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부리 징(鉦) 울림을 타고 천하절경 화림동으로 흐른다

“고산자는 말년에 앞이 안 보여 딸을 옆에 끼고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지도를 그려 나갔다더만 니는 남강 오백리 길에 늙은 아버지를 끼고 댕기냐?”

“아이구, 아버지가 나보다 지리에 더 밝고 보는 것도 더 풍부하니 제가 모셔가는 거지예. 딸이 워낙 무식하니 도운다 생각하시고….”

이번 구간 취재는 아버지와 동행했다. 앞서 이미 사전답사와 두어 번의 취재에 동행했던 아버지(76·권태현)는 말씀은 그리 했지만 이미 배낭에 마실 물과 커피, 매실 효소, 약간의 간식을 챙겨 놓았었다.

“이번은 화림동과 심진동 계곡인데 아버지가 길을 잡아주고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셔야지예.”

“내 차로 갈까?”

이렇게 묻는 건 자신이 운전하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것.

“아니예. 제 차로 갈 건데예.”

농담 반 진담 반을 나누며 떠난 ‘남강 오백리’ 취잿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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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전국 최고의 징을 만들던 함양군 서상면 꽃 부리에 있는 함양징터. 아버지가 앞뒤 사면에 기록된 것을 꼼꼼히 읽고 있다. /권영란 기자
함양군 서상면 도천리와 금당리를 잇는 구평교를 지나면서 강폭은 한층 넓어졌다. 강에는 바짝 엎드려 바닥을 헤집는 사람 몇이 눈에 띈다. “날이 꾸무럭하거나 비가 흩뿌릴 때 다슬기가 더 많이 나온다”며, 봉정마을 아지매는 다시 허리를 수그렸다. 유역은 온통 억새로 번져 초록 천지다.

서하면 송계리 초입까지 이어지는 서상로를 타고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진입로를 슬쩍 지나치니 도천리와 옥산리를 잇는 옥당교가 금방이다. 

“진주 마산에서 전주에 갈라모는 여기를 지나야 했제. 길은 꼬불꼬불해도 옛날에는 전부 이쪽으로 다녔어. 인자는 도로를 넓히면서 저쪽으로 에둘러가지만 더 빨라졌다데. 요즘도 5톤 트럭이나 덤프트럭 같은 짐차들이 마이 다녀. 제일 빠린께네.”

옥당교 건너에 있는 옥산리 가르내길에서 만난 한 주민은 서상로가 옛 국도 26호선이었으며,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다니던 옛 길을 포장한 거라고 말했다. 옥당교 위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니 물길 끝에는 백운산이 아득하게 서 있다.

세 갈래 물길이 만나는 곳에 징(鉦) 터가 있는 까닭

“함양장터가 와 요기 있었다노?”

“아닌데예. 이 골짜기에 무신 장터가 있었을라고예?”

물길도 서상로도 살짝 굽어드는 곳이라 눈에 띄지 않아 지나치기 쉬운 곳이었다. 제법 큰 표지석이다. 아버지와 나는 설왕설래하며 방금 지나친 곳을 되돌아갔다. 

“이기 징터가? 장터가? ‘ㅏ’가 지워져서 ‘ㅣ’가 된 기가?”

‘징터’라는 말이 낯설다. 아버지와 나의 의구심은 이내 풀렸다. 비문 앞뒤 옆을 꼼꼼히 살펴보고 나서야 ‘함양징터’임을 알 수 있었다. 표지석 큰 글자만 보면 ‘함양장터’라고 읽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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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림동 계곡 동호정/권영란 기자

함양군 서상면 도천리에 있는 ‘함양징터’. 예전에 이곳에서 악기중 징(鉦)을 만들었다 한다. 2001년에 비를 세웠지만 주변 조성이 되지 않은데다가 딱히 관리도 되지 않은 듯했다.

징은 농악놀이에서 빠질 수 없는 악기다. 농악기 중 ‘바람소리’라 하며, 소리가 가장 멀리까지 울리는 악기라 한다. 또 여러 소리를 아우르는 기운을 가진 악기라 집에 징을 걸어두면 잡음 없이 늘 화평하다 하여 집집마다 하나씩은 있었다. 징은 노동과 놀이가 따로이지 않았던 시절 그만큼 백성들과 정서적으로 두텁고 가까웠다는 뜻이다.

