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이 돼야 기업도 대학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학과 교수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창원대학교는 ‘공대 대학’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실제 창원대학교 학생들의 근 30%가 공과대학생인 것만 봐도 학교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실려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013년 최초로 ‘공모제’ 형식으로 학장이 된 이종근(62) 창원대학교 공과대학장의 어깨는 그래서 더 무거워보였다.

의사가 되고 싶었던 소년, 컴퓨터를 잡다

인터뷰를 시작하는데, 이종근 학장의 말투가 어색했다. 경상도 말투는 확실히 아니고, 서울 말투도 아니었다. 그의 조부와 부친은 평안북도 의주 사람이었다. 조부는 일제 강점기 당시 경찰관을 했었고, 부친은 학교 교사를 했었다. 일제 강점기 대부분의 경찰관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해 갔지만, 그의 조부는 독립운동가들을 보이지 않게 도와줬다. 그래서 해방 이후 북한에서 일어난 ‘친일파 숙청’ 광풍에도 무사히 집안을 보전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의 집안은 한반도를 관통해 부산까지 멀고 먼 피난길에 나선다. 그리고 피난지 부산에서 1952년 그가 태어났다.

-피난민 생활을 하셨으니, 굉장히 고생을 하셨겠네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부산에 피난 왔지만 아버지가 부산에서도 교사를 했었습니다. 한국은행 부산지점에 아버지 친구가 있었는데, 저희 가족은 그 관사에 방을 빌려서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당시만 해도 교사에 대한 예우가 남달랐기 때문에 부유하지는 않지만, 먹고사는 것을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에 왔는데, 당시 ‘합승버스’라고 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연예인들 타고 다니는 9인승 승합차 같은 것인데, 아버지와 저는 그걸 타고 다녔으니 남들보다는 환경이 좋았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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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근 창원대학교 공과대학장./임종금 기자

-그럼 학교를 쭉 서울에서 다니셨나요?

“네, 서울 청계초등학교-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보성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컴퓨터공학과 교수로 오랫동안 계셨는데, 처음부터 컴퓨터나 전자에 관심이 많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사실은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게 어려우면 건축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것도 안 되면 약학대학을 가려고 했습니다. 또 미대도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신학문을 배워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전산과를 권하시는 겁니다. 집안이 개신교를 믿었는데, 숭실대학교가 개신교 대학이고, 마침 전자계산학과가 생겼습니다. 결국 아버지 권유로 1970년에 숭실대학교 전자계산학과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당시 숭실대학교 전자계산학과 1기는 어땠나요?

“30명이 있었는데, 남녀 15명씩 입학했습니다. 남녀 불문하고 서울에서 명문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지금 남자 동기들 가운데 7명이 미국 IT업계에 있고, 4명이 호주에 있고 한국에 있는 사람은 몇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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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대학교 입학 사진.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어디 가셨나요?

“1977년에 대우에 입사했습니다. 두 가지 일을 했는데, 일단 대우도 그룹이 크니까 전산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예를 들어 인사관리시스템 같은 것을 만들었습니다. 또 컴퓨터 시스템 국내 대리점을 대우에서 했는데 제가 했습니다. 대우에 있을 때 사내용 책을 2권 썼는데 ‘전자계산 개론’과 ‘시스템 플로우 차트’를 썼습니다. 둘 다 대우에서는 전산관련요원은 꼭 읽어야 하는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그러다 1983년 그는 국립 마산대학 전산과 교수로 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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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근 창원대학교 공과대학장./임종금 기자

백지 상태에서 시작한 창원대 공대

1983년, 그가 올 당시 마산대학은 큰 변화를 겪을 때였다. 캠퍼스를 마산에서 창원으로 옮긴 것이 1983년 1월, 그리고 1985년 대학교 이름을 마산대학에서 ‘창원대학’으로 바꿨다. 우리가 아는 ‘창원대학교’의 역사가 막 시작할 무렵이었다.

