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교육헌장 제정작업에도 참여

노산은 1968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국민교육헌장 제정작업에도 참여하였다. 7월 4일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권오병 문교부 장관의 주도로 만들어진 일종의 교육장전(敎育章典)인 국민교육헌장은 박종홍(대통령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 안호상, 이은상, 박준규(서울대), 이만갑(서울대), 김성근(서울사대), 정범모(서울사대), 이규호(연세대) 등 26명의 기초위원과 48명의 심의위원이 초안을 작성하였다. 초안은 문교부가 7월 26일 발표하였다. 각계각층으로 구성된 심의위원에는 교육계의 박종홍, 이선근, 임영신, 김옥길, 문화계의 안호상, 이은상, 김팔봉, 박종화, 이병도, 종교계의 김수환, 이청담, 최덕신, 한경직 그리고 언론, 경제, 정치계 인사가 포함되어 있다. 김팔봉은 국민교육헌장을 국민들이 암송하고 낭독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8년 11월 26일 국회의 만장일치 동의에 따라 12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이 선포하였다. 1890년 일본의 메이지 천황시대에 제정한 군국주의적, 국수주의적인 교육칙어와 매우 유사하다. 1948년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뒤 이를 가르치고 낭독하는 게 금지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오히려 새롭게 제정한 것이다. 25년 정도 지속되면서 매년 12월 5일에 기념행사도 가졌는데 1994년부터 폐지함으로써 국민교육헌장은 사실상 폐기되었으며 2003년부터는 국가기념일에서도 삭제되었다. 25년 동안 국민교육헌장은 '우리'라는 말을 다섯 번이나 사용하면서 '나'보다는 나라와 민족을 단위로 하는 '우리'를 강조하였고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개인을 억압하는 논리로 작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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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교육헌장선포.

국민교육헌장 제정과정에서 처음엔 노산 이은상이 책임지고 기초위원회에서 초안을 작성했으나 시원찮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본격적으로 박종홍이 만들었다. 철학계의 태두로서 나름대로 존경받던 박종홍의 최악의 친독재 부역 행위로 손꼽힌다. 멸사봉공을 강조한 이 헌장은 제일 마지막 부분인 '대통령 박정희'로 끝나는 전문이 393자로 되어 있다. 박종홍과 이은상은 교과서 편찬과정에서도 국가주의 강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성신여대 강진호 교수는 그의 저서 <국어교과서의 탄생>(글누림)에서 "국어 교과서에서 국가주의 관련 담론이 전면적으로 등장한 것은 박정희 집권기인 2차 교과과정기(1963~1973년)에서였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하 1차 교과과정기(1955~1963년)의 국어과 교육목표 제9항 '학생들의 개별적인 소질과 능력의 차이를 중시한다'가 빠지고 다른 항목과 중복되는 독서 관련 항목으로 대체된 것이 시사적이었다. 박종홍, 김기석, 최호진, 이은상 같은 2~3차 국어 교과서의 주요 필자들은 박정희가 쿠데타 직후에 만든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재건국민운동본부'의 핵심 성원들이었다. 이들이 교과서에 실린 논설과 수필 또는 시와 희곡 등을 통해 전파한 국가 이데올로기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애국주의와 반공주의의 뿌리"라는 것이 강 교수의 판단이다. 그는 박종홍의 논설 '사상과 생활'과 '한국의 사상', 이은상의 시조 '고지가 바로 저긴데'와 기행문 '피어린 육백 리', 유치진의 희곡 '청춘은 조국과 더불어' 등이 대표적이라최재봉, 반공주의와 전체주의의 텃밭, 한겨레신문, 2018년 1월 26일 자고 지적하였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를 제창한 황장엽의 김일성 주체사상이 김일성을 우상화했듯이 박종홍과 안호상의 우리식 민주주의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우상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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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교육헌장.

입각 권유를 거부한 게 유신시대에 저항?

