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춤은 보는 자의 것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는 팽목항, 학살 피해자들을 위한 위령제 무대, 절 마당 오색등 아래. 위로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춤을 추는 이가 있다. 그녀는 스스로 춤을 '보시(자비심을 바탕으로 남에게 무언가를 베푼다는 뜻의 불교적 용어)' 한다고 말한다.

김태린(47) 원장은 올해부터 민예총 진주지부 신임 지부장으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그녀가 운영하고 있는 나래춤예술원에서 편안한 연습복 차림의 김 원장과 마주 앉았다. 학원생들이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라 학원은 무척 조용했다. 듣기 좋은 음악만이 빈 연습실을 채우고 있었다.

스물다섯에 만난 무용

김 원장은 다른 이들에 비해 무용을 늦게 시작한 편이다.

"사실 학창시절에 제일 하고 싶었던 건 의상디자인이었어요. 그런데 성적이나 여건이 안 되어서 대학에 가지 않았어요."

무용을 만나기 전에는 진주 '큰들'에서 놀았다. 당시 '놀이판 큰들'이라는 이름이었던 '예술공동체 큰들'에서 풍물놀이를 했다.

"1988년에 놀이판 큰들에 들어갔어요. 그때는 큰들도 지금처럼 체계적이지는 않았어요. 풍물패를 하던 사람들이 사회에 진출해서 단체를 만들었는데, 저는 사물놀이, 마당극 같은 걸 선배들하고 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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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린 나래춤예술원장./서정인 기자

우리 민족 문화에 흠뻑 빠져 지내던 그 시기에 김 원장은 자신이 어떤 것에 매력을 느끼는지, 삶의 방향을 어디로 향해야 할지 깨달을 수 있었다.

"풍물 공부를 잠시 하면서 한국 문화, 민족 문화를 직접적으로 체험한 거죠. 그렇게 하다 보니 앞으로도 내 속에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때 상황으로서는 먹고사는 문제와 정체성을 찾는 문제는 별개의 것이었다. 김 원장은 직장에 다니면서 고민을 이어갔다. 그리고 뭐든지 접하고 배웠다.

"직장에 다니는 건 그냥 일인 거고, 앞으로 제 평생을 걸만한 것이 무엇일지 일을 하면서도 항상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24반무예(무예도보통지: 조선 후기 무예 훈련의 기본 법칙)도 배우고 택견도 하고 풍물패 청년반 활동도 했고요. 동아리 활동도 하고 미술도 배웠죠. 우리나라 문화 쪽으로 항상 관심을 두고 있었어요. 그러다 민속예술보존회에서 직장인과 일반인들을 위한 한국전통무용 강좌를 연다기에 갔어요. 거기서 무용을 만났는데 무용이 내 인생을 걸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생을 걸기로 마음먹었는데 남는 시간에 하는 취미처럼 무용을 하는 건 김 원장 성격에 맞지 않았다. 먼저 대학 졸업장이라는 라이선스를 따기로 마음먹었다. 안정적으로 직장에 다니던 딸이 갑자기 무용을 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했을 때, 가족의 반응은 어땠을까.

"제가 2남 2녀 중 막내예요. 참 다행인 게 어머니께서 제가 남들 결혼하는 나이에 무용을 배워서 대학에 가겠다고 했을 때 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지금도 제가 굉장히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어요. 엄마가 하지 말라고 하셨으면 못 했을 거예요. 왜냐면 엄마가 돈을 주셔야 할 수 있었으니까요.(웃음) 어머니가 선뜻 '그래 해봐'라고 하셨을 때 깜짝 놀랐죠. 공부를 제가 조금만 할 줄 알았는데 자꾸 공부한다고 결혼도 안 하니까 그때 괜히 하라고 했다며 후회를 하신 적도 있는데요.(웃음) 믿어 주신만큼 번듯하게 보답하고 싶은데 '번듯'과 '보답'이 아직은 안 되고 있어요. 여전히 진행 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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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린 나래춤예술원장./서정인 기자

