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카라, 레이크사이드 거리. 슈퍼에서 과자를 하나 샀다. 그날 점심이었다. 길가 큰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과자는 제법 딱딱해서 씹을 때마다 우두둑 소리를 냈다. 그때 부랑자 할아버지 한 분이 슬금슬금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나마스테,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나도 두 손을 모으고 나마스테로 답했다. 그리고는 내 옆자리를 권했다. 그렇게 우리는 나란히 앉아 과자를 나눠 먹었다. 그도 나도 아무 말이 없었다. 뜨거운 한낮이었고, 거리는 왁자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카트만두의 여행자 거리, 타멜은 아직 어두웠다. 새벽길을 나섰다. 복잡한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 도착한 곳은 투어리스트 버스 터미널. 포카라로 가기 위해서였다. 7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카트만두 시내를 벗어난 버스가 서서히 산길로 접어들었다. 문득 내다본 창밖, 차바퀴 바로 옆으로 낭떠러지가 아찔했다. 바퀴와 낭떠러지의 간격이 좁아질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리막길에서는 정체가 심했다. 2차선 도로라고는 하지만 산길은 위태하게 좁았다. 사고라도 나면 꼼짝없이 길 위에 갇히는 것이다. 정체가 계속되자 운전기사는 아예 시동을 꺼버렸다.

설산이 보이는 포카라 시내./이서후 기자

산길 한가운데 차들은 긴 행렬을 이룬 채 아침나절의 고요 속으로 잠겨 들었다. 정지된 듯한 그 시간이 불편했는지 서양인 사내 하나가 갑자기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는 나를 보며 뭐 이따위 경우가 있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저 미소를 한 번 지어 주고는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길가에는 흙먼지를 두껍게 덮어쓴 풀잎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정체는 한 시간 후에 풀렸다. 산속 길을 달리면서 버스는 자주 아무것도 없는 곳에 정차했다. 그러면 갑자기 산 위에서 가방을 멘 아이들이, 짐을 든 노인들이,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젊은 아낙들이 내려와 버스를 탔다. 도대체 어디에 마을이 있는 걸까.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집 한 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저 멀리 굽이굽이 산길을 걸어 올라가는 여인의 빨간 옷과 푸른 초목의 대비가 너무나 선연해서 잠시 넋을 잃고 바라봤을 뿐이다.

포카라에 가까웠다 싶을 때 푸른 산 너머, 하늘에서 갑자기 안나푸르나의 봉우리 하나가 나타났다. 꼭 하늘에서 나타났다고 표현해야 한다. 옅은 구름 탓에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네팔인들은 히말라야를 신의 집이라고 부른다. 설산은 그렇게 신처럼 내게 모습을 드러냈다.

포카라 버스 터미널은 시골처럼 소박하고 정겨웠다. 포카라는 네팔의 대표적인 휴양도시다. 도시는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특히나 페와 호수 주변이 그랬다. 호수 주변으로 레이크사이드(Lakeside)라고 불리는 거리가 있다. 항상 외국인 관광객들로 가득한 곳이다. 안나푸르나를 오르려는 사람들은 주로 이곳에서 정보를 얻고 장비를 구한다. 특히 요즘에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는단다. 그래서 그런지 한글 간판을 단 식당이 유독 눈에 많이 띄었다. 나는 그중 한 곳에서 트래킹 정보를 얻기로 했다.

짜이(인도식 밀크티) 노점상, 카트만두./이서후 기자

젊은 주인 내외는 친절했다. 둘 다 한국 사람이었다. 이곳까지 와서 식당을 하는 사연은 묻지 않았다. 여행이란 자신이 태어나야 할 곳에서 태어나지 못한 이들이 자신이 태어나야 할 곳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했다. 젊은 주인 내외는 이곳에서 자신들만의 장소를 찾은 것일까.

나는 그들에게 안나푸르나를 걸어서 한 바퀴 돌 거라고 말했다. 무뚝뚝한 표정의 남편이 주의 사항을 일러줬다. 해발 3000m인 ‘마낭’만 지나도 산소가 줄어들어 숨쉬기가 쉽지 않아요. 5400m 토롱 라를 넘기 전에는 고소 증세가 아주 심할 거예요. 잘 먹지도 못하고 잠도 오지 않을 거예요. 그럴 때는 억지로 자려고 하지 말고 열심히 숨만 쉬세요. 돈 아낄 생각 말고 맘껏 사 드세요. 에너지를 많이 섭취해야 하거든요. 설명을 들은 후 필요한 장비를 사러 거리로 나섰다.

‘빈’과 ‘영’을 만난 게 이즈음이었다. 등산용품점으로 가고 있는데 누군가 내 옆으로 확 다가서더니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니 그 아이였다. 카트만두 공항에서 만나 나를 보나나트로 데려다 주고 사라진 한국 여자아이. 그 아이 이름은 ‘영’이라고 했다. 그 아이도 내가 금방 있다가 나온 한국 식당을 찾고 있었다.

카트만두에서 포카라 가는 길./이서후 기자

‘빈’이라는 한국 남성도 이 한국 식당 앞에서 만났다. 금방 택시에서 내린 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지저분하고 어리바리, 이게 빈의 첫인상이다. 35살인 그는 학원 강사 일을 그만두고 막 세계여행을 나선 참이었다. 이제 겨우 여행 3주차. 이런저런 생활용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는 누가 봐도 초보인 장기 여행자였다.

