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이 일으킨 한글 간소화 파동
 
해방 후 한글 맞춤법에 관한 노산의 활동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창립되기 3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미군정은 한글날을 공휴일로 제정하였다. 1945년부터 매년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여 1990년까지 공휴일이었다. 조선어학회가 미군정 문교부에서 조선어 관계 일을 도맡다시피하여 최현배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협력하였다. 미군정장관 아놀드는 조선어학회가 집필한 『한글첫걸음』과 『초등 국어독본』을 제작하여 학생들에게 배부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 9일, 한글날 담화에서 현재 한글 표기법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조선어학회는 긴장하였다. 다음 해에도 한글날 담화에서 신문이나 문화계에서 쓰는 국문이 쓰기도 더디고 보기에도 괴상하다며 개정을 종용했다. 이승만이 문교부장관 안호상에게 한글맞춤법 개량을 지시하자, 안호상은 나중에 통일안이 가장 개량된 것이라고 보고했다. 1950년 2월 3일에는 기자회견을 통하여 "ㅅ을 둘이나 쓰는 아무 소용없는 받침을 하고 있으니 고쳐야 할 것이다. '잇다'와 '있다'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복잡하고 어려우니 이를 버리고 한글을 간편하게 적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6.25전쟁의 발발로 현안에서 잊혀졌다.

그런데 휴전협상이 한창이던 1953년 3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특별 담화문을 통해 정부 문서와 교과서에 옛날대로 철자법을 사용할 것을 지시했다. 그가 주장한 철자법은 받침, 철자, 띄어쓰기 등 모든 규제를 풀어 소리나는 대로 적자는 표음주의적 맞춤법이다. 일제시대 조선어학회에 맞서서 정음을 주장하던 박승빈의 조선어학연구회 주장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옛 철자법이란 구한말 성경에서 사용된 철자법이다. 1952년 재선에 성공한 이승만은 이듬해인 1953년에 전격적으로 통화정책과 언어정책, 두 가지를 추진하였는데 1953년 4월 11일 국무회의를 거쳐 4월 27일 백두진은 국무총리의 훈령 제8호로 정부용 문서에 관해서는 즉시 간이한 옛 철자법을 사용하도록 공문을 각 부처 장관, 도지사들에게 보냈다. 이에 따라서 6월 26일 문교부에서 간소화 방안을 내놓았다. 

한글간소화 방안

이승만 정부의 한글 간소화 방침이 국회와 국민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김법린 문교부장관은 5명의 국어심의위원회를 구성하여 한글철자법 문제를 논의하게 하였다. 7월 7일 문교부령으로 50명의 국어심의회가 구성되었다. 10월 1일 서울로 환도한 후 서울대 치과대학 강당에서 첫 회합을 열고 백낙준을 위원장으로, 박종화, 주기용을 부위원장으로 하고 한글문제, 한자문제, 학술용어문제, 외래어표기문제, 국어정화문제 등을 다루는 5개 분과를 구성하였다. 이 가운데 '한글문제에 관한 분과위원' 25명은 자타가 인정하는 전문가들이었다. 정경해, 윤태영, 이세정, 조석기, 이희승, 이숭녕, 김사엽, 김윤경, 정인승, 김선기, 한갑수, 최현배, 허웅, 염상섭, 유치진, 조지훈, 이은상, 안상한, 김범부, 이선교, 한동석, 최태호, 조윤제, 주기용, 양주동(결석자를 보충하기 위해 오종식, 박종화, 주요한, 백낙준, 이하윤 등 5인을 추가) 등이 참여하였다. 이숭녕을 위원장으로 안상한을 부위원장으로 선출하고 몇 개월 동안의 활동을 통하여 김법린 장관을 거쳐 이승만 대통령에게 '현행 한글 맞춤법 이상 더 간이화할 수 없고, 만일 더 나아간다면 한글을 풀어서 가로쓰는 수밖에 없다'는 보고서를 12월 29일 제출하였다. 심의회는 한글 풀어가로쓰기안을 채택한 것이다. 한글분과위원회는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합리적, 과학적인 철자법이라고 인정한 반면 구철자법에 입각한 한글간소화안을 실현 불가능한 탁상안이라고 치부함으로써 이승만에게 상당한 정치적, 감정적 타격을 입혔다. 한글학회는 "이 두 문장을 보라고. '곧 도착할 곳이 동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곶입니다'와 '곳 도착할 곳이 동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라는 문장이 구별되는가? 도대체 간소화 방안은 어떤 작자가 만든 거야?"라고 항의 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한글분과위원회의 결론을 무시하고 대통령의 뜻대로 추진했다. 이에 어문정책을 주도하던 문교부 편수국장 최현배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12월에 사임하였고, 문교부장관 김법린이 1954년 2월에 사임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징역을 산 김윤경은 '권력으로 내리누르는 한글 탄압'이라고 저항하였다.

