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외침, 메이데이 (4) 1996년생 익명

형편 어려워 한푼 더 벌고자
함께 일하던 '이모들' 설득해
연고 없는 거제서 선박 도장
일터 옮긴 지 한 달 만에 사고

사회에 막 발을 디딘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거제가 어딘지, 하청업체가 뭔지, 노동절이 법정 유급휴일인지도.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를 가까이서 목격했을 뿐인데 지금까지도 자신이 아프고 힘든 까닭조차 잘 모른다. 그는 거제를 떠나면서 그저 땀 흘린 만큼 돈을 받고, 친동생처럼 살갑게 챙겨주는 '형'과 '이모'가 있어 행복했다는 기억만 남겼다.

1996년생. 인천에서 태어나 줄곧 살았다. 2015년 대학교 한 학기 다니고 적성에 맞지 않아 군대 가기 전에 돈을 벌려고 '고수익'을 찾았다. 집에서 지원을 받을 형편이 아니어서 그냥 돈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린 나이라 할 일이 많지 않았다. 다른 데는 보통 최저시급을 주는데, 조선소는 월 300만 원 구인 광고를 했다. 실제로는 열심히 일하면 받겠지만 기술이 쌓여야지, 처음인 사람에게는 그렇게 안 준다.

거제도가 어딘지도 몰랐다. 남쪽에 있는 섬인 줄 알았다. 섬은 맞는데, 차를 타고 갈 수 있는지도 몰랐다. 처음 대우조선해양에서 잠깐 일했다. 하청인지, 원청인지 그런 것도 몰랐다. 개념이 없었다.

조공(조수)으로 용접 일을 했다. 형들이 돈을 많이 벌기에, 여기서 일하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나이가 어려서인지 잘 대해줬다. 제일 어린 형이 서른 살이었다. 다 형이라고 불렀다. 마흔 살 아저씨도 형이라고 불렀다. 2층짜리 숙소에서 5~6명이 같이 지냈다. 술도 사주고, 먹을 것도 사주고. 행복했다. 그 나이에 그만큼 돈 벌 곳도 없었다.

조선업이 호황이던 시절 거제에는 지나가는 개도 돈을 물고 다녔다던데, 내가 받는 돈을 보면 진짜 예전에는 더 좋았겠다 싶었다. 영어를 어릴 적 배워서 관심도 많았다. 영어를 잘하는 작업자 출신 선주는 연봉도 많이 받는다고 했다. 희망이 조금 생겼다.

용접팀이 해체되고, 부산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 터치업(도장 작업)을 해보겠느냐 제안했다. 돈을 더 많이 준다니까 몸에 더 해로운지 아닌지도 모르고 옮겼다. 시작 단가는 용접보다 도장이 더 높았다. 섬세한 성격이라 도장이 적성에 더 맞았다.

도장일 할 때도 주변에서 가족처럼 잘 챙겨줘서 좋았다. 만날 기특하다고 했다. 일이 능숙해지니까 돈 더 받고, 열심히 하니까 돈 더 받았다. 도장 일은 여자가 많아 남자는 험한 데에서 일을 하니까 몸값이 올랐다.

 

가족처럼 지낸 이들에 미안해
잠 못 자고 술에 빠져 살기도
시간 지나도 괴로운 현실 여전
정상적으로 살고 싶단 생각만

많이 외로워서 술자리가 있으면 자주 갔다. 술자리에서 알게 된 누군가 삼성중공업에서 돈을 더 준다고 했다. 단가 3만~4만 원 더 주면 차이가 컸다. A급은 5만~6만 원을 더 쳐준다는데, 같이 일하는 이모들 데리고 오면 나도 A급 단가로 맞춰주겠다고 했다.

일 잘하는 이모들을 설득했다. 그것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잘 다니던 이모들, 20년 넘게 일한 이모들 일 그만둘 때 배신자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 한 달 만에 사고가 났다. 가족처럼 챙겨주던 사람들이 전화 와서 한마디씩 했다. 비난을 많이 받았다.

사고 나기 한 달 전 옮겼다. 2017년 3월 말 즈음이었다.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짧지만 1~2년 본 경험이 있는데, 삼성중공업은 원래 그런가 보다 했다. 원래 감독관 앞에서는 반장도 살살 긴다. 삼성중공업에서는 감독관을 본 적이 없었다.

파워공과 도장공은 만날 일이 없어야 한다. 그전까지는 새벽에 일하고 가는 파워공만 봤다. 삼성중공업에서는 당장 옆에서 샌딩을 하고, 다른 쪽에서는 용접을 하고, 도장도 같이 하고, 그냥 뭐 뒤죽박죽이었다. 누가 문제 제기를 하지도 않았다. 이모들도 살다가 이런 적은 처음 봤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급하면 종종 이런다고는 했다. 공사기간이 임박해서 빨리 내보내려고 그랬나 보다. 돈을 더 준다고 했던 것도 빨리 끝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때는 몰랐는데 신문 기사 보고 알았다.

담배는 안 피우지만 이모들 담배 피울 때 따라가서 같이 쉬었다. 삼성중공업은 닭장에 가두는 것 같아 너무 스트레스였다. 거기 그렇게 가운데 안 해놨으면 사람도 안 죽고 덜 다치지 않았을까. (크레인 가까이 휴식 공간인 간이 화장실과 흡연실이 있었고, 사고 직전 얼른 쉬려고 여러 노동자가 좁은 공간에 몰려 피해가 컸다.)

