라. 그래야 관리자로 들어갈 수 있다고. 우리도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 관리자들은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너무 모른다. 자기 밑에 있는 애들은 당연히 잘 되고 있다고 보고하지. 작업자들이 얼마나 위험한 현장에서 일하는지, 얼마나 복지가 형편없는지 직접 와서 한 번이라도 눈으로 들여다봤으면 한다. 물론 걔들이 본다고 해서 바뀌진 않겠지만, 돈 드니까.
관련기사
잠깐! 7초만 투자해주세요.
경남도민일보가 뉴스레터 '보이소'를 발행합니다. 매일 아침 7시 30분 찾아뵙습니다.
이름과 이메일만 입력해주세요. 중요한 뉴스를 엄선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