함양징은 해방 이후 전국에서 제일 알아주는 징이었다 한다. 함양군에 따르면 함양 방짜 징(꽃부리징)의 명장 오덕수가 1947년 이곳 서상면 꽃부리(또는 꽃뿌리)에서 징점을 열고 1978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0여 년 동안 징을 제작했다.

당시 이곳 꽃부리는 물론 서하면 송계리, 봉전리, 안의면 석천리 등에 수십 채의 징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거창에서 ‘두부자공방’을 하고 있는 경남무형문화재 제14호 이용구 대정이(징 작업의 최고 기술자를 이르는 말)도 이곳 오덕수 명장으로부터 배웠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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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 서동진 기자

이곳 일대에서 징점이 사라지게 된 것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였다 한다. 당시 유신정권은 ‘농악놀이는 근대화에 맞지 않는 향락적인 문화’라며 규제를 했고, 놀이를 못하니 자연스레 징, 꽹과리 등 악기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 이곳 징점들이 없어진 이유다.

그런데 당시 첩첩골짜기 안에 어떻게 징점이 수십 채 들어섰을까. 여기에는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가 보태어진다. 징은 삼수가 합하는 곳에서 만들어야 하는데, 세 갈래 물소리가 서로 아우르며 하나의 물소리를 이루듯 징도 여러 악기를 아우르는 소리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 서상면 꽃부리는 남강 본류와 추상천, 부전계곡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합해지는 곳이다.

함양군은 지난해 이곳 꽃부리에다 함양징터를 본격적으로 복원하고 이어나갈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마을 수호신이 된 운곡리 은행나무 이야기

“내가 본 나무 중에 그만한 기 없더라. 운곡리에 있는데 여기서 가까우니 보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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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림동 계곡 차일암./권영란 기자

잠시 망설였다. 남강 본류가 아닌 데다 화림동 계곡에 좀 더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송계교 건너 5분만 가면 있다. 이 길이 백운산 삐삐재로 이어지는 길인데 산 너머가 백전면이제.”

은행나무는 서하면 운곡리 은행마을 한가운데 있었다. 마을 돌담길을 돌아가는데 순간 눈앞이 훤해지더니 모습을 드러냈다. 신령스럽기도 한 나무는 위풍당당했다. 밑동이 아주 굵고 동서남북 그늘진 데가 없으니 어디 흠 잡을 데 없이 잘 생겼다. 

“눈으로 그냥 보는 것보다 비교를 해야 알 수 있제. 내가 옆에 서보지.”

나무 옆에 선 아버지는 예닐곱 살 아이보다도 왜소해 보였다. 

은행나무는 높이 38m, 둘레 9m에 이르는데, 수령 800년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1999년 천연기념물 406호로 지정됐다. 나무가 거쳐 온 세월이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한 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수백 년을 넘어 1000년 가까이 산다는 건 100리 밖 움직임도 잡아내고 주변의 모든 기운을 좌지우지해 길흉을 불러일으킬 것 같았다. 

“이만하면 신령이라 할 수 있지. 마을은 강물 위에 뜬 배 형상이고 은행나무는 돛대라 없어서는 안 되는 셈이지.”

나무를 해하거나 예를 갖추지 않으면 마을에 불운 또는 재앙이 찾아든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정월 대보름이면 해마다 제를 지내고 있다. 

운곡마을은 양 옆으로 하천이 흐르는데 앞쪽으로는 월형재(삐삐재) 아래 서하저수지에서부터 흘러온 송계천, 뒤쪽으로는 갑두리봉 아래서 흘러온 샛강이다. 이 두 물줄기는 운곡리 해평마을 아래에서 한 물길을 이뤄 서하면소재지 앞 송계교에서 남강 본류와 합류한다.