그때 완전히 공황 상태라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고, 끔찍한 느낌만 있고, 어떻게 내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이모들부터 찾았다. 당했을까 봐.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다. 다칠 수도, 죽을 수도 있다고 듣기만 했지 한 번도 위험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럴 줄은 몰랐다.

▲ /일러스트 서동진 기자 sdj1976@
▲ /일러스트 서동진 기자 sdj1976@

2018년 2월 거제에서 나오기 전까지 폐인이었다. 독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모은 돈 계속 쓰면서 회사에서 나오라면 잠깐 나갔다. 돈을 벌어야 하니까 누군지는 몰라도 작업이 있어서 나오라면 나가야 하나 싶어서 나갔다. 대우조선에서는 하청업체 소속이기라도 했는데 삼성중공업에서는 나중에 알고 보니 하청에 하청에 하청에 하청,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 소속이었다.

몇 번 일하러 나갔다가 더는 못 나갔다. 크레인이 너무 무섭고, 깜짝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계속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모들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진짜 가족처럼 따랐던. 내가 뭐라고 데려와서 이런 일을 겪게 했나 싶었다.

회사에서 심리검사를 했는데 보건소에서 전화가 왔다. 상담을 받으러 오라고 했다. 안 간다고 했는데 또 연락이 왔다. 나중에는 모르는 아저씨가 전화가 와서 도움을 주려고 한다며 밥도 사줬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막 울면서 힘든 이야기를 했다. 그때는 무슨 말만 하면 울었다. 원래 눈물이 잘 안 나는데, 계속 울고 술을 찾았다. 병원을 가야 한다고 계속 말하던데, 정신병원은 가기가 싫었다. 거절하다가 설득됐다. 잠을 못 잔다는 사실을 병원에 가서야 알았다. 항상 술을 마셔서 각성이 돼 있었다. 의사가 처방한 약을 먹으니 편했는데, 약이 점점 늘어서 먹으면 힘이 들었다.

한 번은 이상한 경험을 했다. 전봇대만 봐도 놀랐다. 사고 당시와 비슷한 것만 봐도 그랬다. 작년까지도 그랬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괜찮다. 요즘은 가끔 악몽을 꾸는 정도다. 지금도 약은 먹는다.

산재 신청을 도와줘 돈이 나온대서 인천으로 왔다. 처음에는 내 돈으로 치료를 받았다. 산재 승인을 받고서는 병원비가 무료라서 솔직히 고마웠다. 근데, 산재 개념을 회사에서 알려주면 안 되나?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서류 준비하는 데도 협조적이지 않아 화가 났다.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 더 도왔다. 제도가 있는지도 몰랐다.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거제를 벗어나면 끝날 것 같았는데 달라지지 않고 계속 이상했다. 친구를 만났는데 내 성격이 바뀌었다고 했다. 이상하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화를 많이 낸다고 했다. 아직 사고 얘기를 한 사람은 두 명밖이다.

2018년 겨울에는 해리 증상도 겪었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몰랐다. 겨울인데 무언가 위협을 계속 느껴 집에 못 있겠어서 계속 밖에 서 있다가 허벅지 전부 동상을 입었다. 갑자기 불안하고, 집에 있으면 무너질 것 같았다.

처음에는 감기처럼 괜찮았다가, 안 괜찮았다가 했다. 아무 이유 없이 불안할 때가 있다. 문득 한 번씩 온다.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의사는 사람이 잘 때는 편안해지고 낮에는 각성이 돼야 하는데 그 기능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밤에 깨든, 낮에 깨든 규칙적이어야 증상이 심하지 않대서 지키려고 한다.

재판이 끝나면 내게 사과를 한다던가. 난 멍청한가 보다. 사과를 받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싶다. 정상적으로 살고 싶다. 남들은 공감 못 한다. 그렇게 많이 힘드냐고. 다친 것도 아니고, 팔다리가 잘린 것도 아니고. 죽을 위기를 겪은 거고 죽는 것을 목격한 거지. 내가 힘든 것을 나도 이해하기 어렵다. 수치스럽고, 이상한 감정이 복잡하게 든다. 그래서 재판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사과한대도 불편할 것 같다. 5년 지나서 그런다는 것 아니냐. 재판받고 사과를 하면, 진심도 아니지 않겠나. 책임자가 있긴 한가 싶다.

진짜로 다친 사람들, 몸을 다친 사람들은 만났나. 궁금하다. 나도 이렇게 힘든데, 그들은 어떨까. 유가족도 있지 않나. 그날이 근데, 나중에 알았다. 다른 데서는 원래 쉬는 날이란 것을. 평일이라서 아무 생각 없이 나오라니까 나간 건데. 번호도 바꿨다. 거제 나올 때 옷 같은 것, 새롭게 출발하고 싶어서 싹 다 잠적하듯이 다 버렸다. 모르겠다. 바뀔까. 진짜 바뀌면 좋겠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

궁금한 게 있다. 진짜 왜 관심을 보일까. 그때 아무 이유 없이 100만 원을 그냥 준 사람이 있었다. 고마운데, 왜 줬을까, 그리고 왜 관심을 보일까 궁금했다. 이번 인터뷰도 왜? 중요하다고는 들었는데 뭔가 달라질까 궁금했다.

 

용어 설명

△파워공 : 배에 도장을 하기 전, 파워 그라인더로 철판 녹이나 이물질을 제거하는 노동자.

△샌딩 : 배 외관이 녹슬지 말라고 도장을 하기 전, 모래나 쇳조각을 고압으로 쏴 철판 표면을 벗기는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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