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서인 <송사(宋史)>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회남 도적 송강(宋江)이 수도인 경사(京師) 동쪽 여러 고을을 약탈하자 해주 지주(知州) 장숙야(張叔夜)가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송나라 수도 개봉 동쪽에서 날뛰던 도적 송강을 해주 장관인 장숙야가 토벌했다는 짧은 문장이다.

하지만 여기서 파생된 민간 전승담(傳承談)은 해를 거듭하며 켜켜이 쌓여 마침내 <수호전(水滸傳)>이란 찬란한 금자탑을 이룬다. '수호(水滸)'란 물 가장자리, 즉 변두리를 말하는데 탄압받고 버림받은 인생들이 모여든 곳이란 뜻이다.

쌍도끼를 휘두르며 불문곡직하고 상대 머리통을 날리는 흑선풍(黑旋風). 불한당인 그에게 자초지종이나 논리 따윈 없다. 십자파 주막에서 행인들을 도살해 만두에 넣어 파는 채원자(菜園子)와 모야차(母夜叉). 이 부부는 스스로를 협객으로 자처한다. 임충(林沖)이나 양지(楊志)처럼 말단 무관출신들도 있으나 <수호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처럼 대부분 무뢰배나 도박꾼, 조폭 아니면 보따리 장사치다.

<수호전>은 시내암(施耐庵)이 저자로 돼 있으나, 시장통에서 구연(口演)되던 민중설화를 정리한 민중문학이다. 폭압적인 전제정치 하에서 숨도 못 쉬던 백성들에게 하류인생들이 벌이는 복수 드라마만큼 강렬한 대리만족이 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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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호전>에 등장하는 송강.

<수호전>은 장회(章回) 소설이다. 하나하나 스토리가 완결되면서, 말미에 "궁금하면 다음 편을 보시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송강은 이 드라마를 끌고 가는 주인공 중 하나다. <송사>에 따르면 그는 실존인물이다. 그러나 <수호전>에 등장하는 송강은 이름만 빌렸을 뿐 사실상 창조된 캐릭터다. 70회 본(本)으로 이뤄진 '김성탄 수호전'에서 17회에 등장하는 그는 이야기를 연결하는 매개역할을 하면서 그 자신도 왕왕 핍박받는 당사자가 된다.

재미있는 것은 108두령을 이끄는 대두목인 그가 시골 아전 출신이라는 점이다. <수호전>을 한국 영화로 만든다면 송강은 '이방(吏房)' 정도가 될 듯싶다. 창봉(槍棒)을 제법 다루기는 하나, 출신에서 드러나듯 완력은 별로다. 그렇다고 용모나 자태가 뛰어난 것도 아니다. 흑삼랑(黑三郞)으로 불릴 만큼 키가 작고 얼굴이 검다.

송강은 이른바 중국 민중들이 그들의 욕망을 투사해 창조한 전형(典型)이다.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義)를 중시한다.' 이 구절은 등장할 때부터 소설이 끝날 때까지 송강을 설명할 때면 반드시 붙는 말이다. 폭압에 시달리던 하층민들은 '신실한' 의를 구현하는 대장을 원한 것이다.

송강은 리더쉽에 대한 갈망도 캐릭터에 수용하고 있다. 유교문화권에서 리더란 개인적인 영웅성이나 독단성 대신 조화를 추구하며 부하들로부터 충성을 이끌어내는 사람이다. 역사적으론 삼국시대 유비나, 송나라 창업주인 조광윤이 그러하다. 송강은 개인적인 실력은 없지만, 동료와 부하를 항상 아끼는 이로 그려진다. 그래서 살성(殺星)으로 불리는 흑선풍도 송강에게는 고분고분하다.

후대에 충의(忠義)라는 말이 붙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수호전>은 도둑떼 이야기다. 온갖 부랑자들을 이끄는 두목이란 이가 마냥 의리만 따지며 인자할 순 없다. 풀어준 은혜를 배반한 유고 마누라나 자신을 모함한 황문병을 처치할 때 송강은 극도로 잔인해진다. "이 분을 풀지 않고 어찌 세상을 살리오"라며 부하들을 시켜 그들을 칼로 짓이긴다.

이 이중성은 <수호전>이 뼈대를 갖췄을 때부터 줄곧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수호전>이 지닌 문학성을 찬미하며 70회본을 널리 퍼뜨린 김성탄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있다. "<수호전>의 내용은 대체로 무난하나, 송강을 극도로 미워하고 증오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개돼지도 송강의 고기는 먹지 않는다는 한을 품게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작자의 이런 의도를 잘 알아채지 못한다"

송강이 지닌 다중적 캐릭터를 잘 이해하는 이들도 이 말엔 쉬이 공감하기 어려울 성 싶다. 김성탄은 왜 이런 말을 남겼을까? <川邊小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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