시인 김시종에 의하면 1967년 자신의 첫 시집 <오뉘>의 머리말을 부탁하기 위해 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노산의 자택에 들렸을 때 자신이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제3공화국 출범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노산 이은상 선생을 국회의장으로 추대하고자 제의가 있었지만 끝까지 시인으로 사시겠다는 이은상 선생의 뜻을 박정희 대통령도 이해하고 이효상 씨가 국회의장직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몇 년 후인 '유신정권 치하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문공부 장관직을 제의했으나 고사했다. 전두환 정권 때 국정자문위원이 된 것도 그들의 일방적인 지명에 따른 것인데 왜 지탄받아야 하느냐'는 논리가 있다. 1972년 10월, 유신헌법 선포 직후, 정부에서는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저명인사들을 불러서 언론보도, 개인연설 등을 한창 종용할 때였다. 이때 노산의 집을 방문한 황희영(전 중앙대 교수)에 의하면 밖에서 걸려 온 전화 내용을 전하는 비서에게 "이 노산은 평생 제복, 제모를 입어보고 써 본 일이 없다고 해. 내게 정부에서 주는 모자를 쓰고 다니라는 말은 하지 말아 달라고 해. 이 노산은 노산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유익될 것이라고 해!"라고 했다고 한다.

시조시인 김복근은 이 사례를 들면서 '유신정권에 저항하면서 당당하게 살았다', '불의를 보면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지사적(志士的)인 인물(人物)'이라고 설명한다. 전화 내용을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추측건대 고위 공직에 임명하겠다는 내용인 것 같다. 물론 이 제의를 뿌리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유신정권에 저항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심한 비약이다. 나아가서 지사적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 같다. 거절과 저항은 전혀 다르다.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시인 구상은 공개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대학교 총장이나 문교부 장관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였을 때, 단호히 거절하면서 "임자, 내가 당신을 도와주는 최상의 방법은 민간에 남아 있는 것이요"라고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친구처럼 지내는 선우휘에게 감사원장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본의 단가인 하이쿠(俳句)를 인용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들에 핀 꽃이 어여쁘다 해서 집안에 옮겨 심으면 아름답겠느냐?"남재희, <통 큰 사람들>, 리더스 하우스(2014년), 140쪽 선우휘는 감사원장 자리를 끝까지 고사하였다. 쉽지 않은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유신정권에 저항했다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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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엄선포공고.

