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덕유산 골짝골짝에서 내려와 첫물길을 이루다

남강은 경남의 시원입니다. 온전히 경남의 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강을 중심으로 경남 사람들의 삶과 역사,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기획 ‘남강 오백리’를 시작합니다. 이 여정에는 때로는 환경운동가가, 때로는 향토역사학자가, 때로는 문화예술인이, 때로는 그저 남강을 걷고 싶은 사람들이 동행하기도 할 겁니다. 무엇보다 이번 여정의 가장 큰 길라잡이는 지리에 밝은 기자의 아버지(권태현·76)가 될 겁니다. 

본지에 앞으로 1년 동안 연재될 ‘남강 오백리’는 우리 나이로 쉰이 된 딸이 이제 여든을 앞둔 아버지와 함께 하는 길입니다. 강물이 이어지듯, 딸은 그저 아버지의 발자국을 뒤좇으며 남강을 따라 내려갈 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옛 사람들의 자취를 더듬어 이야기하고, 때로는 남강 비경에 감탄하는 아버지와 딸의 좌충우돌 남강기행기일 것도 같습니다. 

이번 ‘남강 오백리’는 K-water(한국수자원공사) 경남본부와 공동으로 기획한 것으로, 6월부터 경남도민일보 신문 지면에 격주 1회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월간 <피플파워>에 실리는 연재기사는 신문 기사를 바탕으로 하되, 남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아버지와 딸이 좌충우돌했던 뒷이야기까지 담아낼까 합니다. 

‘남강 오백리’를 통해 경남 주민의 삶 속에 남강이 한 발 바짝 당겨질 수 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경남의 강, 남강은 경남 서부지역 험준한 산세를 타고 흐르며 마을과 마을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 역사와 문화를 싹틔우고 형성할 수 있게 했다. 함양 상류지역 산비탈에 있는 삿갓배미나 하류지역 충적평야 지대에서나 평등하게 농업용수로서 생명수가 되었고, 때로는 험한 산길 대신 뱃길을 열어주고, 때로는 잠시 흐름을 천천히 하여 절대비경을 들춰 보여주며 사람을 쉬게 했다. 유속과 수량에 따라 지형과 유역 환경이 다르고 사람들의 삶과 생활 방식이 달랐다. 그리고 남강은 경남의 주요 식수원으로서 모자람 없이 그 역할을 해왔다.

▲남강유역도 /그래픽 서동진 기자

물길의 시작과 끝이 모두 경남이라

물길을 이뤄 흐르는 것을 내(川), 강(江)이라 한다. ‘하천(河川)’은 이 둘을 모두 포함하는 것은 물론 땅 밑으로 물길을 품은 유역도 통칭한다. 한국의 하천은 그 중요도에 따라 국가하천과 지방하천으로 나누어지는데, 현재 시·도별 국가하천은 84개, 지방하천은 3860여 개다. 이중 경남은 국가하천이 10개, 지방하천이 674개다. 

경남에 있는 국가하천은 제일 먼저 낙동강을 꼽고 다음으로 남강을 꼽는다. 낙동강은 길이 525km, 한국에서 첫 번째로 긴 강이다. 경남 동부지역은 낙동강권역 하류를 끼고 역사와 문화를 꽃피웠다. 

이에 비해 남강은 경남권역에 사는 사람이나 알까 모르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낙동강의 제1지류로 명시되면서 낙동강에 가려 주목도가 낮았음은 물론이고 남강 유역에 자리한 경남 서부 사람들의 삶과 문화마저도 조명되지 못했던 듯하다. 1990년대까지 경남 서부 사람들 사이에 회자하던 “낙동강만 강이가? 남강도 강이다”는 말은 소외된 강 ‘남강’을 내세우며 부산과 경남 동부 지역의 발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쇠락해져버린 서부지역 사람들의 정서가 반영된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되짚어보면 남강은 ‘경남의 강’으로서 첫째로 꼽기에 주저함이 없을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위로는 경남에서 가장 끝자락인 서북단, 함양군 서상면에서 시작해 동부 창녕지역까지 내륙을 가로지르는 유역면적 3467㎢, 길이 189km에 달하는 하천이기 때문이다. 남강은 그 시작과 끝을 온전히 경남 전역에 두고 있다. 

