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소달구지, 불러만 주시면 어디든 달려갑니다!"

“세월호 촛불문화제에 매주 나와서 문화 공연하시는 주는 분들이 있는데, 〈피플파워〉에서 인터뷰해보면 어떨까요? 로템 통기타 동아리 ‘소달구지’입니다.”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이은주 활동가에게 <피플파워> 인터뷰이(인터뷰에 응하는 사람·interviewee)를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단박에 소달구지 회장 양규석(53) 씨를 소개해줬다.

지난 7월 10일 오전 창원시 의창구 창원대로(대원동 85)에 있는 현대로템 공장에서 양 회장을 만났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견해부터 노동조합의 지역개입 전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소달구지. 이름이 참 정겹습니다. 소달구지 소개 좀 부탁합니다.

“7년 전 노동조합 문화패에서 통기타 기초반을 모집했습니다. 지금까지 총 9기까지 배출했는데 수강한 회원들이 모여 소달구지 통기타 클럽을 결성했지요. 소달구지란 ‘더디게 가더라고 함께 간다’는 뜻이고요. 힘들면 쉬었다가 가는 그런 편안한 소달구지입니다. 회원은 모두 37명입니다. 소달구지 안에는 ‘민수팀’, ‘강근팀’, ‘기원팀’, ‘형권팀’ 등 나름대로 이름을 붙인 7개 팀이 있습니다. 지역주민을 위한 통기타 강습을 트리비앙 아파트에서 하고요. 대원동에서는 통기타 기초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성주동 지역아동센터에서 10월의 마지막 날 통기타 봉사도 합니다. 합천 평화의 집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모두 열여섯 번 ‘작은 음악회’도 열었습니다. 아무튼, 어디서든지 저희 소달구지를 불러만 주시면 달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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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규석 '소달구지' 통키타 클럽 회장./김구연 기자

7년 전 결성…‘지역과 함께 성장하는 클럽’

-소달구지 멤버들과 정우상가에서 매주 수요일 저녁에 열리는 세월호 추모 창원 촛불문화제 참가한다고 들었습니다. 언제부터 나가고 있습니까.

“지난 6월 4일부터 나가고 있습니다. 잔업 때문에 저희는 저녁 8시께 도착해서 통기타와 추모노래를 4곡 정도 부릅니다. 매주 점심때 30~40분씩 시간을 쪼개서 연습하고 있습니다. 같이 가는 멤버들도 보람을 느끼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며 크게 공감합니다. 어제(9일)는 태풍 ‘너구리’ 때문에 못 갔네요.”

-회장님께 세월호 사건은 무엇입니까.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초동대응을 잘했으면 어린 아이들을 비롯해 수많은 생명을 모두 구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현재 정치하는 사람들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고가 났으면 빨리 수습을 해야 하는데,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능력 없는 사람들이 그런 자리에 있다 보니 대형 참사를 일으키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빨리 수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앞에서 사진이나 찍고 생색내기에 바쁜 걸 보고는 정말 기가 찼습니다. 정경유착의 부조리도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시신 수습이라도 제대로 해야 하는데, 한심한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어른들이 정치인들을 잘 뽑았어야 했는데, 우리 아이들에게 정말 부끄럽습니다. 정부와 언론들도 정확한 대응과 보도를 하지 않아서 유가족들을 두 번 죽이는 꼴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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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규석 '소달구지' 통키타 클럽 회장./김구연 기자

-고향은 어디신지요? 어떤 계기로 창원에 오시게 됐나요.

“고향은 사천시 곤명면 초량입니다. 곤명중학교와 진주대동공고를 졸업하고, 부산 경남공전(현재 부산 경남정보대) 야간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1학년 때 부마사태(부산·마산 민주항쟁)가 일어나서 더 다니지 못하고 군대에 갔습니다. 해병대 458기입니다. 전차 조종수였습니다. 로템에서 낸 전차 조종수 모집공고를 보고 시험을 쳤지요. 1985년 12월 9일 입사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전차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회사 풍경은 어떠했나요.

“입사 초기 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때는 믿기지 않겠지만, 회사 정문 앞에서 두발 단속도 하고, 관리직 직원들한테 조인트도 예사로 까이고 그랬어요. 머리카락 길이가 길면 돌아가서 깎고 오고, 그랬어요. 회사 관리직들이 용접봉으로 막 찌르질 않나. 아이고, 정말 그땐 난리도 아니었죠. 군대에 다시 간 기분이랄까요. 저는 노동자들에 대한 사측의 폭력적인 관리가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의 주요한 배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자 대투쟁 때 저도 얼떨결(!)에 앞에 서기도 됐어요. 정방대, 규율부장을 했습니다. 아마도 해병대 출신이다 보니 그리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88년부터는 대의원도 하고 교육부장도 했습니다. 조합원들이 겁이 나서 투쟁에 잘 못 나오니까 연극을 만들어서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딱딱하게 교육하기보다는 연극을 통해서 당시 이슈가 됐던 노조위원장 직권조인의 문제 등을 건드리면서 조합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줬죠.”

-어릴 적에 꿈은.