시인 박목월은 서울신문 1972년 11월 18일 자에 기고한 '10월 유신의 사명과 동기'라는 제목의 글에서 '지금까지의 과열, 혼란, 낭비를 거듭해온 선거제도를 물리치고 당권, 당리에만 사로잡혀 몰지각한 조국의 정치현실에서 탈피하려는 그야말로 과감하고 혁신적인 것'이라고 조장하였다. 박목월은 박정희 전기도 썼다. 소설가 이인화는 <영원한 제국>을 통해 개혁군주 정조에 박정희의 상을 오버랩시켰고 곧이어 <인간의 길>을 통해 노골적으로 박정희를 찬양, 미화하였다. 그 후 뚜렷한 이유 없이 필생의 업이라고 자랑하던 전기소설 <인간의 길>의 집필을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문인협회장 김동리는 전국 문인들에게 왕복엽서 한 장씩 발송하였다.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의 의사표명을 분명히 하기 위해 찬성과 반대의 두 칸 중에 하나에 동그라미를 쳐서 엽서를 반송하는 양식이었다. 그리고 대답이 없으면 찬성으로 간주한다는 단서가 붙어있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유신체제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긴급조치법 위법이어서 곧바로 체포되는 상황이었다. 어느 누구도 반대 칸에 동그라미를 칠 수 없었다. 몽땅 찬성이었다. 어용기구로 타락한 문인협회의 회장이 실천한 이 여론조사 방법은 어떤 방법보다도 권력에 아부하는데 가장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문인단체의 활동이 문인을 외면하고 권력에 약한 모습을 보인 사례는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도 있었다. 최근에 발간된 소설가 황석영의 자전 <수인>(문학동네)에 의하면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국제펜클럽은 뜻한 바 있어 펜클럽 제52차 세계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당시 한국펜클럽(회장 전숙희)은 문인협회나 예총 등과 마찬가지로 관변단체에 불과했으므로, 미국펜클럽 회장이었던 수전 손택은 황석영 등의 문인들과 접촉해, 김남주 시인 등 구속 문인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통과시키고 한국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뜻을 전한다. 그러나 뜻밖에도 결의문 채택은 부결됐는데 그때 놀라서 눈물을 삼키던 수전 손택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한국펜클럽 측의 환호였다. 당시 신문 기사에 '동료 문인을 석방하자는 해외 문인들의 결의안을 부결시키고 오히려 기뻐하는 한국 문인들의 정체성에 국제펜클럽 회원들은 혼란을 느꼈다'라는 내용이 실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훗날 밝혀진 저 부결과 환호의 내막은 이렇다. 한국펜클럽 회장과 관련자들이 대회 전날 해외 문인들의 호텔 방을 방문해 거액이 담긴 봉투를 돌리며 반대와 기권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노산은 1972년 10월 청우회 중앙본부 회장으로 있으면서 '무질서와 비능률을 배제하여 국기를 공고히 하려는 박 대통령의 영단에 적극 찬동한다'는 뜻의 유신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각종 매체에 기고한 시론, 대담을 통하여도 유신정권을 찬양하고 유신정권의 독재이데올로기인 '한국적 민주주의' 이념을 지지하고 선전했다. 1978년 <유신정우> 3월호에 '광의로 볼 때 근대화 새마을운동 유신, 이 세 단어는 서로 다른 운동이 아니라 한 얼굴에 명함만을 서로 바꾸면서 쉼 없이 자극을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 분명 이 운동은 성공을 거두고 말 것입니다. …… (이것을) 결코 정치적인 의미로서만 파악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지요' 라고 유신을 찬양하였다. 박정희 정권시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마산출신의 3인방이 있었는데 청와대의 박종규 경호실장과 군부의 노재현 국방장관, 문화예술계의 이은상이었다. 당시의 각종 기록에 의하면 문화예술인 가운데 청와대를 무시로 드나들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 이은상이였다고 한다. 노산은 박정희 정권과 친했다.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지 11년, 3선 연임제한의 헌법을 고친 지 3년, 4·27 대통령 선거로 대통령에 취임한 지 1년 반 만에 1972년 10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 금지한 채 비상국무회의를 설치하였다. 3선 개헌에 이어 또다시 개헌을 하기가 어려웠고 71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고전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재집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결국 군대를 동원하여 헌법기능을 마비시키고 영구집권을 위한 친위쿠데타인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다. 유신의 주요내용은 국민직선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간선제,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 국회해산권, 대통령이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국회의원 및 법관의 임면권 등 모든 권력을 대통령 1인에게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유신 선포를 함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골리앗이 되었다. 같은 권력자에 의해 자행된 무혈 쿠데타에 모든 국민은 숨을 죽이고 있던 암흑기였다. 모든 언론은 폐간 불안에, 모든 대학은 폐교 협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종합대학교로 승격되면서 1982년부터 1986년까지 경남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윤태림은 '노산을 직접 접하기 전 그분에 대한 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글 전용을 국책으로 강력히 건의한 분이라고 전해졌기 때문이다. …… 그뿐만 아니라 문인이 정치 권력과 밀착한다는 것은 어느 의미로 보나 문필에 종사하는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는 일종의 괴팍스러운 생각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라고 하였다. 윤태림은 나중에 마산에 내려온 후에 노산을 직접 만나 본 후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은상과 윤태림은 이미 서로 아는 사이었다. 윤태림은 숙명여대 제5대 총장으로 1965년 1월 22일부터 1969년 1월 21일까지 4년간 근무하였다. 이은상은 그 기간 중인 1968년 4월 25일부터 숙명여대 재단 이사로 선임되었다. 약 1년간 재단이사와 총장으로 만났던 것이다. 그 후 노산은 9대, 10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한글전용정책 수립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활동

박정희 대통령이 이순신 장군 다음으로 숭배한 역사적인 인물은 세종대왕이었다. 1970년에는 한글날을 국경일로 지정했으며 1975년에 건립한 민족문화의 전당을 세종문화회관으로 명명했고 어린이회관 앞에 세종대왕의 동상을 세웠으며 동시에 한글전용정책을 추진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부터 교과서를 일본처럼 한자혼용 방식으로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정부의 국어정책이 뒤바뀌는 것을 보고 국어운동대학생회에서는 광화문에서 시위를 하였다. 이은상, 한갑수는 평소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을 존경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조상의 업적을 선양하기 위해서라도 한글전용정책을 펴달라고 건의하였다. 이미 1966년부터 한글학회 이사였던 노산은 일찍부터 한글전용을 주장하고 있었다. 1967년 10월 9일 한글날, 서울대, 고려대 국어운동대학생회 공동주최로 고려대 캠퍼스에서 한글전용 선언대회를 열고 대통령과 문교부 장관에게 드리는 건의문을 채택, 발송하고 거리에서 국민들께 드리는 호소문을 나누어주는 행사를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내용을 신문에서 보고 대통령의 문화담당 특보였던 이은상을 급히 청와대로 들어오라고 했고 대통령이 부르는 까닭을 짐작한 노산은 한글전용운동의 근본 취지를 글로 적어 가지고 청와대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얼마 뒤 한갑수는 청와대의 요청으로 한글전용 5개년계획 시안을 만들어 전달했다. 이어서 정부는 1968년 3월 한글전용 5개년계획을 발표하였다. 앞으로 5년 이내에 우리나라 안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문서는 물론 신문, 잡지 등 모든 글자살이에서 한자를 일절 쓰지 못한다는 아주 강력하고도 획기적인 정부시책이었다. 노산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69년 10월에 한글공로상 대통령상을 받았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께 징역을 산 이우식은 1963년에 한글공로상을 받았다. 그 후 노산은 한글회관 건립위원회 위원장으로서 1977년 회관을 준공을 위하여 노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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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력안보궐기대회.

