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도 평범하게 공부하는 학교 5년, 10년 길게 고민해야…

장애인 인권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사람이라는 최진기(34) 소장은 부드러움과 강단이 동시에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최 소장은 지금 재학 중인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있다. 최 소장은 장애인에게는 기본적인 이동권도 보장되지 않는 학교 시설 때문에 재학 기간 내내 전쟁 같은 시간을 혼자 버텨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건물 1층에 있는 시끄러운 강의실에서만 수업을 받았고 접근하기 힘든 매점 구조 탓에 배가 고파도 스스로 빵 하나 사먹지를 못 했다. 최 소장은 공평한 학교를 온 힘으로 만들고 있다.

최 소장은 하반신을 움직이기 어려운 장애인이다. 쌀 장사를 하던 부모님 밑에서 남다를 것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몸이 이상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에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3학년 때 농구를 하다가 좀 다쳤어요. 한쪽 다리를 약간 절게 되었고 움직이고 뛰는 게 불편하더라고요. 그때는 농구 경기를 하다 다친 것도 있고 고3이었으니까 오래 앉아있어서 디스크 같은 게 왔나 싶었어요. 걷다가 힘들어서 전봇대 붙잡고 그랬어요. 일단은 참고 시험을 다 친 후에 마산 삼성병원 가서 검사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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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기 진해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서정인 기자

검사 결과는 농구 때문에 다친 것도 디스크도 아니었다. 최 소장은 어린 나이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희귀병과 마주해야 했다.

“척수 동정맥 기형이라고 했어요. 신경이 보통 한 줄로 가는데 여러 갈래로 가다 보니까 신경 전달이 어려운 거라고… 수술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서울 가서 한 번 더 검사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서울 아산병원으로 갔지만 대학병원 특성상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없었다. 한 달을 친척집에 머물며 피 마르는 시간을 보낸 후 검사를 하니 다른 시술을 해보자고 했다. 여러 갈래로 가는 신경을 막는 시술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성공을 못 한 거예요. 좀 있다가 수술하러 다시 와야 한다고 했어요.”

일단 집으로 돌아와 다시 한 달을 견뎠지만 연락은 없었다. 걷지 못하는 시간이 늘어나 일주일에 3~4번 걷는 것이 힘들어졌고 결국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11시간을 엎드려 수술 받았지만 앞으로 재활치료에 따라서 걸을 수도, 못 걸을 수도 있다고 했어요.” 

이제 스무 살. 병에만 메여있을 수 없었다.

“그때는 지팡이를 짚고 조금씩은 걸을 수 있었거든요. 집이 창신대랑 가까웠어요. 아버지께서 차든 오토바이든 태워서 학교 다니도록 해주겠다고 하셔서 당시 전자정보과에 입학해 공부하면서 재활치료하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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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본인 제공

바퀴를 굴려 춤을 추다

졸업 후 오랜 시간을 스스로 갇혀 있었다고 했다. 장애인을 받아주는 직장이 없었다. 몸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눈 뜨면 밥 먹고 컴퓨터하고 게임을 하는 생활을 한 지 1~2년. ‘독’같았던 생활이었지만 다행스럽게 그 시간은 최 소장이 문밖으로 나갈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온라인상에서 친구들과 교류하다가 ‘하늘빛 사랑’이라는 전국적인 척수 장애인 모임이 있는 걸 알게 됐어요. 오프라인 모임에 나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죠. 모임에 나가려고 운전면허도 땄어요(웃음). 가보니까 저보다 중증인 장애인 분들이 많았어요. 저는 하반신 장애만 있지만 거의 온몸이 불편하신 분들도 많은데 그런 분들이 일도 하고 여러 활동도 하고 하시더라고요. 정신이 번쩍 들었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즈음 어쩔 수 없이 여자친구와 헤어져야 했던 일도 의욕에 불을 댕겼다.

“결혼까지 생각한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그쪽 집안에서 반대를 했죠. 장애인에다가 직업도 없었으니까요. 헤어지고 나서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고 부산에 있는 장애인직업학교에 가서 공부를 시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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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학교 시절 모습./본인 제공 사진

최 소장은 학교에서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했지만 스포츠에도 소질을 보였다. 처음에는 수영을 권유받고 수영을 시작했다. 학교 소속 부산 대표로 체전을 나가서 단체전 은메달을 받기도 했지만 곧 그만두어야 했다. 휠체어에 앉아 있다 보니 생긴 욕창에 독한 수영장 물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 소장은 수영을 그만두고 ‘휠체어 댄스’를 시작한다. 무대 위에서 ‘휠체어 댄스’를 추는 최 소장을 영상 속에서 본 적이 있다. 여성 댄서와 함께 움직이는 모습이 조화롭고 역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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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학교 수영 대표로 활동하던 시절 동료와./본인 제공 사진

“우연히 ‘휠체어 댄스’ 공연을 보게 되었어요. 손짓, 눈빛이 마음에 와 닿고 춤 자체가 정말 좋아 보였어요. 보고 반해서 ‘휠체어 댄스’를 시작했죠. 열심히 해서 전국대회에서 금메달도 땄어요(웃음). 근데 사람들 시선이 제 생각 같지 않더라고요. ‘장애를 극복했구나.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으면 저렇게까지 출까.’ 이런 시선이 더 많았어요. 춤으로 봐주지 않고요.”