“과학자나 대통령 같은 거도 아니고, 그냥 평범하게 사는 거였습니다. 그냥 잘 한번 살아보자였습니다.”

-노조 활동하셨으면 조합원들과 자연스럽게 술자리도 많았을 텐데, 술을 좋아하시는지요.

“마음 맞는 사람이 있다면 소주 2병 정도는 마실 수 있습니다. 80~90년대 공권력하고 싸울 때 솔직히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술 마시면서 서로 의리를 지키고, 토론도 하고 그랬죠. 그때 술이 엄청 늘었어요. 5년 전에 통풍이 와서 요즘은 그리 많이 마시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약을 먹으니까 괜찮더라고요. 하루 마시면 하루 쉬는 ‘퐁당퐁당 전법’으로 마십니다. 생선 종류 음식을 좋아합니다. 회, 문어, 매운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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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하는 양규석 '소달구지' 통키타 클럽 회장(오른쪽)./김구연 기자

-감명을 준 인물이 있다면.

“이순신 장군요. 이순신 장군하면 유비무환(有備無患: 평소에 준비가 철저하면 후에 근심이 없음), 외유내강(外柔內剛: 겉으로 보기에는 부드러우나 마음속은 꿋꿋하고 굳세다는 것), 허허실실(虛虛實實: 허(虛)를 찌르고 실(實)을 꾀하는 계책(計策)으로 싸우는 모양(模樣)을 이르는 말)의 대표인물 아니겠습니까. 이순신 장군이 백전백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현지 주민들 이야기를 잘 수렴했기 때문이지요. 노동운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싸우면 절대로 지면 안 됩니다. 1992년 8월 임단협 때 경찰 투입이 임박했었는데, 그때 대부분 간부가 도망쳤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다가, 가족들을 공장으로 오게 하자는 결정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니 경찰도 쉽게 못 치고 들어오더라고요. 그때 우리 노동운동이 가족과 주민들에게 공감을 얻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지금처럼 임금협상에만, 돈에만 매달리면 노조에 대한 여론은 계속 악화할 것입니다. 시민과 가족들과 함께해야 대의명분이 서게 됩니다.”

-로템은 노동조합이 잘 돌아가나요? 로템 상황은 어떤가요? 로템 정규직 노동자 평균 나이가 상당히 많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전국금속노조 로템지회는 잘 돌아가는 편입니다. 집회를 열면 조합원들도 잘 참석하고요. 하지만, 더 발전이 안 되는 것 같아요. 대의명분 있는 사업을 지역에서 더 많이 벌였으면 합니다. 회사는 정규직이 정년퇴임을 하는 자리에 하청이나 계약직, 촉탁직 비정규직을 채워서 공장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나마 가뭄에 콩이 나듯 신입사원을 모집하는데, 합격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지요. 참 큰일입니다. 괜찮은 일자리가 자꾸 없어지고 하청화 되는데, 이게 사회적으로 전혀 도움이 안 되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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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규석 '소달구지' 통키타 클럽 회장./김구연 기자

“노동운동, 지역민과 폭넓은 교류와 연대 필요”

-노조 활성화를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노조가 임금협상에만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조합원과 함께 호흡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 파고들어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해결하면서 동력을 얻어야 합니다. 이런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사업을 집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조합원 가족과 시민이 함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 신선합니다. 임단협 시기지만, 농번기 때 일과 마치고 농촌일손도 돕고, 의식이 깨어 있는 간부라면 아침에 하천 청소도 할 수 있습니다. 아침 선전전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시민들에게 감동을 주려면 빗자루를 들고 개울도 치우고 이런 식으로 사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형 유통업체가 시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제품으로 폭리를 취한다면 노조에서 적극 개입해야 합니다. 그래야 노조가 지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원산 총파업(1929년 1월부터 4월 6일까지 4개월간에 걸쳐 원산의 전 노동자가 파업을 단행한 사건)이 그냥 일어난 게 아닙니다. 바로 미용실, 이발사처럼 평범한 시민들과 함께했기 때문에 대의명분을 얻었을 수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이 계속 돈만 달라고 하면 권력기관이나 사장들이 얼마나 우습게 보겠습니까. 직장의 민주화, 가정의 민주화, 사회 민주화에 노조가 앞장서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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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규석 '소달구지' 통키타 클럽 회장./김구연 기자

-앞으로 계획이나 꿈은.

“회사를 다니고 있지만, 제가 봉사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달려가서 봉사를 하고 싶습니다. 지역에서 하는 일 가운데 올바른 일이라면 가서 어떻게든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아침 아이들 등·하굣길 교통안전 봉사부터 주변에 어려운 이웃이 있다면 도시락 배달도 하고 싶습니다. 먹고 노는 일만 아니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우리 사는 세상을 더 밝고 아름답게 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이야기는.

“경남도민일보가 더 좋은 언론이 되어서 지역에 모범적인 사례들을 많이 발굴해 기사화해 주시기 바랍니다. 진실하고 밝음을 주도하는 신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건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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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규석 '소달구지' 통키타 클럽 회장./김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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