남강은 국가하천임과 동시에 지방하천이기도 하다. 이는 하나의 물길을 가진 하천이지만 일부 구간들은 지방하천으로 시·도가 관리하고 있다는 말이다. 남강 오백리 물길을 따라 가다보면 같은 물길을 두고 지역 별로 남계천, 경호강, 지수천, 정암진 등 이름을 달리하여 부르고 있음도 이런 까닭이다. 5개 지역에 닿아있으며 70여 개의 지류와 합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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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샘에서 남덕유산 정상을 향해 가다 해발 1400m 산마루에서 뒤를 돌아보면 남강 첫물길을 이루는 상남리 들판과 서상호가 눈에 들어온다. /권영란 기자

진주 남쪽 1리에 있어 남강이라

남강, 흔히들 ‘진주 남강’이라 말한다. 임진란 때 진주성 전투나 의기 논개의 충절이 남강에서 비롯해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남강’이라 하면 먼저 ‘진주’를 떠올리는 까닭이다. 이 둘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지 않는다. 또 역사적으로 남강 유역에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 혜택을 많이 받은 곳이 진주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옛 기록에 따르면 남강은 진주를 중심에 두고 붙여진 강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조선 성종 때 지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에 따르면 ‘남강: 진주 남쪽 1리에 있다’라 밝히고 있다. 또 조선 영조 때 이긍익이 지은 <연려신기술> 지리전고 편에 따르면 임진란을 거치면서 남강은 한때 ‘촉석강(矗石江)’으로 불리었으며,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영강(瀯江)’으로 불리었다는 것을 여러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남강’이라는 강 이름을 찾은 것은 조선 말 고산자의 <대동여지전도>에서다. 하지만 ‘진주 남강’은 남강 속의 남강으로, 총 길이 189Km중 40Km에 불과하다.

남강의 물줄기는 경남 서북쪽 끝에 있는 남덕유산(해발 1507m)에서 시작된다. 행정지역으로는 경남 함양군 서상면에 속한다. 이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서상면소재지 방지교에서부터 국가하천 남강을 이루어 거창 백운산(해발 904m)에서 발원한 위천을 만나고, 남원 운봉 여원재를 발원으로 둔 엄천강을 만나 산청군 경계에서 남강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리고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을 진주시 진양호에서 만나 의령 함안을 흘러 마침내 창녕군 남지에서 낙동강에 닿는다. 

그러고 보면 남덕유산과 지리산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물길을 다 모은 것이 남강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남강물은 남덕유, 지리산 두 명산에서 나는 수백 가지 약초 뿌리들이 흘러내려온 것”이라고도 말한다. 이는 남강 물을 식수로, 생활용수로 사용하니 따로 보약이 필요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남강 유역에서 터 잡고 사는 것을 천복으로 알라는 뜻으로도 읽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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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덕유산 영각탐방지원센터에서 참샘으로 오르는 길에는 가는 물줄기가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했다. 계곡은 대체로 물길보다는 너덜지대가 쭉 이어졌다./권영란 기자

발원지가 어디냐고 따져 묻는다면

이쯤에서, 그렇다면 남강 발원지는 어디일까 궁금해진다. 남강 물줄기가 맨 처음 시작되는 곳 말이다. 경상남도에서 발간한 도지에 따르면 덕유산 남쪽 준봉인 남덕유산에 그 발원을 두고 있다.

하지만 현재 세간에 알려진 곳은 두 곳이라 의아심이 든다. 두 곳이 전혀 다른 방향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한 곳은 남덕유산 은재골 참샘이다. 