올해로 12년 차 나래춤예술원

김 원장은 부산에서 입시 준비를 했고 동아대 무용학과를 졸업했다. 하고 싶어서 시작한 무용이기에 당연히 재미가 있었다. 곧바로 대학원에도 진학해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짚고 가면 대학원에 들어가긴 했는데 졸업하지는 않았어요. 공부를 하다 보니 실기도 중요하지만 문화예술 쪽 전반의 시스템에 대해서도 자꾸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무용하는 학생들이 졸업을 하고 나면 진로가 너무 막막해요. 그래서 문화예술경영 분야에 대해서도 배우면 좋지 않을까 해서 서울로 갔죠. 그때가 서른 살이었어요."

두려움 없이 선뜻 낯선 서울에 갔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김 원장은 많이 지쳐있었다.

"어느 날부터 서울 생활이 너무 힘들게 느껴졌어요. 일도 같이 했는데 공부와 병행하려니까 몸과 정신이 많이 지치더라고요. 그래서 휴학을 하고 진주에 와서 1년을 쉬었어요. 쉬고 나서 복학을 하고 3학기를 시작했는데 진주와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면서 학교를 다녔어요. 그 생활이 힘들었던 데다가 그때 문득 이 공부를 해서 내가 끝을 보려면 유학을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짧은 생각이었을지 모르지만 당시에 그 길이 너무나 멀게 느껴졌어요. 당장 춤을 추고 싶기도 했고 또 부모님에게 의지하는 게 스스로 더 이상 용납이 안 돼서 대학원을 중도에 포기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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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린 나래춤예술원장./서정인 기자

돌아온 김 원장은 진주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했다. 작게라도 연습 공간을 갖고 싶다는 마음은 늘 품고 있었고 또 춤을 가르칠 수도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김 원장의 학원은 '춤으로 여는 세상'이라는 이름으로 2004년에 문을 열었다.

"그때는 유치원생, 초등학생 같은 어린아이들도 올 수 있는 학원으로 시작했었기 때문에 무겁지 않고 친근한 이름으로 지었었죠. 이제 아이들 수업은 하지 않고 있어요. 나래춤예술원으로 이름을 바꿨고 중고등학생 이상부터 가르치고 있어요. 중고등학생들은 어른들하고 같이 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요. 입시 준비하는 중고등학생이랑 성인들이 주로 학원에 와요."

나의 춤은 '위로'

김 원장은 지난 3·1절 진주성 앞에서 살풀이춤을 췄다.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파기를 촉구하고 3·1절 정신을 기리는 '301인의 아리랑' 행사에서 공연을 한 것이다. 김 원장은 자신의 몸짓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고 했다. 그녀는 이제 다른 사람을 위해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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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화사 초파일 법회 후에 펼친 헌화무 공연./사진 제공 김태린

"20~30대에는 사실 춤을 추는 것이 나를 위한 거였어요. 제가 만족하고 싶었고 제 정체성을 찾고 싶었었죠. 그런데 40세가 넘고 나서 내가 춤을 추는 이유가 뭘지 생각해봤어요. 나는 왜 지금껏 춤을 추고 있는가. 그때 춤은 내가 추지만 내 춤은 보는 자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 어떤 사람을 위해 춰야 하는가. 그건 위로받아야 할 자였어요. 그 후로는 그런 자리에서 요청이 들어오면 두말하지 않고 가서 제가 할 수 있는 몫을 하죠."

무용을 업으로 시작했을 때에는 어떤 춤이냐를 막론하고 두루 습득을 하는 것이 먼저였다. 어느 시점이 지나고 나면 춤을 추면서도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온다. 물론 무용 분야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김 원장은 자신이 추는 춤은 주로 '의식무'라고 했다. 나쁜 기운을 풀기 위한 살풀이, 넋의 원한을 풀고 극락으로 천도하기 위한 '지전무', 양손에 바라를 들고 추는 춤으로 악귀를 물리치고 마음을 정화하는 의미를 담은 '바라춤' 등이 이에 해당한다. 김 원장은 이런 의식무를 바탕으로 '위로무'를 춘다.

