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동 서점 '생의 한가운데', 신부 부탁에 결혼식장 변신
책방 지인들 꽃장식ㆍ축가ㆍ연주ㆍ축사 재능기부로 축복

성근 단풍 사이로 햇살이 부서지는 청명한 가을날, 김해 작은 동네책방에서 '세상에서 하나뿐인' 기적 같은 결혼식이 올려졌다.

신랑 윤진효(44) 씨와 신부 송유진(40) 씨가 지난 3일 낮 12시 30분 내외동 인문책방 '생의 한가운데'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결혼식장에 선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어안이 벙벙하다. 은혜 잊지 않겠다. 감사하다"고 말했다.

서울 태생인 유진 씨는 5년 전 김해에 와 동네책방 '생의 한가운데'를 찾게 되면서 박태남 책방 대표와 인연을 맺었다. 송 씨는 책방 2030 독서모임 '책마온'에서 활동했고 '뿌리지킴이' 후원자이기도 하다.

1년 6개월 전 사진동호회에서 대구 태생 진효 씨를 만난 송 씨는 책이 있는 공간에서 소박하게 결혼하고 싶다며 박 대표에게 허락을 구했다.

지난 3일 낮 12시 30분 김해시 내외동 인문책방 '생의 한가운데'에서 신랑 윤진효 씨와 신부 송유진 씨 결혼식이 열렸다. /이수경 기자
지난 3일 낮 12시 30분 김해시 내외동 인문책방 '생의 한가운데'에서 신랑 윤진효 씨와 신부 송유진 씨 결혼식이 열렸다. /이수경 기자

박 대표는 "처음엔 책방은 결혼식 장소로선 아쉬운 부분이 많아 미안해서 안될 일이라며 말렸는데, 유진 씨가 괜찮다며 마음을 굳혔다고 해서 책방을 내어드렸다"고 했다.

유진 씨는 웨딩사진 대신 둘이 출사 가서 찍은 풍경 사진을 전시하고 주례사나 축사, 축하곡 등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들 앞에서 서로에게 쓴 편지를 나누며 혼인을 알리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박 대표는 좁은 책방을 일생에 한 번 치르는 결혼식장으로 만들려니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책방에서 결혼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책방 지인들이 하나둘씩 마음과 재능을 열어주면서 기적이 일어났다. 

박 대표는 부케 때문에 2층 꽃집 사장과 얘길 나누다가 결혼식장을 생화로 장식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행운을 얻었다. 백합꽃 소비를 촉진하려는 생산자단체가 꽃을 후원했고, 한국화훼장식기사 경남지부가 자원봉사로 결혼식장을 꾸몄다.

또 박 대표가 사회자로 추천한 책방 전속 오카리나 연주자 곽승란 씨는 진행과 축하 연주를 모두 맡았다. 축사는 지난 9월부터 책방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는 이문재(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시인에게 부탁했더니 흔쾌히 수락했다.

책방 가족인 오세일 인제대 음대 교수는 책방에 있는 낡은 피아노로 연주를 맡아줬다. 축가는 박 대표가 SNS에 알린 결혼식 예고 글을 본 이채민 소프라노가 반주자 이영송 씨와 함께 자발적으로 재능기부를 했다. 피아노를 조율하지 않은지 오래돼 윗골목에 사는 이성우 조율사에게 말했더니 선뜻 마음을 내줬다.

박태남(사진 왼쪽) '생의 한가운데' 대표와 신부 송유진 씨. /이수경 기자
박태남(사진 왼쪽) '생의 한가운데' 대표와 신부 송유진 씨. /이수경 기자

유진 씨는 "정말 작게 결혼식을 하려고 했는데, 개인적으로 책방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게 되고 일이 커져 얼떨떨하다"며 웃었다. 진효 씨는 "뻔한 웨딩홀에서 공장 제품 찍어내듯이 결혼하진 않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정화수 떠놓고 절만 해도 되지 않느냐고 얘기해왔는데, 동네책방에서 도움을 받아 결혼하니 멍하고 감사하다. 다시 생각해도 잘했다 싶다"고 말했다.

이날 결혼식은 여느 결혼식과는 다르게 치러져 감동을 더했다. 먼저 신랑이 어머니와 함께 입장하기 전에 귓속말로 "어머니 사랑합니다"라고 속삭이며 진하게 포옹하고 나서 손을 잡고 입장했다. 이어 신부 어머니가 입장해서 사위에게 딸 손을 건네자 하객들도 뭉클해했다.

신랑 신부는 각자 자신이 써온 혼인서약 편지를 낭독하고서 뜨거운 키스로 미래를 약속했다. 하객 40여 명은 다 같이 성혼선언문을 한목소리로 낭독하며 증인이 됐다.

이문재 시인은 축사에서 "특이한 결혼식을 많이 가봤지만 책방 결혼식은 처음이다. 신랑 신부에게 놀라고, 양가 어르신이 존경스러웠으며, 책방 주인도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생각했다"며 "더 놀랄만한 일은 꽃 장식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작지만 큰 위력이 우리 모두에게 축복을 준 것이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신랑 신부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른다고 해서 부담 갖지 말고 둘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은혜 갚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신랑 신부에게 "나(자존감), 벗(우애), 이방인(공감·환대)을 위한 3개 의자를 준비하라. 지금 의자가 몇 개 있는지 깊이 살펴보고, 먼저 가족과 배우자에게 공감해주길 바란다"며 축사를 끝냈다. 

결혼식은 축하 공연, 양가 어르신에게 감사 인사,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뒤 식사를 하고 마무리됐다. 신랑 신부는 하객들 답례품으로 과자나 수건 대신 기도 시집 <당신의 그림자 안에서 빛나게 하소서>(이문재 지음)를 나눠줘 동네책방 결혼식의 의미를 더했다.

박태남 대표는 "신랑 신부가 받은 고마움을 사회에 갚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며 "'생의 한가운데' 역시 많은 사람 정성으로 있게 된 공간"이라고 회고했다.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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