남덕유산을 오르는 길목 참깨밭에서 만난 최업동(68·상남리 조산마을) 아재의 말이다. "남강 발원지인지는 먼지는 잘 모리고 옛날에사 은재골을 집 마당 들락거리듯 올라댕겼제. 은재골 거기 옆으로 새미가 있기는 있제."

남덕유산 참샘(해발 1350m)은 경상남도 덕유교육원과 천년고찰 영각사 사이로 난 은재골을 타고 정상 아래까지 오르면 된다. 이곳 참샘에는 한국수자원공사 남강댐관리단과 국립공원관리공단 덕유산사무소가 공동으로 세운 ‘남강 발원지 참샘’으로 표기한 안내판이 있다. 

또 다른 발원지라 알려진 한 곳은 지리산 천왕봉 아래 천왕샘(해발 1850m)이다. 천왕샘에도 한국수자원공사 남강댐관리단과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사무소에서 공동으로 세운 ‘남강 발원지 천왕샘’으로 표기한 안내판이 있다. 이 두 곳의 표지판은 모두 2010년 10월에 세워진 것이다. 표지판의 세부 내용은 둘 다 동일하다. 

어찌된 일일까. 분명, 발원지는 하구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는 곳을 말한다. 한국하천정보지도를 살펴보면 누가 봐도 발원지가 남덕유산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수소문해봤으나 관계자들도 모르고 있어 어찌된 연유인지를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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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일반 사람들은 ‘하구로부터 가장 먼 곳’을 따지기보다 ‘물줄기가 처음 시작되는 곳’만을 강조하다보니 여러 갈래 물줄기 중 지리산 쪽 시작은 천왕샘이고, 남덕유산 쪽 시작은 참샘이라 두 곳에다 발원지 안내판을 세우게 된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혹자는 산청·진주 사람들이 남강 발원지를 지리산 천왕봉으로 둬야 훨씬 상징적 의미가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바람에 아마 억지로 됐을 가능성도 있다는 추측을 덧붙인다. 

그런데 여기에다 앞서 얘기한 두 곳 외에 또 다른 한 곳이 거론되기도 한다. 발원지가 남덕유산이지만 은재골 참샘이 아니라 초입에 있는 경상남도 덕유교육원 서쪽 골짜기로 오르는 절골 끄트머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절골은 오랫동안 드나들지 않아 옛길은 사라졌고 발원지로 추정되는 곳을 찾아 오르는 것은 힘들었다.

최성용(74·상남리 식송마을) 아재는 남덕유산은 물이 귀한 산이라 제대로 계곡을 만들지도 못하거니와 물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다. 

“물길이라고 허는 게 영각사 밑에서 제우시 보이구만. 우에는 물길 같은 건 없고, 남덕유산 골짝골짝… 절골, 상골, 은재골, 동티막골, 남령에서 물이 다 모여 들어 동네 개울이 된 거제. 작은 물길들이 전부 모여가꼬 여게 상남 골짝물이 된기라. 물길이 어데 한 곳만 발원지라고 헐 수 있나. 산 전체가 발원지라 할 수 있것제.”

남덕유산 자락 상남리 조산, 신기, 식송 세 마을 앞을 흐르는 가는 물길을 두고 주민들은 ‘골짝물’ ‘산골물’이라 부르고 있다. 

남강 오백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남강은 남덕유산 정상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을 모조리 쥐어짜듯이 한데 모아, 상남리에서 첫물길을 이루었다. 

참샘을 찾아 오르다

남덕유산은 해발 1507m이다. 남강 발원지라 알려진 참샘은 1450m 지점에 있다 했다. 어떻게 오를까, 출발 전부터 걱정이 앞서 여기저기에다 “험하냐?” “올라갈 만하냐?” 기회만 닿으면 물어봤던 게 사실이다. 