1972년 3월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을 하였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1976년 이 기념사업회를 지원하여 <세종실록> 30권을 완간하게 했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께 징역을 산 최현배최는 이미 1957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46년 호남신문사에 있을 때부터 가로쓰기를 실천한 노산은 한글을 통한 민족정기를 세울 수 있는 기회였고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민족주체성을 세우는 정권임을 과시할 수 있었다. 위로부터 시작된 한글전용정책에 의해 MBC 방송프로그램 MBC페스티벌은 MBC대향연으로, 해외토픽은 해외소식으로 바뀌었고 각 방송국에서는 패티 김을 김혜자로, 김 세레나를 김세나로 부르는 해프닝이 생기기도 했다.

노산은 1973년에 5·16민족상을 수상하였는데 1966년 3월에 설립된 재단법인 5·16민족상은 학예, 교육, 사회, 산업 등 4개 부문 시상을 초기에 하였다. 법인의 총재는 박정희, 이사장은 김종필이었다. 최현배는 이미 1967년에 5·16민족상을 받았다. 이어서 노산은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한 후 이를 옹호하는 관변단체인 총력안보서울시협의회가 1975년 5월 10일 창립되었을 때 회장을 맡았으며, 1975년 5월 8일 발족한 총력안보국민협의회의 의장도 1976년에 맡았다. 이 단체는 1975년 4월의 베트남 패망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개최된 국가총력안보 국민궐기대회의 결의로 만들어진 단체였다.

신중현과 베토벤은 음악만 할 줄 알았던 게 아니다

마산 노산동에 조성해놓은 가고파 거리에는 이은상 안내판이 있는데 3·15의거를 폄훼했다는 친독재 전력도 적어놓았다. 한편 마산역 광장에 가면 가고파 노산 이은상 시비 옆에 '시인의 친독재가' 안내판이 '한국 민주주의의 요람 민주성지 마산 수호비'라는 이름으로 세워져있다. 시인 오하룡은 이 수호비를 '이은상 선생 폄훼 철판비'라고 부른다. 폄훼(貶毁)는 다른 사람을 깎아내릴 뿐만 아니라 헐뜯는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노산이 3·15를 폄하했는지, 시민단체가 노산을 폄훼했는지는 노산이 살아온 삶 전체를 진지하게 살펴보면서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일부 시민들은 그 시대의 험악한 상황에 대해 지금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일리 있는 견해이다. 다만 그 시대에도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이 있었으며 그분들이야말로 진정 훌륭하신 분이다.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에게 1972년 유신 직전에, '박정희 대통령의 새로운 통치를 내용으로 한 노래를 만들어 달라' 즉 박정희 찬가를 만들라는 주문을 했는데 신중현은 단호히 거절했다. 이 거절 이후 박 정권은 신중현의 공연장에 늘 경찰을 내보내 단속을 하게 했고 나중에 '대마초 파동'이라는 결정적인 보복을 하였다. 신중현은 노래만 부르는 음악인이 아니었다.

베토벤은 자신의 모든 힘을 발휘해 나폴레옹에게 바칠 걸작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멀리 파리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자기 손으로 왕관을 쓴 황제에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보나파르트'라고 적혀있는 악보 사본의 표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나폴레옹이 귀족들의 우두머리인 황제에 등극했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2년 뒤인 1806년의 교향곡 3번 '영웅'을 출판하면서 한 사람의 영웅을 회상하기 위해 작곡했다는 문구를 적어놓았다. 베토벤 역시 작곡만 할 줄 아는 음악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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