그녀의 춤에는 종교적인 색도 드러난다. 춤으로 아픈 자들을 위로하는 것은 종교적인 신념을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그것은 내가 살아있는 이유를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는 불자이기도 해요. 불교에서는 나를 알라고 하고, 나를 찾으라고 해요.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만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삶을 더불어 살고 남을 복되게 하는 것이 그 이유라고 생각해요."

김 원장은 유심히 보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처음에는 기술이 중요해요. 그건 테크닉인데 테크닉은 연마하면 돼요. 그렇지만 위로받을 자를 위한 마음을 충분히 담지 않으면 춤의 깊이가 달라져요. 다른 이의 슬픔과 아픔을 무심히 보지 않는 마음. 평소에 그런 마음이 있어야만 제대로 표현할 수가 있어요."

김 원장이 늘 위로무만 추는 것은 아니다. 부산지방법원에서 춤을 췄던 에피소드에 대해 얘기했다.

"부산지방법원장님을 개인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그분이 문화예술의 가치에 대해 늘 깊이 생각하고 계시다고 해요. 부산법원 강의실에서 한 달에 한 번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 열리는데 강의 시작할 때나 강의 중간에 수강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려고 노래, 춤, 악기 연주 공연을 넣으시더라고요. 저에게 의뢰가 들어왔어요. 저는 위로무를 중점으로 활동하기는 하지만 자리에 따라서는 흥겨운 춤을 추기도 해요. 그날은 제가 진주 춤꾼으로서의 자부심으로(웃음) 진주교방굿거리춤을 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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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살풀이춤./사진 제공 김태린

모든 사람들에게 '춤씨앗'이 있다

김 원장은 앞으로 2년 동안 민예총 진주지부를 이끌어 나간다. 정확한 계획은 아직 구상하지 못했다지만 몇 가지를 중심으로 지부를 보완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연대적인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어요. 민예총의 이름을 걸고 있지만 회원들이 다양하지 않고 회원이 늘지 않고 있죠. 특히 진보적인 민족예술 의식이 약하더라도 민예총이 아닌 타 단체나 다른 예술인들과 예술이라는 장르로 묶어서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고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부분이 좀 약하지 않나 싶어요. 이대로라면 대중성과 멀어지고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잔치가 될 수 있다는….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민예총 문을 더 부드럽게 열어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집단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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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민간인 피학살자 합동위령제에서./사진 제공 김태린

마지막으로 김태린의 바람에 대해 물었다.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는 문화가 정착했으면 해요. 그건 인간이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거예요. 저는 누구나 춤이라는 씨앗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 씨앗을 키워서 밖으로 내보이지 못할 뿐이죠. 씨앗을 계속 묻어두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는데 첫 번째, 사람들은 스스로 춤이라는 것을 어떤 형상으로 마음속에 정해놨어요. 어느 정도 이상의 퀄리티가 되어야 그게 춤이라고 생각하죠. 두 번째는 주변을 의식하기 때문이에요. 춤을 출 때 주변을 의식하니까 자기 몸인데도 자기가 쓸 줄을 몰라요. 그 두 가지만 없애면 자유로운 춤이 돼요. 우리의 움직임은 전부 춤이에요. 그런 씨앗들을 틔워 줄 수 있는 선생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춤추는 기술을 배우지 않았더라도 모든 이들이 몸짓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리드하는 선생이 되고 싶은 게 제 꿈이에요."

김 원장이 말하는 '춤씨앗'은 비단 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씨앗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 늦었다고 말하는 나이에 원하는 길을 택한 본인처럼 다른 이들 역시 그런 자유로움을 가졌으면 한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다면 세상은 좀 더 그녀의 몸짓처럼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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