2014년 6월 초, 남강 발원지를 답사하기 위해 남덕유산 영각탐방지원센터 앞에 모였다. 마산에서는 2시간, 진주에서는 1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거리다. 답사 일행은 기자와 본지 허귀용 기자, 진주환경운동연합 윤병렬·서성연 회원, 그리고 국립공원 덕유산 남덕유분소 영각탐방지원센터 직원 김준연 씨가 함께 했다. 

발원지를 찾아가는 길에는 아버지와 동행하지 않았다. 평탄한 길이 아닌 산길을 오르는 건 연로한 아버지로선 무리다 싶었다. 영각탐방지원센터에서 치고 올라가는 길은 남덕유산을 오르는 가장 짧은 구간이지만 그만큼 경사도가 높아 올라가기가 수월치 않다는 게 여러 사람의 말이었다. 하지만 이리저리 듣고 미리 앞서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초입은 제법 넓은 흙길에다 서늘한 그늘이 이어지고 있어 수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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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샘에는 한국수자원공사 남강댐관리단과 국립공원관리공단 덕유산사무소가 공동으로 세운 ‘남강 발원지 참샘’으로 표기한 안내판이 있다./권영란 기자

정상을 향해 오르는 길에는 500미터 간격으로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계곡에서는 수량이 적지만 바위틈으로 물길이 이어지고 있는 게 보였다. 초입부터 첫 이정표가 나올 때까지는 비교적 완만한 경사여서 오르기가 힘들지는 않다. ‘이 정도라면야’라는 자신감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이 구간을 지나니 경사가 급해진다.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지만 다행히 다들 걸음을 서두르지는 않았다. 꽃은 졌지만 나무 둥치와 잎을 보고, 들려오는 새소리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얘기하고…아무도 서두르지 않으니 그야말로 쉬엄쉬엄 오르는 걸음이었다. 스스로도 ‘걷다보면 닿아있겠지’라 생각했다. 그리 맘먹으니 제법 산이 눈 안에 들어왔다. 주변 꽃과 나무가 눈에 들어오고, 새소리가 들렸다.

“이게 예전에 숯막터입니다. 제법 많이 남아있지요.”

탐방지원센터 김준영 씨가 지팡이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둥글게 쌓은 야트막한 돌담이 있다. 봉우리를 향해 오르는 길에는 군데군데 숯가마터가 있었다. 그대로 흔적이 남아있어 한눈에도 예전에는 숯막골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직도 쓸 수 있겠다 싶은 정도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게 있는가하면 무너져 내려 겨우 가마터였던가 싶은 것도 있다. 

“이곳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초입에 있는 상남리 조산마을 사람들이 대부분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다더군요.” 

산을 오르다보면 고로쇠 수액을 뽑고 난 뒤 나무 밑동에 달았던 플라스틱 호스며 긴 대롱이 아직도 그대로 꽂혀있는 게 눈에 띈다. 산 아래 마을 주민들이 초봄에 수액을 채취하고 미처 거두지 못한 것이리라. 

어느 순간 계곡에는 물기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바위들로 이어진 너덜지대일 뿐이다. 그런데 물소리는 들린다. 

“신기하지요. 물기라고는 없는데 물소리는 들리잖아요.”

김준연 씨는 땅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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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덕유산은 물을 품고 있지만 쉽사리 물길을 드러내 보여주지는 않았다. 계곡의 너덜지대 아래로 물이 흐르고 발아래 땅속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아래로 아래로 흐르고 있을 물길이 그저 짐작될 뿐이었다. 

등산로를 사이에 두고 계곡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다가 간혹 바위틈 샘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대부분 물길이 없는 마른 계곡이 계속 이어질 뿐이었다.

그런데도 정상 부근에 일 년 내내 솟는 샘이 있다하니 경외심이 생기며 저절로 기대가 되었다. 참샘까지는 아직이었다.