이승만은 3월 27일 '3개월 이내에 현행 맞춤법을 버리고 구한국 말엽의 성경 맞춤법에 돌아가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70여일 동안 공석이던 문교부 장관에 이선근 단국대 학장을 1954년 4월 21일 임명하였다. 이선근은 22일, 첫 기자회견에서 한글간소화 추진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전문가와 여론의 반대 및 국회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6월 12일 이선근 장관은 각 교육기관에 간소화안 추진을 지시하는 통첩을 발송했다. 다음 날 이승만은 문교부의 한글간소화안을 그대로 강행하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18일에는 자유당이 문교부안을 절대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선근은 6월 26일의 기자회견에서 한글간소화 3원칙을 발표했다. 내용은 불필요한 쌍받침을 없애고, 용언의 어간과 어미는 밝히되 어원은 밝히지 않으며 표준말은 새로 제정한다는 것이었다. 7월 3일, 문교부와 공보처 공동 명의로 발표한 맞춤법 간소화 공동안에 의하면 복잡한 받침을 열 개만 남기고 없애며 어간(語幹)을 무시한다는 것인데 전자의 예로는 '믿다'를 '밋다'로, '갚다'를 '갑다'로 한다는 것이고 후자의 예로는 '길이'를 '기리'로, '높이'를 '노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있었다'를 '잇섯다'로, '앉았다'를 '안잣다'로, '좋지 않다'를 '조치안다'로 표기하게 되면 어간과 어미가 구별되지 않아 어원이 드러나지 않으며 또 표기에 일정한 원리를 찾을 수 없게 된다.

7월 13일, 문교부의 한글 간소화안을 그대로 강행하라는 이승만의 특별담화와 함께 한글학회,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국어국문학회, 대학국어국문학교수단 등의 간소화 절대반대 성명서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선근은 이승만의 한글 간소화 정책을 '세종의 뜻'이라며 끝까지 받들었다. 자유당은 간소화안을 지지하면서 '과거에 김두봉 일파가 급조한 지나치게 복잡화한 한글을 강요하는 북한 조선 공산도당은 이제 와서 이극로 일파를 동원하여 파괴적 문화공세를 전개'한다고 까지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재경 대학 국어국문학 교수단은 '모당의 성명서 중에 김두봉, 이극로 일파 운운은 이조의 사화와 같은 그 무엇을 암시하여 누구를 위협하는 것인가?'라고 반발하였다. 이런 가운데 국회에서 한글특별대책위원회 구성을 통하여 결국 간소화문제가 보류되기에 이르렀다. 난국을 풀기 위해서 한글학회 유제한은 이승만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자유당 국회의원 표양문(表良文)을 만나 문교부 한글 간소화안이 너무나 비과학적임을 설득하였고, 표양문 의원은 대통령에게 학계와 여론의 동향이 전달하였다. 표양문은 1955년 9월 이승만이 인천 월미도로 낚시하러 온 기회를 이용하여 한글간소화문제와 큰사전 편찬 및 록펠러재단과의 관계를 말했다. 이 당시 록펠러재단은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나라의 언어교육 프로그램이었는데, 결국 미국의 세계지배 전략 차원에서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5년 9월 19일, 공보실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제 와 보니 국문을 어렵고 복잡하게 쓰는 것이 습관이 되어 고치기 어려운 모양이다. 사람들이 그냥 쓰는 것을 보면 무슨 좋은 점도 있나 보다. 바쁜 와중에 이걸 문제 삼지 않겠다. 민중이 원하는 대로 하라." 비록 간소화 정책은 철회하지만 자신의 견해가 여전히 옳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어쨌던 미국과 국내 여론을 의식한 이승만 대통령의 백기 투항으로 한글파동은 8년만에 깨끗이 종식되었다. 한글파동에서 이선근(1905~1983년)은 이승만의 충실한 지지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글 간소화문제는 이승만이 집권기간 동안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지 못한 예외적인 경우였다. 한글 간소화파동은 어떤 문제에 대한 전문가들 간의 이견이 아니라 대통령과 학계, 교육계, 언론계의 힘겨루기였다. 서울대 임대식 교수는 한글 간소화파동은 '전문가들 사이에 별 이견이 없는 일회적 논쟁으로 그치고 말았다'고 한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국역편집위원으로 활동
 