은행나무를 보고 오는 길에 송계천 가에 오동나무 여러 그루를 봤다. 새파란 씨앗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꽈리 같은 주머니에서 씨앗이 여무는데 단단해진 뒤 흔들면 딸랑딸랑 소리가 난다.

“오동나무 열매는 달강달강거리고요, 큰애기 젖가슴은 봉긋봉긋하고요….” 

구전 민요 쯤인 듯한데 노래를 듣는 나도 노래를 부르는 아버지도 한참을 웃었다. 아버지의 노래라는 게 엉성하기도 한데다가 ‘큰애기 젖가슴은 봉긋봉긋하고요’가 아버지 입에서 흘러나왔다는 게 재미있었고, 어찌 이리 예쁜 노랫말이 있나 싶어 귀를 기울였다. 

“우리 어렸을 때 귀동냥한 건데 그 다음은 기억이 안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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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정은 눈앞의 비경을 바라보다 못해 아예 ‘물과 바위와 어울려 지내보자’ 한다. /권영란 기자

안의삼동 중 남강 본류를 낀 화림동 계곡

남강 물길은 천지소리를 아우르는 ‘꽃부리징’의 긴 울림을 담고 30리 밖 서하면 화림동으로 흐른다. 사람을 불러 모으는 땅, 역사에 기록할 만한 사람을 낳는, 특별한 땅이 있긴 하다. 남강 물길이 낳은 화림동을 두고 오가는 말이다.

화림동을 얘기하자면 먼저 ‘안의삼동’을 빠뜨릴 수 없다. 함양군지에 따르면 ‘안의삼동’은 옛 안의현에서 천하절경으로 손꼽은 화림동, 용추계곡의 심진동, 수승대가 있는 원학동을 일컫는다. 1914년 일제 행정 개편에 따라 화림동과 심진동은 함양군 안의면으로, 원학동은 거창군 위천면으로 속하게 된다. ‘안의삼동’ 중 남강 본류를 끼고 있는 곳은 화림동이다.

조선 말기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수많은 정자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7개의 정자가 있다. 문화재로 등록된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이 있고, 지은 지 수십 년이 채 되지 않는 영귀정, 경모정, 람천정이 있다. 여기에다 2003년 화재로 소실했지만 농월정터가 더한다.

“위에서부터 거슬러 내려오니 거연정부터 보겠군.”

화림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곳은 서하면 봉전리 앞이다.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봉전리와 다곡리를 잇는 봉전교로 들어서면 기암괴석과 소나무 몇 그루를 배경으로 강 한가운데 자리한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조선 중기 화림재 전시서(1601~?)가 은둔하던 곳을 1872년 후손이 재건한 거연정(경남 유형문화재 제433호)이다.

거연정은 눈앞의 비경을 바라보다 못해 아예 ‘물과 바위와 어울려 지내보자’ 한다. 대부분의 정자가 물가에 자리 잡고 한 발 떨어져 경치를 보는 것과는 달리 거연정은 물길이 두 갈래로 나뉘면서 만들어놓은 작은 섬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작은 구름다리가 있어 건너가지만 옛적에는 어찌 건넜는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구름다리 아래는 물길이 제법 깊은 소가 시퍼렇게 일렁이기 때문이다.

거연정 옆에는 일두 정여창(1450~1504)을 추모하는 군자정(경남문화재자료 제380호)이 있다. 군자정은 너럭바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얼핏 봐도 반듯하고 격이 느껴진다. 다만 가까이 식당과 회관이 들어서 있어 정자의 품위를 느낄 만한 여유로움이 없는 게 흠이다. 

7월 초 장맛비가 흩뿌리고 있는 가운데 계곡 아래서부터 비구름과 안개가 밀려오고 있었다.

봉전교 위에 서서 위로 물길을 거슬러 봐도, 아래로 물길이 흘러가는 곳을 내려다봐도 사방이 그저 운무에 떠오르는 산수화 한 폭이다. 강물과 제각각의 바위가 빚어놓은 경치 앞에서 정작 감탄 외에 달리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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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정은 일두 정여창을 추모하는 정자로 계곡을 보고 너럭바위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권영란 기자

거연정과 군자정을 둘러보고 다시 강을 따라 1km 정도 내려오면 서하면 황산리에 닿는다. 이곳에는 화림동 계곡에서 가장 사람들 발길이 들끓는다는 동호정(경남문화재자료 제381호)이 있다. 동호정은 임진란 때 선조를 업고 피신했다는 동호 장만리를 추모하는 정자이다. 때마침 동호정에는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 빗속에 드러난 산과 물과 바위를 보고 있다.

