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청(河淸). 만의 서북쪽을 칠천도가 가로막아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에 달 비추니 물이 맑고 하늘이 밝아 하청이라 했다. 거제에 딸린 섬 중에서 가장 큰 칠천도와 실전 사이의 좁은 수로를 지나 하청만으로 들어서면 작은 섬들이 점점이 떠 있는 그림 같은 풍경이 나타난다. 이 조용하고 아름다운 바다 속 어딘가에 거북선이 잠들어 있다. 4백여 년 전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전한 칠천량 해전의 아비규환이 들리는 현장이다. 싸움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알고자 갯가에 서니 발아래 찰랑이는 잔물결만 보일 뿐 큰 물굽이가 보이지 않는다. 칠천량 해전의 숲을 보려 또 산길을 잡는다. 하청 삼거리에서 유계, 덕곡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타고 달리니 노거수 몇 그루 드문드문 아담한 들판 뒤로 멀리 앵산이 보인다. 칠천도와 하청 전역 조망이 가장 좋은 곳이다. 선거철도 아닌데 길가에 붉은 펼침막이 간간 눈에 띈다. 폐교한 유계초등학교에 들어선 유리섬유제품 생산 공장 이전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인근의 산업단지나 공단을 두고 굳이 시골 마을 한가운데 들어와 갈등을 빚는지 모르겠다.

등산을 목적으로 오르는 산행이 아니니 채비가 엉성하다. 집에 굴러다니는 중절모에 운동화, 츄리닝 바지에 패딩 하나 걸치고 어슬렁어슬렁 올라보자. 빈대가 하도 많아 시달리다 못한 스님들이 절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는 북사(北寺)터인 대숲에서 숨을 고른다.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와 함께 영남 4대 사찰에 든다는 큰 절이었다는데 설마 빈대 때문에 불을 질렀겠나 북사의 동종이 일본 사가현 혜월사에 있다하니 왜구의 노략질에 불타 없어졌겠지. 북사지를 지나니 산길이 제법 가풀막이다. 내친 김이라 되돌아서지도 못하고 허위허위 오르는데 맨발에 꺾어 신은 운동화를 고쳐 신어도 땀이 차 두어 번 미끄덩 엎어지고 자빠진다. 2천 미터 육박하는 지리산 천왕봉을 동네 뒷산 재 넘듯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깟 5백이면 동산이구나 아주 몰캉하게 보았다. 그러나 거의 해발 0에서 출발한 섬뫼는 산허리쯤에서도 출발할 수 있는 뭍뫼와 자못 달랐다. 동네 주막거리 나서는 차림새로 뒷짐 지고 나섰다가 무르팍이 코를 치는 비탈에 식겁을 한다. 보도시 정상에 오르니 산불 감시 초소가 있다. 목이 말라 물이나 좀 얻어 마시러 들렀다가 가슴에 피멍만 들었다. 공손히 물을 건네주며 내 또래쯤 보이는 산불 감시원이 묻는다.

"어디로 해서 올라오셨습니꺼?"

"하청 유계 광청사로 올랐습니더."

"하이고~ 욕보네예. 올해 연세는 우찌 되시는데예?"

머시라 연세에?

"그 뭐 연세랄 나이도 아닌데 뭘…."

나이를 들먹이지도 못하고 선웃음으로 얼버무리는데 이 양반 다시 오금을 박는다.

"참말로 정정하시네예. 그 연세에 스틱도 없이 오르시니 대단하십니더."

이런 젠장… 칠천량을 바라보며 패전을 복원하는 내내 옆에서 정정하시고 대단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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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방향으로 본 칠전량./사진 윤병렬

저 멀리 부산과 진해가 보이고 칠천량 좁은 수로 아래쪽 하청만에는 씨릉섬, 북섬과 작은 곶이 있어 견내량과 한산도 앞바다처럼 지형지물은 충분히 이길 싸움인데 왜 원균은 패했을까? 다시 갯길을 돌며 패전의 나무를 들여다보고자 발길을 돌리는데 내 이야기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동년배인 듯한 이 분, 손때 반질반질한 나무 지팡이를 내민다.

"어르신 좋은 일 하신다고 욕보시는데 이거 갖고 가이소. 하산길을 더 조심해야 합니더."

머시라 어르시인? 이런 또 젠장….