다양한 식생, ‘살아있는 자연’에서 물길을 이루고

해발이 높아질수록 수풀은 연두 빛이다. 6월로 접어들었는데도 새 잎을 달고 차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이다. 남덕유산의 시간 속도는 남강 중류지역인 진주보다 한 달 정도 더 늦은 듯했다. 산 아래에서부터 500미터 쯤 오르니 밑동이 꽤 굵은 철쭉나무가 아직 꽃잎을 달고 있다. 붉은 빛이 감도는 흰꽃은 처연함이 더욱 큰 듯하다. 

톱아보며 오르다가 가픈 숨을 내쉬며 눈을 살짝 드니 다람쥐가 잽싸게 길을 가로질러 나무를 타고 오른다. 어디선가 휘파람새가 울고 흰배찌빠귀, 두견이, 벙어리뻐꾸기, 검은등뻐꾸기, 어치가 울고 간다. 

“벙어리 뻐꾸기는 제대로 울지도 못해. 으, 으허, 이런 식이라니까. 검은등뻐꾸기는 스님들이 홀딱벗고새라 한다네. 적막한 절간에서 새 울음이 들리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호따버고, 호딱벗고, 홀딱벗고, 이런 식으로 들린대.”

일행 중 윤병렬 씨의 이야기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물론 세간에 떠도는 것으로 웃자고 나온 이야기겠지만, 다들 조용히 하여 귀를 기울려 새 울음을 듣기도 했다. 여러 새 울음 중 ‘호딱벗고’로 들리는 새 울음을 찾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 옛적 붙여진 풀이름 새이름을 가만히 새겨보면 어찌 그리 딱 떨어지는지 신통방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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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만난 다람쥐./사진 이준연

6월 망종 무렵인데 그늘진 숲에는 산목련이라 일컫는 흰 함박꽃이 아직 피어있다. 연초록의 수풀 속에서 크고 함초롬한 자태가 금방 눈길을 잡는다.

참샘으로 오르는 길에는 목본으로는 산딸나무, 층층나무, 산벚나무, 산괴불나무, 붉은 병꽃나무, 산뽕나무, 말발돌리, 국수나무, 쪽동백나무, 거제수나무, 신갈나무, 아그배나무, 노각나무, 마가목, 흰참꽃나무, 박쥐나무, 노린재나무 등이 차례로 보인다. 정상쯤에서는 구상나무도 눈에 들어온다. 

초본으로는 수리취, 은분취, 관중, 은꿩의 다리, 노루발풀, 백미꽃, 송이풀, 바위떡풀, 덩굴꽃마리, 풀솜대, 노루오줌, 돌양지꽃이 때로는 발 아래서 때로는 바로 눈앞에서 불쑥불쑥 들어온다. 바위나 풀숲에는 간 밤 바람에 진 쪽동백꽃잎이 하얗게 깔려있어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남덕유산은 1975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40년 동안 훼손이 덜 한 탓인지 다양한 식생을 볼 수 있다. 남덕유산 참샘 주변의 식생 분포가 궁금해서 동행했던 윤병렬·서성연(48·진주환경운동연합 회원) 씨는 참샘으로 오르는 길에 만난 목본이나 초본 등을 가리키며 일일이 알려주었다. 윤 씨는 “국립공원이 되면서 훼손이 덜해 다양한 식생이 분포되어 있고, 잘 보존돼 있는 편”이라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일행인 서 씨도 꽃 정상 부근에서 큰앵초 군락과 처녀치마를 보았다며 “풀꽃 보러 다니면서 처음 본 거다”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마침내 남강 발원지, 남덕유산 참샘

남덕유산 영각재(해발 1350m)에 닿았다. 탐방로를 벗어나 어지럽게 웃자란 산죽과 수리취를 헤치고 200미터를 나아가니 눈앞이 훤해지며 하늘이 보였다. 수풀에 둥글게 둘러싸인 예닐곱 평의 평평한 터가 나왔다. 고요했다. 어디선가 휘파람새가 투명한 소리로 길게 울었다. 