“당시 오니까 여기 캠퍼스에 건물이 2동 밖에 없었습니다. 노계현 학장이 ‘우리도 이공계가 필요하다’고 방향을 잡고 1985년에 전산, 기계, 전기 3개 학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채용된 것입니다.”

-그럼 그 때까진 아예 공대가 없었나요?

“1983년 이전까지는 창원대학교에는 전부 인문, 상대, 교육대, 예대 이쪽 학과만 있었습니다. 그러다 1985년에 공대가 설립이 된 겁니다. 그런데 전산과는 공대에 안 들어갔습니다. 당시에는 전산과를 자연대학에 두는 곳이 많았습니다. 또 자연대에 있어야 아무래도 우수한 여자 학생들이 많이 옵니다.”

-그럼 완전 백지상태에서 시작하신 건데. 전산과는 아무런 기자재도 없었나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제가 교수 채용 면접을 볼 때, 노계현 학장님이 ‘3만 불 정도 예산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채용된 후 제가 3만 불 짜리 시스템을 알아봤죠. 그리고 제가 구입안을 들고 가니까 학장님이 ‘3만 불이 어딨어? 1~2만 불 밖에 없어’라고 하시더군요. 말이 달라지는 거죠. 1만 5000불에 견적을 맞추고 다시 시스템을 알아봤죠. 화콤코리아(현재 한국후지쯔)에 걸 구매하기로 하고 또 학장님을 찾아가니, ‘1만 5000불이 어딨어? 5000만 원 밖에 없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또 알아봤죠. 계명대학교에서 쓰다가 남은 것을 보강해서 5000만 원에 들여오고 1983년 말에 대학입시를 처음으로 전산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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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근 창원대학교 공과대학장./임종금 기자

-말씀 들어보니 그건 학교 전산시스템인데, 그걸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쓸 수 있나요?

“말씀대로 아무래도 개인 PC가 있어야 하는데, 과학기술부에서 자기들이 사용하던 것을 대학에 무상으로 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제가 올라가서 사무관과 얘기를 해서 사무관이 기부안을 올렸는데, 과기부 과장이 ‘어딜 사립대학에 이런 걸 줘? 경남대가 국립이지’라고 질책을 하는데 저에게 들릴 정도로 그러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국립대학이다. 경남대가 사립이다. 설명을 해서 컴퓨터를 갖고 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얻는 것은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장비를 자주 도입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교육부에서 대학교에 전산장비 구입 예산을 책정하는 ‘전산기 도입위원회’가 있었습니다. 위원장을 다행히 숭실대학교 후배가 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쉽게 장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창원대학교는 공대가 유명한데, 언제부터 공과대학이 발전하기 시작했습니까? 

“1990년 국책공대가 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있던 학과도 전자계산학과에서 컴퓨터공학과로 이름을 바꾸고 자연대에서 공대로 넘어왔습니다. 대신 우수한 여학생들이 크게 줄었지요. 전자계산학과 시절에는 거의 절반이 여학생이었는데, 지금은 15%~20%로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창원공단과 함께 살아나가려면 컴퓨터공학과가 공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창원대학교에 컴퓨터공학과가 있고, 또 정보통신공학과가 있는데 두 학과의 차이는 뭔가요?

“정보통신공학과는 이수오 총장 시절인 1997년에 생겼습니다. 원래는 전파공학과로 소프트웨어보다는 하드웨어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린 학과입니다. 컴퓨터공학은 소프트웨어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리죠. 하지만, 모바일과 네트워크 분야는 배우는 것이 거의 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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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근 창원대학교 공과대학장./임종금 기자

경상남도의 IT정책, 실종 상태

-경남에 일반 기계공업은 많지만 IT기업이나, 기관은 거의 없던데요. 원래 이랬습니까?

