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리본’ 가슴에 달고 누구나 함께

왁자지껄한 음악 소리 대신 노란 리본이 나부꼈다. 매년 하던 아이들의 장기 자랑도, 환호와 탄식이 오갔던 경품 추첨 행사는 없었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진해만 생태 숲 걷기대회’.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고 실종자 무사귀환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열린 행사는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하게,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한 발걸음을 나누며 진행됐다.

5월 11일 아침 9시. 창원시 진해구 풍호체육공원에 시민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밝은 색상의 등산복을 챙겨 입은 시민은 저마다 맑은 웃음을 띠며 행사장으로 입장했다. 가족부터 친구, 연인까지. 구성원도 다양했다.

각종 체험행사(요술풍선 만들기, 나무곤충 목걸이 만들이, 부채꾸미기, 솜사탕 만들기 등)에 빠져있는 아이, 추모 부스에서 슬픔과 회한을 대변하는 노란 리본을 달던 학생, 먹을거리를 준비하던 봉사단체 회원. 다른 곳에서 다른 목표를 안고 제 각각의 사람들이 모였다. 벙거지 모자, 기능성 면바지, 반바지, 색색 등산복. 생김새도 차림새도 모두 달랐지만 자연과 걸음은 이들은 한데 모이게 했다.

생태만 걷기 대회 출발 모습.

노란 리본

참가자 중에는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단 시민이 많았다. 16일 세월호 침몰 참사 이후 전 국민적 애도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열린 행사인 만큼 ‘죄송하고 안쓰러운 마음’은 행사장 곳곳에서 퍼져 나갔다.

본격적인 행사 시작에 앞서 운동장 한가운데 마련한 추모 부스에는 노란 리본으로 애도를 표하려는 참가자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언니 미안해요’, ‘그곳에서는 행복하길 바라요’, ‘아픔과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항상 웃으시기 바랍니다’. 서툰 글씨지만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적은 아이들의 리본은 모두의 가슴에 남은 상처를 어루만졌다. ‘우리가 미안하다’, ‘기적처럼 돌아오렴’. 경건한 마음으로 써내려간 어른들의 문구는 세월호 참사를 영원히 잊지 않게 했다.

   

사전 행사도 예년에 펼쳐지던 축하 공연과 내빈 소개를 생략하고 세월호 희생자를 기억하는 묵념으로 대신했다. 축사와 대회사 역시 사고 희생자를 기리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진해만이 지닌 자연도 즐기고 먹을거리도 즐기며 건강을 다지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와 함께 추모 마음도 함께 간직하며 코스를 걸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당차게 뱉은 대회사가 곧 진해만 생태 숲 걷기대회의 진짜 시작을 알렸다.

녹색 빛깔이 휘감은 산 속으로, 푸른 빛깔이 빛나는 물 곁으로. 행사를 위한 모인 4,500여 명의 시민은 ‘노란 빛깔’을 품고 앞으로 나아갔다.

   

함께 걷는 길

진해만 생태 숲 걷기대회 코스 길이는 총 7km였다. 여느 생태 숲 길이 그러하듯 진해만 생태 숲 길 역시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했다. 단 처음부터 가파른 오르막길이 펼쳐진다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 단점이라면 단점이지만.

첫 번째 포인트인 천자암까지는 1.2km가량의 오르막길이었다. 걷기보단 ‘차 타는 일’에 익숙해졌을 어른도, 엄마 품에 안기는 일이 더 익숙할 어린 아이도 여기서만큼은 제 다리만을 믿어야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지레 겁먹고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거친 숨을 몰아 쉬면서도 묵묵히 앞을 향해갔다.

   

진해걷기연합 동호회 활동 중인 배장주(65) 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배 씨는 ‘이 길만 지나면 내리막길이다’는 말로 주변 사람들은 안심(?)시키고 있었다. 그러면서 배 씨는 자신이 품은 ‘걷기 철학’을 말하기도 했다.

“평소에도 이 길을 자주 걷곤 해요. 오늘은 우리 회원 90여 명이 참석했어요. 사실 걷기만큼 익숙하면서 쉬운 일은 없죠. 하지만 건강에 이것만큼 좋은 운동도 드물어요. 여기에 바다·산·계곡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진해만 생태 숲 길은 ‘보는 재미’까지 더해주죠.”

배 씨 말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확 트인 공간이 나타나더니 내리막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진해만이 한눈에 보이는 정상 부근이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듯한 바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 신선놀음을 즐기기에 이만한 곳도 없었다. 참가자들도 이를 아는 듯 잠시 걸음을 멈추고 풍경을 즐겼다. 누군가는 기지개를 켰고 누군가는 연방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에 바빴다. 등 뒤로 흐르는 식음 땀은 훈장처럼 느껴졌다.

가족과 함께 쉬지 않고 걸었던 전점권(72) 씨도 그제야 허리를 폈다.