또 장애인이 공연을 하는 공연장이었지만 대부분의 공연이 비장애인 위주로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서 최 소장은 아직 장애인이 즐겁게 춤추기에는 부족한 세상임을 실감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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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너와 함께 휠체어 댄스 공연을 펼치고 있다./본인 제공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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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댄스 공연 파트너와 함께 찍은 사진./본인 제공 사진

‘장판’에 눈 뜨다

직업학교 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시간을 보내던 최 소장은 우연히 창원시청에서 ‘데모’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2008년, 교통약자편의증진조례를 만들려는 장애인들이 시청 앞에서 농성을 한 것이다.

“왜 시위를 하는지 궁금했죠. 주변 분이 하는 말이 장애인 콜택시가 없어서래요. 경남 지역에도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을 만들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던 거죠. 저는 공무원들이 만들어주고 시장이 만들어주고 하는 건 줄 알았어요. ‘좀 기다리면 해주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죠. 그러니까 서울이나 다른 곳도 시위해서 장애인콜택시 만들고 지하철에 엘리베이터 만들고 한 거래요.”

스스로 창원시청에 갔다. 흔히 말하는 ‘장판(장애인 판)’에 발을 들였다. 장애인들이 시청 정문에서 노숙하며 시위를 하고 있었다. 현장은 뜨겁고 참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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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기 진해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서정인 기자

“가서 현장을 보는데 머리에 딱 스쳐가더라고요. ‘이렇게 싸워왔구나!’ 처음 갔지만 3일을 자고 왔어요. 공감했기 때문이죠. 저도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흘 동안 함께 있다가 집에 가서 씻고 온다고 했는데 제가 다시 안 올 거로 생각했데요. 그때 경남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있고 창원센터가 주축이 되었었어요. 사람들이 제가 순수한 마음으로 온 게 아니라 진해에서 센터를 열고자 왔다고 생각했데요. 그런데 제가 다음날 정말 돌아온 거예요. 그래서 다들 놀랐죠. 끝까지 5일간 시위에 참여했고 승리로 끝났어요.”

진해장애인자립생활센터

진해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자리한 건물은 휠체어가 무리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건물이다. 거창한 시설이 필요하지는 않다. 시설 안에 엘리베이터가 갖추어져 있어야 하고 입구나 건물 내부 진입로 높낮이 차이가 나는 곳 옆에 낮은 경사로 휠체어 바퀴가 굴러갈 수 있는 부분만 만들어 주면 된다. 센터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센터에 상근직원은 저까지 5명이고요. 차별상담사, 장애인평생학교 선생님까지 9명이에요. 성인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장애인평생학교를 운영하고 있거든요. 장애인의 49.5%가 공부를 해보지 못했데요.”

자립을 위한 기초적인 교육부터 검정고시 교육, 자격증 취득, 인권 침해를 받을 시 대응하는 방법 등도 교육한다고 했다. 센터가 생긴 것은 2008년.

“예전에 진해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만들어지려던 때에 한번 사정이 생겨서 무산됐었데요. 이제 진해에서 장애인을 위한 일을 해봐야겠다 싶었는데 진해에 센터가 생겼고 일을 하게 되었죠.”

‘할 수 있는 일’에 목말랐던 최 소장은 거침없이 활동을 해나간다. 진해 교통약자콜택시 도입, 장애인 활동보조 시 추가 조례, 장애인 시설 인권 실태에 관한 부분 등. 진해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장애인에게 제도적·물리적·심리적 지원을 할 수 있는 든든한 센터로 성장했다. 최근 있었던 활동 사례 중 최 소장은 장애인 생활 시설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2011년도에 장애인 시설 인권 실태 조사를 했는데, 조사 결과 거주인의 70%가 인권침해를 당했고, 그 중 60%는 시설 종사자들에게 당했다고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시작한 게 장애인차별금지 및 인권보장에 관한 조례예요. 여러 단체와 같이 첫 안을 만들었어요. 근데 너무 강하다고 시설 측에게 비난을 많이 받았죠.”