하청에서 칠천도로 넘어가는 모리고개 중먼당 오른편 산기슭이 온통 푸른 대밭으로 덮여 있다. 대도 그냥 대가 아니라 어른 허벅지 굵기의 왕대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죽순이 전국 생산량의 7~80%를 차지한다. 맹종읍죽(孟宗泣竹), 맹종설순(孟宗雪筍) 고사를 지닌 맹종죽이다. 중국 삼국시대 강동 오나라 문관으로 맹종이라는 효심이 지극한 사람이 살았다. 어느 추운 겨울 병환으로 자리보전하던 그의 노모가 느닷없이 죽순이 먹고 싶다고 한다. 엄동설한에 죽순이 났을 리 만무하건만 맹종은 몇 날 며칠을 눈 덮인 대밭을 헤집고 다녔다. 아무리 찾아다녀도 죽순은 없고 어머니의 기력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니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다 지쳐 대밭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다음 날 정신을 차려 일어나보니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눈이 녹아있고 죽순이 뾰족하니 솟아있었다. 하늘에 감사하며 어머니께 죽순을 드시게 하였더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사람들이 맹종의 효심을 기려 이 대나무에 맹종의 이름을 얹어 맹종죽이라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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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종죽./사진 윤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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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족죽 숲./사진 윤병렬

칠천대교 아래 실전리 나루 끝에 장대를 드리운 태공들이 서넛 칠천량의 아우성을 낚고 섰다. 조선소에서 함께 일하다 정년으로 고향에서 세월을 낚고 있는 지인이 그들 중 있었다. 불문곡직 옛날이야기 한 자루 풀어보라고 국밥집으로 끌고 갔다. 아는 이야기가 어디 있냐더니 술이 한 순배 돌자 술술 나온다.

옛날 옛날 간날 갓적에 칠천도 물 안에 바다에다 조실부모하고 비럭질로 살아가는 형제가 있었더란다. 옛이야기 다 그렇듯 형은 놀부 같고 아우는 흥부 같이 착했어. 칠천도 처녀는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을 못 먹고 간다는 말이 있어 거기서는 빌어먹을 게 없단 말이지. 그러니 땟마를 타고 본섬으로 나와 동냥을 하는데 착한 아우는 매일 잘 얻어먹어도 못된 형은 사람들이 동냥을 잘 주지 않는 거라. 형은 제가 동냥할 것을 동생이 다 얻어먹는다고 용심이 나서 눈을 찔러 소경을 만들어 쫓아내 버렸어. 봉사가 된 아우가 천방지방 헤매다 날이 저물어 빈집을 하나 찾아든 게 저기 앵산 빈대절에 타고 남은 전각이라. 밤에 자려니 빈대가 하도 달라붙어 대들보 위에 올라가서 자는데 한밤중 두런두런 말소리가 나 내려다보니 어이쿠야 도깨비들이 모여앉아 세상 구경한 이야기를 하고 있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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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산./사진 윤병렬

"내 오늘 칠천도서 동생 눈을 찔러 내쫓는 숭칙한 형을 봤다네."

듣고 보니 제 말이라 귀를 세우는데 다른 놈이 말을 받아 "요 북사 아래 샘물에 눈을 씻고 그 옆에 동백나무 잎으로 눈을 비비면 도로 밝아지는데 그걸 모르나 그래."

뜻밖의 소리에 쾌재를 부르고 있는데 또 다른 놈이 "모리고개 사환마을 신첨지 외동딸이 앓아누웠던데 그 동네 대밭에 사는 천 년 묵은 지네를 달여 먹이면 낫지."

또 한 놈이 나서며 "요 아래 유계 들판이 가물어 바짝 말랐던데 들 가운데 수구나무 아래 둠벙을 파면 물이 철철할낀데 수구(水口)나무라 부르면서도 못 찾으니 참 미련한 것들일세."

다음 날 절 아래로 내려와 물소리 쫄쫄 나는 곳에서 씻고 동백잎으로 비비니 참말 눈이 도로 밝아지더래. 그래 사환 신첨지네 가서 외동딸 병을 고쳐 장가들고 유계 들판에 물을 내어 전답 얻어 잘 살았단다.

"그럼 용심 많은 그 형은요?"

"몰라. 동생이 걷어 먹였겠지?"

소주 두어 병에 돼지국밥으로 이야기 값을 치르고 칠천량을 건넌다.