“저렇게 큰 너럭바위가 한 덩어리라니 눈으로 보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네요. ‘해를 가릴 만한 바위’라더니…. 넉넉하게 사람을 불러들이고 품어주는 것 같잖아요. 강물도 그렇고.”

정호용(67·충북 청주시) 씨는 비는 오고 관광버스 예약은 취소하기 그렇고, 머뭇대며 겨우 나선 걸음이었는데 오히려 맑은 날보다 운치는 더하다고 말했다.

남덕유산 쪽에서 흘러온 물은 우당탕, 우당탕 거리며 서둘러 화림동 계곡 아래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해를 가릴 만한 바위 ‘차일암’에는 아버지만 오르고 나는 오르지 못했다. 동호정 아래 바위에서 차일암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불어난 물에 거의 잠겨 있었다. 발을 옮기려니 어지럼증이 일었다. 두려움이다.

화림동 절경으로 이어지는 선비문화탐방로

“너는 건너지 말고 거기 있어라. 안되것다.”

가까이 다가서니 물의 기세가 보통 사나운 게 아닌지라 순간적으로 뒷걸음질을 친다. 하지만 장맛비 속에도 우비를 입고 길을 걷는 사람들이 가끔 눈에 띄었다. 

함양군은 2006년 계곡 이쪽과 저쪽을 이어, 약 10㎞가 되는 ‘선비문화탐방로’를 만들어 놓았다. 탐방로 전 구간은 안의면 강가 오리숲에서 거연정까지 이어지는 ‘누정산책로’라 말해도 좋을 만하다. 주말이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걷고 싶은 사람들이 이 길을 찾는다 한다. 

화림동 절경으로 이어지는 ‘선비문화탐방로’는 강둑을 따라 가다가 낮은 돌다리를 건너기도 하고, 나무데크를 걷다가 징검다리를 건너 강 한가운데 놓인 너럭바위에 앉아 가져온 도시락을 먹을 수도 있다. 농월정에서 동호정까지든 동호정에서 거연정까지든 어느 길에서든 산과 물과 바위가 빚어놓은 경치를 즐기기엔 아낌이 없다. 게다가 옛 사람들이 가졌던 여유와 멋까지 누릴 수 있다.

그런데 머릿속 생각은 슬며시 다른 곳으로 미친다.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화림동 계곡 정자에서 음풍농월 하고 세상을 논할 때 이들의 술과 밥과 옷은 누가 해다 바쳤을까 싶다. 

삼시 세 끼 밥은 안의현에서 짊어지고 와야 했을까, 아니면 여기 정자 옆에 솥을 걸고 나무를 했을까. 선비들이 탁족을 하고 바위 연못에 술잔을 띄어 돌리고 있을 때 따라온 종복들은 다행히 어디 숨어 멱이라도 감았을까.

“아버지, 저는 아무래도 전생에 어느 양반 집 종년이었나 봐예. 오월이나 춘심이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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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란 기자

“하하, 그리만 생각 할 게 뭐 있노? 대부분의 백성들은 타고난 대로 순응하며 살던 시절이인데. 되려 이곳으로 상전 종복으로 따라온 백성들은 힘든 논밭일 안 하고 좋았을지도.”

그럴까. 화림동 계곡 경치라면 종복들에게도 이고지고 걷는 길이 ‘즐거운 노역’이었을까. 아주 잠시 생각이 끓어 넘쳐, 화림동 계곡 선비문화에서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백성들의 삶을 미루어 짐작해본다. 

눈앞 물길은 기세도 좋게 서하교를 향해 흘러가고, 장맛비에 불어난 강물은 이미 누런 황토 빛이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안의현을 떠나며 애틋해하던 ‘저 녹수는’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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