떠들썩했던 한글 파동을 거친 후,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1956년 10월 9일 경기여중고등학교 강당에서 가진 510돌 한글날 기념식장에서 긴급동의로 발기총회를 한글학회 외 27개 단체와 함께 가졌는데 발기위원 명단에는 노산이 없다. 그러나 초대이사로 노산(충무공기념사업회장)은 현제명, 이관구, 김성곤, 김천배와 함께 참여하였다. 1957년 5월에 문교부장관의 설립허가를 받았다. 1956~1960년까지 초대이사를 역임하였고 10여년 동안 쉬었다가 이관구가 회장으로 취임한 1971년부터 다시 참여하여 돌아가실 때까지 하였다. 제4대(1971~1973년), 5대(1973~76년), 6대(1976~79년), 제7대(1979~82년)까지 이사로 활동하였으며 제8대 이사명단에도 노산이 포함되어 있으나 임기가 1982년 6월 26일~1985년 6월 25일 인걸로 봐서 노산 사후에도 그냥 포함시켜 둔 것 같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노산과 함께 징역을 산 최현배(최현배, 1894~1970년, 1949년부터 한글학회 이사장을 20여년간 맡았었다. 노산은 1966년부터 한글학회 이사였다. 최현배는 작고 후에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는데 노산은 생존 시에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는 이미 1957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기념사업회는 한글전용 가로쓰기운동, 전국 세종날 글짓기대회, 세종대왕 전기 간행, 한글날을 국경일로 지정받기위해 노력하였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1966년 창립 10주년을 기념하여 세종대왕 전기를 간행하였다. 1965년은 굴욕적인 한일회담이 체결된 해였기 때문에, 기념사업회로서는 세종대왕을 민족문화의 상징으로 국민들에게 주입시키기 적절한 때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기념사업회는 1965년 역사학자 홍이섭이 전기를 집필, 간행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기념사업회에는 각종 자문위원회가 있다. 1968년 1월에는 세종실록을 국역키로 하고 국역편집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최현배(국어), 김상기(역사), 민태식(한문), 이은상(문학), 유봉영(언론) 등 5명이었다. 이 위원회는 1968년부터 1977년까지 활동하였다. 세종실록 166권 국역은 세종대왕의 위업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번역작업이었다. 1969~1973년까지 활동한 세종대왕기념관 진열계획위원회의 일대기실 분과위원, 과학실 분과위원으로 노산이 참여하였다. 김봉천이 쓴 『노산 이은상 선생』에는 1972년 3월부터 노산이 기념사업회장을 하였다고 하는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자료에 의하면 이 시기에는 이관구 회장(제4~10대, 1971~1991, 20년)이며 역대 회장 명단에도 노산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통신 조덕송 기자는 이승만 우상숭배 세력들을 가리켜 "아첨배는 서울시 이름을 이 박사 호를 따 '우남'으로 바꾸자는 운동을 했고, 시민들 기부금으로 세종로에 회관을 지어 이름을 우남회관이라고 했다. 건물은 화재로 소실되고 지금은 세종문화회관이라고 불린다"고 했다. 4·19혁명이 아니었다면 서울시는 우남시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때 화재로 소실된 시민회관을 재건축하면서 1978년 개관할 때까지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여러 차례 지시를 하는 등 관심이 많았고, 1977년 서울 시장 구자춘에게 여러 이름을 지어 올리라고 지시하였으며 그 중에서 세종이란 명칭을 선정하였던 것이다. 1978년 4월 14일, 세종문화회관 개관식을 하였는데 기념사진에는 박근혜, 곽상훈, 박정희, 이은상, 구자춘, 민복기, 최규하가 나란히 서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한글날을 국경일로 정하였다. 그리고 어린이회관 앞에 세종대왕 동상을 세웠다. 덕수궁 중화전 앞에 세운 세종대왕 동상은 김종필 국무총리의 기부 형식으로 애국조상건립운동 제2호로 세웠다. 1호는 박정희 대통령의 기부 형식으로 1968년에 세운 이순신 동상이다. 그리고 1976년 이 기념사업회를 지원하여 『세종실록』 30권을 완간하게 했다.