물길 한가운데 물에 잠긴 등대와 머리에 작은 소나무 같은 나무를 머리에 이고 있는 조그만 여가 보인다. '매미섬'과 '용의 치'다. 천 년 묵은 용과 매미가 서로 승천하려고 바다 위에서 얽히고설켜 싸우는데 사람들이 무서워 방문을 걸어 잠그고 벌벌 떨었다. 싸움이 여러 날 계속되자 참다못한 마을 아낙이 나서 가버리라고 악다구니로 소리를 지르자 용과 매미 둘 다 승천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뚝 떨어져 여가 되었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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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전도 옥녀봉./사진 윤병렬

거제섬 발품팔이를 하며 두 번째 옥녀를 만난다. 칠천도 옥녀봉이 하청만의 씨릉섬과 북섬을 굽어본다. 여기서도 옥녀는 옥황상제의 딸이며 명을 어기고 죄를 지어 지상으로 쫓겨난다. 자식 교육이 잘못되었는지 옥녀는 모두 문제아로만 등장하는구나. 하늘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다 산이 되어버린 옥녀는 거문고를 연주하며 무료함을 달랜다. 거문고 가락에 "씨릉 씨릉" 소리를 내어 장단을 맞추던 섬은 '씨릉섬'이 되었고 흥이 난 남해 용왕이 두드리던 북은 '북섬'이 되어 옥계마을 앞에 자리 잡았다. 대곡마을 앞을 지나다 왼쪽 바다를 보니 섬 속의 섬으로 걸쳐진 아치 다리가 구름차일 드리운듯하다. 백세 장수하신 분들이 많아 노인덕도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황덕도다. 섬의 북쪽에는 날물이면 바다가 갈라져 솔개(송포)마을과 걸어 드나들 수 있는 수틀뱅이섬(수야방도)은 숫돌 만드는 돌이 많은 섬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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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릉섬./사진 윤병렬

섬을 휘돌아 다시 칠천량에 섰다. 이렇게 거센 물길에 드러나지 않는 여가 있고 작은 섬과 곶이 흩어져 있어 매복하고 공격하기가 견내량과 한산도보다 오히려 나을진대 어이해서 원균은 참패를 했을까? 나름 패착을 생각해 본다.

1597년 음력 7월 15일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 칠천량과 하청만에서 원균은 거북선 3척과 판옥선 100여 척을 모두 수장시키며 일본 수군에게 유일한 승리를 안겨준다. 칠천량 해전이다.

도망 다니던 임금 선조는 부산포로 재침한 왜군을 공격하라 명하지만 전황상 당장 출전하면 필패라 시기를 기다리던 이순신을 의심하여 파직하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삼는다. 이순신의 수비전을 비난하던 원균 역시 통제사의 자리에서 보니 섣불리 출전할 상황이 아니라 핑계를 대며 한산도에서 움직이질 않는다. 상관인 자신을 통하지 않고 조정에 장계를 올려 출전을 미루자 도원수 권율은 원균을 억지로 1차 출전시키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자 사천으로 불러 곤장까지 친다. 육군참모총장이 해군참모총장을 부하들 앞에서 쪼인트를 깐 셈이다. 체면 다 구기고 떠밀려 부산 절영도(영도)까지 2차 출전하나 적의 대선단을 만나 싸우다 지쳐 퇴각하던 중 물을 구하러 상륙한 가덕도에서 매복한 왜군에게 4백여 명의 병사를 잃고 거제 영등포에 올랐다가 또 수많은 병사를 잃는다. 7월 15일 칠천량 남쪽 하청만에 닻을 내리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한산 해전과 같이 좁은 수로로 밀려들어온 적선을 넓은 만에서 매복했다가 학익진으로 에워싸고 화포로 공격할 전술을 짰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안골포에서 칠천도 뒤를 돌아온 적 함대와 칠천량으로 쫓아온 적선에게 오히려 포위되어 조선 수군은 완전히 궤멸하고 만다. 이 때 가까스로 전라도 쪽으로 탈출한 배설의 열두 척이 '명량'의 명대사로 남았다.

칠천량의 첫 번째 패착은 무지몽매한 지도자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선조는 조선시대를 통털어 최고의 각료를 구성하고 있었음에도 자신의 나약한 기반을 감추기 위해 시기와 아집을 부리고 당쟁에 휘둘려 많은 일을 그르쳤다.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닥달한 것이 그 하나다.

두 번째 이순신과 원균에게는 재량권이 없었다. 승승장구할 때야 별 탈 없었지만 불리한 상황에서 전장의 장수가 일일이 장계를 올려 탁상공론하는 조정의 지시대로 전쟁을 치른 것이다. 요즘 말로 전시 작전권이 없었다고나 할까.

핏빛으로 물든 저녁 바다를 보고 섰노라니 문득 공자 가라사대 한 구절이 떠오른다.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라 하셨다.

옛일을 떠올려 오늘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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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리./사진 윤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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