“원래 경남에도 IT기업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세한 기업들이 지원을 못 받고 전부 고사했습니다. 현재 경남의 IT산업 정책은 실종상태라고 봅니다. 김혁규 지사 시절에만 하더라도 ‘정보화추진위원회’라고 있었습니다. 제가 거기 자문위원으로 1년에 4~5번 도지사 앞에 불려갔습니다. 그때 만들려고 한 것이 테크노파크 마산밸리라는 건데, 마산 내서읍이 너무 공단과 멀지 않습니까? 제가 반대를 했는데 아무튼 당시 소프트웨어진흥원이 마산시 내서읍에 만들어졌습니다. 그게 로봇랜드가 들어오면서 로봇산업진흥원이 되더니 소프트웨어 산업정책은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지금 남아있는 기업들이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 경남의 IT기업들은 어디로 방향을 잡으면 될까요?

“STX 계열의 포스텍과 가온소프트가 그나마 규모를 갖추고 있었는데, STX가 흔들리면서 포스텍이 약해졌습니다. 경남의 IT가 나갈 방향은 바로 임베디드 시스템입니다. 예를 들면 팔용동에 있는 맥스라는 업체가 있는데 창원대학교 컴공과 학생들이 절반쯤 됩니다. 이들이 만든 자동차 검사기를 만들었습니다. 기계와 컴퓨터 기술을 결합하는 방식입니다. 이제 시대가 스마트 자동차나 스마트 가전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LG쪽에서는 사물인터넷을 하고 있습니다. 그 제품 안에도 CPU와 메모리가 있고, 그걸 컨트롤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남이 가진 제조업기반을 활용해서 IT가 함께 나간다면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이런 얘기가 나왔다가 주저앉았습니다. 다시 살려나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경상남도 같은 곳에서는 어떻게 지원을 해야 할까요?

“일단 컨트롤을 할 수 있는 기관이 하나 있어야 합니다. 경남테크노파크와 로봇재단 사이에 애매하게 놓여 있는 IT분야를 확실하게 챙겨야 합니다. 밀양 나노산업단지-창원 기계산업단지-조선산업단지-사천 항공산업단지 이게 경남을 먹여살리는데 모두 IT가 기반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도청 고위관리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뭔가 액션이 취해진다면 가능할 법도 한데…. 일단 IT컨트롤타워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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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근 창원대학교 공과대학장./임종금 기자

그는 물론 대학에서도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기업들도 할 말이 있습니다. ‘IT기술력을 충분히 대학에서 구축하고, 인재를 양성했다면 경남기업들이 가져다 썼을 것 아니냐’라고 한다면 저희도 책임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조금 더 강력하게 위에 얘기하고 액션도 취했으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무현 정부 ‘누리사업’ 복원해야

그는 지금 컴퓨터공학과 교수가 아니라, 창원대학교에서 최대 규모의 단과대학인 공과대학장이다. 공과대학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단어가 있다. ‘산학협력’. 자주 듣는 말이지만 뭔가 알 듯 말 듯한 단어다.

“솔직히 현재까지 산학협력은 제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기업체의 입장에서는 레포트 하나 받아주고 대학에 돈을 ‘기부’하는 것으로 인식한 지 오래입니다. 만날 사진 찍고 MOU협정서에 사인을 하지만, 하고 나서 아무런 액션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찌보면 기업에서 지역신문에 마지못해 광고 해 주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 이런 하나마나한 산학협력을 왜 합니까? 건물도 짓고, 산학협력단 조직도 만들고 그러던데요.

“현실로 생각해보면 정말 산학협력은 필요합니다. 기업도 살려면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대학도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시각 차이입니다. 기업에서는 바로 현장에 꽂으면 돌아가는 기술을 원합니다. 하지만, 대학은 그게 아닙니다. 기반연구부터 차근차근 올라가고 기술의 방향을 잡아가는 것입니다. 이 시각차가 큽니다. 또 우리나라는 특이하게도 학과나 전공별로 자잘하게 칸막이를 쳐놨습니다. ‘너는 이걸 전공했으니까 이것만 해라’ 그게 어디 통할 법한 일입니까?”