남강의 발원지로 가장 근접한 참샘은 기대하던 샘의 형태는 아니었다. 가로 30센티미터 세로 40센티미터 높이 30센티미터 정도로, 위에는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덮개를 씌어두었다. 야트막한 둘레 입석에는 ‘1995년 6월 6일 진주 멋거리산악회’라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남강 발원지를 보존코자 ‘눈 밝은’ 산악회에서 이를 알고 정비한 듯하다.

바닥에는 자잘한 조약돌이 깔려있고 물은 더없이 맑고 찰랑거렸다. 대롱을 연결한 곳에서는 계속해서 물이 솟아 흘러들고 아래 대롱으로 물이 흘러나갔다. 물맛은 차갑고 달착지근하고…어찌 말할 수 없었다. 

주변에는 이곳이 ‘남강 발원지 참샘’임을 밝히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2005년 10월 한국수자원공사 남강댐 관리공단과 국립공원관리공단 덕유산관리소에서 세운 것이다. 

“20년 전에 정비를 해 놓아서 이만큼 보존할 수도 있었겠지요. 참 다행이에요. 근데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인공적으로 정비를 해놓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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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덕유산 참샘. 해발 1350m에 위치해 일 년 열두 달 늘 샘물이 솟고 있다. 1995년 진주에 있는 산악회에서 발원지 보존을 위해 정비해놓은 모습이다./권영란 기자

서성연(41·진주환경운동연합 회원) 씨는 진주시 명석면에서 태어나 남강을 끼고 성장했고 지금도 매일 남강을 보며 출퇴근을 한다. 남강 발원지라 해서 신비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치 ‘배수구’처럼 정비해놓은 것이 못내 아쉽다는 것이다.

참샘은 여름에는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 솟고 겨울에는 언 몸을 녹이기에 충분히 따듯한 물이 솟아 예전부터 산꾼들이나 화전민들이 이곳에서 목을 축이고 물을 받아갔다고 한다. 또 참샘은 일 년 열두 달 가뭄이나 우기와 상관없이 늘 일정 양을 유지하고 있어 이곳 상남리 주민들조차도 신기해하고 있다. 

“동네 골짝물도 바짝 마르는 갈수기에 참새미 물은 멀쩡해예. 항상 철철 솟아나니, 그기 참 희안헌 일이지예.” 

참샘은 산꾼이나 화전민의 식수원

해발 1350m에 있는 참샘은 산꾼이나 화전민의 식수원이었다. 

산이 인근 주민들을 먹여 살리던 시절이었다. 산 아래 첫동네에는 부쳐먹을 논밭이 적었다. 주민들 대부분은 산을 집 마당처럼 다녀야 했다. 허리를 펴지 못하는 노인들은 기어서라도 산에 올라 칡뿌리 하나라도 캐어 와야 했던 시절이었다. 산에는 온갖 약초와 나물들이 사계절 내내 자랐다.

“젊었을 때는 더덕 캐고 오미자 따느라고 열댓명 씩 짝을 지어 다녔제. 처니들은 나물 캐고 총각들은 나무하고 숯막골 일하러 댕기고…. 수풀이 우거지고 골이 험해서 혼자 다니모는 위험했다아이가. 그러다가 참새미 근처에 앉아 물배를 채우기도 했제. 봄이면 나물 뜯어 먹기도 하고. 그때는 된장만 한 숟가락 퍼가모는 됏으니께.” 

최업동(68·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조산마을) 아재는 없던 시절에 산이 우릴 먹여 살렸다며 참새미터는 다리쉼을 할 수 있는 쉼터였다고 말했다. 온종일 산을 헤매다가 목을 축이던 곳이 참샘이었다고 말했다. 

<이 기획은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한국수자원공사가 후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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