우선 두 녀석을 데리고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각자 볼 일을 보고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 오후 7시, 길가 큰 나무 아래. 이렇게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그렇게 정하고 보니 문득 기분이 묘했다. 낯선 여행지에서 약속이 생기는 것만큼이나 설레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식당 주인이 소개해 준 등산용품 가게에 들렀다. 우선 영하 20도에서도 견디는 겨울용 침낭을 빌렸다. 카트만두나 포카라는 완연한 봄 날씨지만 히말라야에서는 3000m 이상만 올라가도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진다고 했다. 4000m 이상은 영하 20도까지 각오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특별히 두꺼운 오리털 재킷도 샀다. 유명한 상표의 모조품인데 우리 돈으로 5만 원 정도 들었다. 품질은 괜찮아 보였다. 뜨거운 물을 담을 날진물통과 찬바람을 견딜 방한모자도 샀다.

설산이 보이는 페와 호수, 포카라./이서후 기자

이날 저녁, 나와 빈, 영은 호숫가에 자리 잡은 꽤 괜찮은 식당에 들어갔다. 2층 옥상 탁 트인 공간에 테이블들이 놓여 있고 그 옆으로 모닥불이 타고 있었다. 아늑한 분위기였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종업원이 테이블 위에 촛불을 밝혔다. 우리는 음식과 맥주를 시켰다. 막 인도 여행을 끝내고 왔다는 영에게 물었다.

“어디가 좋았어?”
“저는 빨래가 잘 마르는 곳이 좋아요. 빳빳하게 마른 옷을 처음 입을 때 그 기분이 정말 좋거든요.”

장소를 묻는 말이었지만 대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그 느낌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빈 역시 막 인도를 2주 동안 돌아다니다가 네팔로 왔다. 한 달 정도 머물다가 다시 인도로 갈 것이라고 했다. 아래층 무대에서 라이브 가수의 노래가 시작되고 있었다. 애잔한 노래 한 소절이 낯선 도시의 밤하늘로 울려 퍼졌다.

맥주잔을 앞에 두고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각기 다른 곳에서 출발해 여기서 우연히 만난 사이였다. 내일이면 다시 각자 다른 곳으로 출발할 것이었다. 그렇게 또 각자 나름의 생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이날 밤 빈은 나를 따라 가기로 맘을 정했다.

레이크 사이드 거리, 포카라./이서후 기자

다음날 새벽, 포카라 버스 터미널. 빈과 나는 베시사하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나푸르나를 한 바퀴 도는 코스가 그곳에서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터미널에서 어제 한국 식당에서 잠시 보았던 한국 여자 셋을 다시 만났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코스를 가는 길이었다.

시골길을 5시간 달려 베시사하르에 닿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다시 지프로 갈아탔다. 그곳의 산 속 마을에서는 지프가 유일한 대중교통 수단이었다. 앞자리에는 그곳 주민들이 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뒷자리에 마주 앉은 자세로 구겨졌다. 산길 주변으로 수력 발전소 공사가 한창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프를 타고 이 공사 구간을 건너뛰고 다음 마을부터 걷기 시작할 계획이었다.

공사 현장이 된 계곡은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다. 이 아름다운 곳에 이 무슨 잔인한 짓인가 하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이런 산중에까지 물질문명이 들어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한국 식당에 있는 무료 등산 스틱, 포카라./이서후 기자

우리는 ‘자가트’란 마을에서 내렸다. 수직으로 아찔한 절벽 아래 소소하게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하루를 보낸 후 본격적으로 트래킹을 시작할 것이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 조그만 마을은 한때 티베트와 인도 사이 소금 무역으로 번창했던 곳이라고 했다. 숙소 주인아주머니가 저녁에 마을에 조그만 축제가 벌어질 거니 구경을 가보라고 했다. 과연 어느 집 마당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구릉족이라고 했다. 히말라야에 사는 여러 소수 민족 중 하나다.

축제는 남성들이 주도했다. 여성은 관람객이었다. 남성들은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한 구릉족 아저씨가 어떤 내용인지 친절하게 설명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는 영어를 잘 못 했고 나는 네팔어를 알아듣지 못해 서로 안타까울 뿐이었다.

남성이라도 원로들은 상석에 앉아 행사를 지켜봤다. 이들 중 한 명이 흥에 겨웠는지 직접 나서 춤과 노래를 앞에서 이끌기도 했다. 이들의 춤과 노래는 격렬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심심하지도 않았다. 적절한 흥과 절제된 반복에서 오는 유쾌한 구석이 있었다.

포카라 한국식당에서 본 레이크사이드 거리./이서후 기자

보는 내내 흐뭇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웃음 뒤에 씁쓸함이 남았다. 무리 뒤편으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젊은이들을 본 까닭이었다. 아까 본 수력 발전소가 생각났다. 세련되어 보이는 현대 문명이 들어오는 순간, 전통은 낡아 보이고 불편하고 열등한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10년, 20년이 지나고 나서도 낯선 여행자에게 이 축제를 함께할 기회가 있을까.

산이 높으니 해가 일찍 떨어졌다.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졌다. 나는 침낭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그 첫날밤이었다.

히말라야 산골 주민들이 타는 지프, 안나푸르나./이서후 기자

 

자가트 마을 주변, 안나푸르나./이서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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