제1회, 한글 공로자로 박정희 대통령 표창을 받다

이극로의 영향을 받아서 대종교에서는 일찍부터 경전을 한글화하는 노력을 했는데 이은상이 감수한 한글 대종교 경전이 1969년에 출간되었다. 대종교 홈페이지의 인물란 어문분야에 '대종교 경전 한글화의 주역, 이은상'이라는 제목으로 얼굴 사진과 함께 등재되어 있다. 이 란에는 안확, 이극로, 신명균, 이윤재, 한징, 백남규 등 대부분 조선어학회 인물들이 올려져 있다.

1946년 호남신문사에 있을 때부터 가로쓰기를 실천한 노산은 정부의 한글전용화정책은 한글을 통해 민족정기를 세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민족주체성을 세우는 정권임을 과시할 수 있는 방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11월 16일,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잘 만들어진 문자인데 아직도 한문을 혼용함은 부끄러운 일이며 새 세대를 위하여 한글전용을 강력히 밀고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는 1968년 초반만 해도 문교부는 각급 학교에서 한자 교육을 양성화하고, 한자의 약자를 제정하도록 했다. 그런데 박정희 정부는 갑자기 한글전용 10개년 계획을 내세우고, 1970년부터 초, 중, 고등학교에서는 원칙적으로 한문을 가르치지 않기로 결정한 동시에 각급 학교의 교과서 및 공문서에서 한자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1970년 10월 9일 한글날 524돌을 맞이하여 한글전용으로 자주성을 확립하자는 요지의 치사를 하였다. 위로부터 시작된 한글전용정책에 의해 MBC 방송프로그램 'MBC페스티벌'은 'MBC대향연'으로, '해외토픽'은 '해외소식'으로 바뀌었고 각 방송국에서는 패티 김을 김혜자로, 김 세레나를 김세나로 부르는 해프닝이 일어 나기도 했다. 1968년 10월 9일의 한글날 기념식에서 한글공로자에 대한 제1회 표창이 있었는데 노산은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50년사에 수록된 사진을 보면 1968년 10월 9일 기념관 기공식에는 이은상과 함께 정일권, 장경순, 최현배 등이 참석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박 정권은 자신들의 경제발전의 성공을 한민족의 새로운 황금시대로 격상시키려는 의도와 자신이 민족주체성을 세운 대통령임을 과시하려고 했다. 결국 박 정권은 이순신의 신격화와 세종대왕의 찬양정책을 통해 자신을 민족적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냄과 동시에 위대한 민족문화를 부활, 발전시킨 인물로 부각시키려 했다. 한편으로는 주체적 민족문화를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신체제가 지닌 폭압성을 유화시키는 방편이었다. 그리고 세종대왕이 이룩한 문화적 업적들을 강조하면서 유신체제의 최종 목표가 민족문화의 전성기 도래라고 표방하고 이를 통해 현재의 고난과 역경을 국민들이 이겨나갈 것을 강조하였다. 1977년 세종대왕 영화를 위하여 자막으로 올린 송시 「세종대왕」을 노산이 썼다. "바라보라 아름답고 기름진 금수강산!/ 산과 들에 눈부신 동해의 아침 햇빛!/ 저 햇빛 속에 산맥처럼 우뚝 솟은/ 거룩하신 님!/ 강물처럼 넘치는 은혜 끼쳐 주신 님!/ 나라의 터전을 반석 위에 닦으신/ 위대한 개척자시여/ 민족문화의 방향을 열어주신/ 겨레의 지도자시여/ 아! 그 이름 세종대왕/ 조국의 강토와 역사와 함께/ 여기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리이다/ 여기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리이다" 