-그럼 외국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제가 프랑스에서 1987년에 박사학위를 땄습니다. 일단 가르칠 때부터 전공이나 학과로 칸을 나누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것은 계속 공부하게 하면서 서로 전공이 달라도 호환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나는 이것만, 너는 이것만 이렇게 안 합니다. 프랑스에 ‘릴’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사이언스 파크가 있는데 거기 하나의 구역에 아예 기업이 머뭅니다. 기업들이 바로 코앞에서 아예 같이 학생들과 교수들이 생활하는 것입니다. 교수들도 연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가서 기계도 만져보고 애로사항도 듣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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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에꼴드릴대학에서 세미나 참석 모습.

-그럼 창원대학교에서는 형식적인 산학협력을 벗어나 기업과 함께 하는 것이 있습니까?

“지금 연구마을이라고 해서 기업들 연구소가 들어와 있습니다. 이제야 같이 대화도 하고, 실험도 하면서 최소한의 소통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연구마을을 발전시켜서 기숙사 부지 뒤편에 아예 사이언스 파크 같은 것을 만들고 싶습니다. 사업체와 5분 거리 안에 있고, 최소한 출퇴근 할 때 오가면서 안부라도 묻다 보면 자연히 융합이 일어나고 현장에 들어가는 IT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어렵다면 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총장님께 ‘재료연구소 근처에 어디 자리 나면 거기 공대를 옮기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을 합니다. 공단이 가까우니까 최대한 같이 붙어있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드리는 말입니다. 일단 서로 가까이 있어야 소통이 되고 뭔가 됩니다.”

-요즘 학교에서 취업률에 사활을 걸고 있는데요. 학교에서 잘 키워서 내보내도 막상 현장기업에서는 데리고 와도 써먹을 데가 없다. 가르치느라 시간 다 보낸다고 투덜댑니다. 이 간극을 어떻게 좁혀야 할까요?

“그래서 생각한 게 전문석사입니다. 지금 처음으로 해양플랜트 전문석사과정을 만들었습니다. 프랑스처럼 기본이 탄탄히 잡고, 컴퓨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양플랜트니까 컴퓨터, 시스템공학, 환경공학까지 넓게 가르치면서 마인드가 충실한 엔지니어를 키워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실무에 투입돼도 말을 바로 알아듣고 기업이 요구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려 합니다. 이게 전문석사과정입니다. 이것도 연구마을처럼 처음 시작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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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니지 대학 총장과 만남.

-정부에서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미래부도 만들고, 뭐 스타트업 몇 천개 만들고 수치상으로는 엄청나게 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만.

“관료들 중 문과출신이 대부분입니다. 미래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국장급 관료 중에서 그나마 말이 통하는 분이 있습니다. 산학협력 분야만 근 20년 넘게 해 오신 분입니다. 그런 분도 하시는 말씀이 ‘아직도 내가 현장을 잘 모르겠습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눈높이가 이미 높이 가 있다. 컴퓨터공학과 44명 졸업생 중에 30명이 취업하고 나머지는 취업을 안 했는데, 모두 대기업에 가려고 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곳에서 콜이 들어와도 안 갑니다. 상황이 이런데 정부에서 아무리 일자리를 만들어주거나 창업하라고 해도 잘 되기 어려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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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학생연수 인솔 사진.

-그러면 학장님 생각으로는 어떻게 정부에서 지원을 해줬으면 합니까? 

“정치적인 것을 떠나서 노무현 정부 때 누리사업(지방대학 혁신역량 강화사업, New University for Regional Innovation)을 되살려야 합니다. 제가 사업단장을 할 때, 처음에는 기업들이 코웃음 쳤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누리사업 막바지 3년차에는 기업들이 오히려 나서서 ‘사업을 연장 할 수 없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맥이 끊겨 버린 것이 참 아쉽습니다.”

인터뷰 내내 아쉬움과 답답함이 교차했다. 분명 우리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경남에도 IT산업을 융성시킬 기회가 있었고, 정말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키워내고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그러나 그 기회는 도지사가 바뀌면서 대통령이 바뀌면서 허무하게 날아가 버리고, 지금 간신히 대학과 기업들이 자구책을 찾아서 나서면서 뭔가 어렴풋이 방향을 잡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슬로건과 성과를 앞세운 어설픈 정책으로 그나마 방향을 잡은 나침반을 흐트러뜨리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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