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장센의 절정

미장센(Mise-en-Scene), 누군가는 샴푸를 번뜩 떠올렸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미장센은 '장면 속에 무엇인가를 놓는다'는 뜻의 프랑스 말로 연극에서 연출을 의미하는 용어로 처음 사용됐다. 영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누벨바그(Nouvelle Vague, 새로운 물결이라는 뜻의 1960대 초 프랑스의 영화 운동) 시대부터. 인물, 조명, 의상, 분장, 카메라의 움직임 등 시각적 요소를 영화 프레임 내부에 배치하는 것으로 (아주 적확한 건 아니지만) '화면 구성'이라는 말로 이해하면 된다. 카메라가 한 장면을 찍기 시작해 멈출 때까지 화면 속에 담기는 이미지들, 이것들을 만들어내는 작업, 바로 미장센이다.

그동안 이 코너에서 소개했던 작품을 살펴보면 미장센이 훌륭한 작품들이 참 많았다. 처음 소개했던 마틴 스코세이지 <택시 드라이버>, 쿠엔틴 타란티노 <저수지의 개들>, 코엔 형제 <번 애프터 리딩>, 토드 헤인즈 <벨벳 골드마인>, 라스 폰 트리에 <멜랑콜리아> 그리고 자비에 돌란 <로랜스 애니웨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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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순응자> 스틸 컷.

이번에 소개하는 이탈리아의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의 <순응자>(The Conformis, 1970)는 내가 아는 영화 중에 가장 뛰어난 미장센을 자랑한다. 격하게 표현하자면 미장센 중에 미장센이랄까. 박찬욱 감독의 말이다. "코엔 형제는 새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스텝들이랑 그 영화(<순응자>)를 보고 시작한다고 해요. 그만큼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지점에 도달한 작품이라 볼 수 있죠."

1930년대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 주인공 마르첼로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정신 질환을 앓는 아버지와 약물 중독자인 어머니, 어린 시절 받은 성적 학대와 우발적인 살인.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은 마르첼로에게 평범함을 더욱 갈망하게 한다. 마르첼로는 평범하게 보이기 위해 좋은 집안의 여자와 결혼한다. 또 파시즘 정권의 비밀경찰에도 자원한다. 마르첼로의 첫 번째 임무는 자신의 대학시절 스승이자 프랑스로 정치적 망명을 한, 반(反) 파시즘 인사인 콰드리 교수를 살해하는 것. 파리에서 콰드리 교수를 만난 마르첼로는 콰드리 교수 아내 안나에게 이끌린다. 모든 임무를 저버리고 도망가고 싶을 만큼. 고민하던 마르첼로는 결국 콰드리 교수와 안나 모두를 죽이고 이탈리아로 돌아온다. 그리고 얼마 지나 무솔리니 체제는 무너진다.

영화의 처음과 끝을 살펴보자. 파리에 도착해 콰드리 교수와 안나를 죽여야 하는지 고민하는 마르첼로를 비추며 영화는 시작한다. 호텔 밖 네온사인 점멸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마르첼로 얼굴. 이러한 미장센은 마르첼로의 불안한 내면을 더욱 극대화해 전달한다. 마지막 장면은 파시즘 정권이 무너진 후 마르첼로의 얼굴을 비춘다. 얼굴 위로 드리운 계단의 창살이 마치 감옥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순응자로 살아온 마르첼로가 감옥과 다름없는 곳에서 살았고 살게 될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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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순응자> 스틸 컷.

미장센만 빼어나다고 해서 훌륭한 영화라고는 할 수 없다. 미장센은 메시지와 긴밀하게 조응할 때 빛을 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순응자>는 완벽하다. '이데올로기와 개인'이라는 여전히 유효한 주제 의식을 이토록 극대화한 미장센이라니!

<순응자>는 1970년에 만들어졌지만 국내엔 올해 초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처음 개봉했다. 이 또한 정상에 집착하는 이 시대, 파시즘의 징후가 넘실대는 이 시대에 어쩐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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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순응자>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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