▲ 진해장애인자립생활센터./서정인 기자

시설 측에 요구한 것은 간단하게 ‘시설의 개방화’였다. 그러나 시설 입장에서는 1년에 한 번 실태조사하고 외부에서 시설을 방문해 거주 장애인들과 상담을 하는 것은 큰 부담이기도 하며 이런 활동은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이랑 다를 바 없지 않으냐는 입장이라고 했다. 최 소장은 최대한 중립적인 안을 내고자 고민은 하고 있지만 시설 거주 장애인의 넓적다리관절을 시설종사자가 밟아 부러트린 사건, 신안군에서 벌어진 ‘염전노예’ 사건 등 해마다 장애인 인권을 무시하는 충격적인 사건들이 줄지 않고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시설에 대한 시선은 거둘 수 없다는 견해다.

평범하게 공부하고 싶었다

최 소장은 이런 실무 일을 맡아 하면서 이론적인 부분을 보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대학원 입학을 결심했다. 이때만 해도 학교를 다니면서 매일 상처를 받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다른 곳도 아닌 ‘학교’였기 때문이다.

“정책 당위성 같은 것을 더 탄탄하게 하려고 공부해야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경남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 전공을 선택하고 열심히 했어요. 근데 장애인은 공부만 하는 것도 정말 힘들더라고요.”

최 소장이 속한 반은 항상 1층에서 수업을 들었다. 수업을 받는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층도 다닐 수 있게 엘리베이터 설치를 해달라고 학교 측에 건의해봤지만 오래된 건물이라 엘리베이터 설치를 할 수 없다는 게 학교 측 답변이었다. 최 소장은 학우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생각에 매일 괴로웠다고 했다.

“늘 인문관 1층에서 수업을 들었어요. 문제는 1층에 강의실 이외에 동아리방이나 이런 게 많이 있어서 굉장히 시끄러워요. 다른 교실로 옮겨달라고 했는데 학교 측에서 장애인이 있기 때문에 안 된다고 여기서 받아야 한다고 했죠. 우리 반은 왜 여기서만 수업 받느냐 이런 예기를 많이 들었죠. 내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너무 미안했죠. 일하고 학교로 바로 가니까 배가 고프잖아요. 매점 가서 빵도 하나 사먹을 수 없어요. 구조가 그래요. 부탁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특강이나 이런 건 보통 다른 층에서 했어요. 학우들이 휠체어를 들어서 옮겨줄 때도 있었는데 그러다가 다칠 수도 있잖아요. 한번은 어떤 학우한테 부탁을 했는데 그 친구도 힘들었던 거예요. 거절하면 저는 특강은 아예 갈 수가 없었죠.”

‘당장’을 원하는 게 아니다 

“저처럼 학교를 힘들게 다니는 장애인이 더는 없었으면 해서 고민하던 와중에 장애를 갖고 있는 다른 학우 한 분을 알게 됐고, 그분과 행정과, 시설담당과, 학부 학과장들을 만나 간담회를 했어요. 허심탄회하게 우리 상황을 얘기하니 그때는 학교 측에서 몇 년 전에 시설을 만들어주겠다는 약속도 했는데 아직 못 만들어준 것을 미안해하시더라고요.”

최 소장은 사실 소송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일단은 엘리베이터만이라도 만들어 달라고 하니 학교 측에서는 낡은 건물상태와 건물 구조가 문제라고 하며 계속 고민해보자고 했다. 그러나 최 소장은 곧 이어진 학교 측 대처에 크게 실망한다.

“전문 기관에 의뢰해서 설치할 수 있는지 확인이라도 해봐야 하는데, 새로운 건물이 지어지면 거기는 엘리베이터가 있을 테니까 그 건물로 옮기면 된다고 하는 거예요. 화가 많이 났죠. 처음에 엘리베이터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 것은 맞지만 결국 학교 측은 우리를 전혀 이해해주지 않은 거예요. 당장은 힘들어도 누구나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캠퍼스를 만드는 것을 계속 고민해야 하는데 엘리베이터 생기는 신축 건물로 이사 가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1차원 적인 생각을 하니까요. 저는 장애인이라고 한 건물에서만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산이 문제가 아니라던 학교 측은 예산이 문제라고 태도를 바꿨다.

“법적인 부분을 피해가고자 이제 예산이 없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한 거예요. 얼마 전에 인권위에 제소하고 현장 검증을 했어요. 충분히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 있다고 했어요.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음이 아팠어요. 학교에 대한 배신감이 들었죠. 현장 검증하기 전에 경도를 파악하려고 학교에 가보니 여기저기 공사를 하고 있더라고요. 매점에도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었는데 경사로를 막 만들더라고요. 학교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장애인도 다닐 수 있는 학교를 만들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5년, 10년 동안 계속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참 안타깝습니다. 경남대학교가 지역에서 정말 오래된 학교인데 평등하게 교육받을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끝까지 해볼 겁니다.”

매년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단순히 장애인의 날에 장애인에 대해 이해하고 이날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최 소장은 그날은 장애인 인권을 위한 조례를 ‘선물’ 받는 날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364일 불편해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지면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많이 없어졌다고 생각들을 하는데 아직 멀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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