조직분규 이후 숙명여대 이사장, 정관개정으로 한국문화원연합회 회장

이기붕이 1954년부터 죽기 전인 1960년까지 이사장을 지냈던 숙명여대는 60년대 후반에 재단이사 간의 송사에 휘말려 곤혹을 치르고 있었다. 1968년 문교부 관선이사 임명조치의 철회로 6년간 계속된 소위 '외부로부터의 조작' 분규는 종식되었고, 새로이 신임이사진을 4월 13일 구성하였는데 이때 이은상(민족문화협회장)이 이사로 선임되었다. 

이은상은 1968년 4월 25일부터 1972년 4월 24일까지 재단이사회의 평이사로 있다가 다음 임기부터 9대 (1972. 4. 25 ~1976. 4. 24), 10대(1976. 5. 18 ~ 1977. 5. 20) 이사장으로 재임하였다. 중간에 1976년 4. 22부터 1976. 5. 17까지는 차낙훈 이사장이 직무대행을 한 달간 맡았었다.  이은상이 이사장으로 있는 동안에 제6대 총장 이인기(1969. 2. 27~1973. 2. 26), 7대 총장 김경수(1973. 2. 27~1977. 2. 26) 등이 있었다.

노산은 숙명여대 이사장을 그만둔 1977년에 한국문화원연합회 회장이 된다. 1948년 강화문화원을 시작으로 공보원, 문화관 등 다양한 명칭으로 자생적으로 설립된 지방문화원은 균형발전, 상호협조 및 공동이익 증진을 위하여 1962년 한국문화원연합회를 창립하였다. 문화원은 정부에 의해 공인된 단체가 되었고 1965년 지방문화사업조성법이 시행되어 문화원에 대한 운영비 보조와 시설지원이 이루어졌다. 지방 문화활동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공식적인 기구로서의 지방문화원이 철저하게 중앙정부의 이념적, 재정적인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노산은 1977년부터 1982년까지 14대~16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1977년은 연합회 운영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해였다. 

먼저 1월 18일에 문화공보부는 연합회에 대한 운영자금지원을 중단하였고 이어서 2월 4일 신문회관에서 열린 제16차 정기총회에서 정관을 개정하여 회장 선임자격을 문화원 내부인사로 국한했던 기존의 조항을 개정하여 외부인사에게도 개방해 인물 선택의 폭을 넓혔으며 연합회 사무국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사무국장을 사무총장으로 승격시켰고 임원의 임기를 1년에서 2년으로 연장하였다.

처음으로 외부인사인 노산 이은상이 연합회 14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연합회의 위상을 강화하고 조직을 안정화시키는 조치를 강구하였다. 5년간 회장을 연임한 노산의 죽음으로 공석이 되어 1983년 3월 20일 제22차 정기총회에서 두 번째 외부인사인 강주진이 17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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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명여대 50년사편찬위원회, <숙대50년사>,1989년, 846~847쪽.
 이소라, <박정희 정부의 민족문화사업과 국사교육>,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2013년), 16쪽.
 이종인, 김종, 한춘섭, <한국문화원연합회 50년사>, 한국문화원연합회(2013년),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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