전 씨는 1년 전부터 파킨슨병을 앓아왔다. 그러면서도 해마다 참가했던 걷기 대회는 올해도 빠지지 않았다. 상쾌함을 느끼고 새로운 의지를 다지기 위함이었다.

“아주 상쾌합니다. 아내와 아들. 가족이 나란히 걸으니 더 좋네요. 하루에 3분씩은 꾸준히 운동하자는 의지도 다시 다질 수 있게 됐습니다.”

아내, 아들 손을 맞잡고 걷는 전 씨 발걸음은 남들보다 조금 무거울지 몰랐으나 그 마음만은 누구보다 가벼워 보였다.

   

정상 부근에서 반환점까지는 내리막길과 얕은 오르막길, 평지가 이어졌다. 그 사이 참가자들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눠가며 여유로움을 즐겼다.

줄줄이 이어진 발걸음의 제일 마지막은 ‘경상남도자원봉사센터 소속 LOVE 경남 대학생 봉사단’이 맡았다. 총 374명이 참가한 봉사단은 행사에서 ‘환경 캠페인’을 펼쳤다.

봉사단은 참가자들이 떠난 길 위에서 환경 정화 활동을 펼치거나 곳곳에서 환경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하곤 했다. 반환점에서도 봉사단 활약은 이어졌다. 봉사단은 쓰레기 분리배출 필요성, EPR(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 쓰레기 순환과정에서 나오는 독성물질 설명 등 환경이 지닌 가치를 게임과 체험활동으로 쉽고 재미나게 전했다.

“페트병을 제대로 분리하는 법 아시나요? 뚜껑은 물론 비닐까지 따로 분리해야 해요. 음료수는 한 번 헹궈서 분리수거하는 습관도 길러야 하고요.”

이지민(23) 학생 등 봉사단이 상세하게 전하는 환경 캠페인은 걷기 대회가 안겨준 또 다른 선물이었다.

   

걸음, 천 개의 바람이 되어

풍호체육관으로 향하는 하산 포인트에서는 스크래치 복권을 나눠줬다. 요란한 경품 행사 대신 스크래치 복권으로 주요 경품 추첨까지 대신했다. 모든 참가자가 동시에 내는 환호와 탄식은 없었지만 스크래치 복권만이 주는 즐거움도 있었다.

동호회 회원은 한 데 모여 돌아가면서 복권을 긁었고 ‘유독 운이 좋다’는 아들에게 모든 복권을 맡긴 가족도 있었다. 당첨한 참가자와 ‘다음 기회’를 얻은 참가자 사이에선 짓궂은 농담도 오갔다.

“내년에도 꼭 개최하자”고 당부하는 참가자 곁으론 함박웃음이 번졌다.

돌아오는 길. 중간 중간 드리워진 짙은 녹음 속 시원한 그늘은 싱그러운 휴식처가 됐다. 처음 출발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행사장이 다가올수록 발걸음은 더뎌만 갔다.

   

단순히 힘에 부쳐 느려진 걸음은 아니었다. 바쁘게 살아온 일상 속에서 느낀 여유와 자연이 안긴 선물을 더 만끽하려는 의미였다.

아내, 두 아이와 참가한 박지남(42) 씨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참가했네요. 올해 역시 좋은 추억만 안고 갑니다.”

이윽고 도착한 행사장에서는 평소에 울리던 신나는 음악 대신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임형주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앰이 ‘내동생들’·‘미안해요’와 같은 추모곡은 이번 행사가 전하는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대회’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순위를 매기는 일이 아니잖아요. 행사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1등인 셈이죠. 여기에 누구나 걸을 수 있고 함께 걸을 수 있는 점까지 더해지니 이보다 더 평등한 대회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특히 세월호 참사로 모든 국민이 아픔을 겪는 이때에 걷기를 통해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도 있는 듯합니다.”

   

누가 알려준 적도 없지만 모두가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었다. 누군가는 “자연의 소중함을 깨우쳤다”며 함께 온 이들은 격려했고 “가족과 함께 새로운 추억을 쌓고 돌아간다”며 감사 인사를 전하는 참가자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잔인했고 또 가장 슬펐던 올해 5월. 괜스레 눈물이 나고 죄스러운 달. 그러나 많은 시민이 마냥 침묵하고 있기보단 걸음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기로 했다. 왁자지껄한 잔치가 아니더라도, 예년과 달리 시끌벅적함이 없더라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 이웃, 친구와 함께 걸음을 나누는 것에 충분히 만족했다.

2014년 진해만 생태 숲 걷기대회는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는 노란 물결이었다. 함께한 걸음들에는 말과 글로 다하지 못했던 소통이 있었고 반성이 있었다. 하루 동안 가슴에서 나부낀 ‘노란 리본’은 바람이 되어 산으로 들로, 바다로 퍼져 나갔다.

/글 이창언 기자. 사진 김구연·박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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