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엄할 수밖에 없는 외로운 일"

부산에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년은 번듯한 대기업에 입사한다. 하지만 당장 돈벌이보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컸던 그에게 펼쳐진 현실은 갑갑했다. 20년 남짓 회사에서 근무한 학교 선배 이름 뒤에 붙은 과장 직함은 아무리 생각해도 초라했다. 공업고등학교, 고졸… 여물지 않은 머리였지만 그 선배 모습이 20년 뒤 자신이라는 것 정도는 쉽게 계산할 수 있었다. 그는 미련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경상남도선거관리위원회는 창원시 의창구 용호동에 있다. 바로 경남도청 정문 맞은편이다. 경남도선거관리위원회는 경남에서 치르는 주요 공직 선거를 관리하고 지원하는 기관이다. 도내 22개 시·군 선거관리위원회를 관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추형관 사무처장은 지난해 1월 경상남도선거관리원회로 부임했다. 사무처장은 실질적으로 경상남도선거관리위원회 주요 업무를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추 사무처장은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잘 처리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공무원 시험은 바로 합격했습니다. 운이 좋았지요. 스무 살에 합격해서 선거관리위원회 발령을 받았습니다. 이름 덕을 본 것 같아요.”

가을 ‘추(秋)’가 성이고 이름에 ‘관(官)’이 들어가니 결국 ‘가을에 관직을 한다는 뜻’이라는 풀이다. 그렇게 말해놓고도 멋쩍게 웃었다. 농담이 익숙한 성격은 아닌 듯하다.

“갑자기 진로를 바꾸게 됐지만 매우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30여 년 공직에 대한 자부심도 있고요.”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삼성전관(현 삼성SDI)에 입사했다. 하지만, 생산직은 그저 돈벌이라면 몰라도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년이 그리던 안정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로 진로를 바꿨고 결과도 다행히 바로 나왔다. 20살에 공무원이 된 그는 1982년부터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일하게 된다.

추형관 경상남도선거관리위원회 사무처장./박일호 기자

1도 2부 3단

“처음에 선거관리위원회 일은 절차 사무 쪽 업무였지요. 지금처럼 선거 진행·관리와 더불어 공정 선거를 위한 감시 기능까지 하게 된 것은 한참 뒤에 일이에요.”

추형관 사무처장은 선거법을 근거로 단속이 시작된 시기를 1989년 동해 재선거가 벌어지던 시점 정도로 어림잡았다. 당시 선거법 위반을 단속할 만한 법적 근거는 없었던 시기였다.

“당시 선거 현장이 매우 혼탁했습니다. 각 당에 선거법을 잘 지키자는 공문을 보냈고 이를 계기로 단속을 시작하게 됐지요. 이후 1992년 선거법 토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요즘도 선거 때만 되면 각종 불법 사례에 대한 신고가 선거관리위원회에 들어온다. 주로 지도과에서 처리하는 업무다. 그렇게 들어오는 신고 중에는 주의·경고로 끝나는 사건도 있고 고발 처리를 하는 사건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신고가 잦다고 해도 20~30년 전 선거 분위기와 견줄 정도는 아니다. 아직 문제가 많다고는 해도 선거문화가 상당히 개선된 것은 사실이다.

“불법 벽보는 예사였고, 금품·향응 제공 신고도 엄청나가 많았지요. 일단 선거가 다가오면 돈과 관련된 부정은 말할 수 없지 많은 사례가 있었지요.”

표를 얻으려면 당연히 돈을 뿌리는 게 당연하다 여기는 후보가 있었다. 돈을 받았으면 당연히 그 후보를 찍어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하는 유권자가 있었다. 시작도 끝도 분명하지 않은 악순환은 선거 때마다 이를 막으려는 공무원을 괴롭혔다.

“관광버스로 몰려다니다가 잡히니 승합차를 타고 다녀요. 그러다가 승합차가 추적을 당하니 승용차를 나눠 타지요. 그러면 그것을 또 따라다니고 무전기로 정보도 공유하고….”

단속을 당하면 잘못했다기보다 재수 없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오히려 단속을 하던 공무원이 불법 행위를 저지른 선거 운동원에게 봉변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위법 행위는 갈수록 영리해졌고 단속 공무원은 더욱 예민해져야 했다.

추형관 경상남도선거관리위원회 사무처장./박일호 기자

“현장에서 불법 행위를 잡아내도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선거와 결코 관련 없는 행위라는 변명을 가장 많이 듣습니다. 우리끼리는 ‘1도 2부 3단’이라고 하지다.”

선거관리위원회 공무원에게 잡히면 무조건 도망가는 게 ‘1도’이다. 공무원에게 체포권까지 있는 것은 아니니 일단 도망부터 가고 본다는 것이다. 가까스로 붙잡으면 ‘2부’가 기다린다. 무조건 부정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위법 혐의를 받는 이들은 “선거와 절대 관련 없는 일”이라고 버티며 위기를 넘기려고 한다. 도망치지도 못하고 부정할 수도 없는 증거까지 잡힌 이들이 마지막으로 내미는 카드가 ‘3단’이 된다. ‘자를 단(斷)’을 쓰는데 바로 꼬리를 자른다는 것이다.

“불법 선거 운동을 단속하면서 가장 아쉬울 때지요. 우리는 사실 몸통을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피할 곳이 없으면 꼬리를 자르거든요. 후보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식으로… 충분히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면 눈앞에서 몸통을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올바른 선거문화 정착을 위한 일이라지만 가슴 아픈 일도 있다. 법이 얼마나 엄한지 잘 모르는 순박한 사람들이 단속을 당할 때다.

“잘 모르는 어르신들이 과태료를 물게 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지요. 적은 돈도 아니고. 단속 때 보면 가까운 사람이 원수가 되고 한 마을이 쑥대밭이 되기도 하고. 그런 사례를 보면 인간적으로 참 마음이 아픕니다.”

추형관 사무처장이 보기에 선거판은 욕망이 뒤엉키는 현장이다. 선출직을 금품으로 사려는 사람이 있고 표를 파는 유권자가 있으며 가족을 고발해 포상금을 받는 사람이 있고 단속되면 가족에게만 알리지 말라며 사정하는 이도 있다. 그 욕망이 뒤엉킨 현장에서 민주주의 바탕을 키우는 일은 늘 만만찮다.

“선거문화가 좋은 쪽으로 나아진 것은 분명합니다. 예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훨씬 깨끗한 선거를 하고 있지요. 후보와 유권자 의식 모두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선할 점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아직 미흡한 점이 있는 것도 분명합니다. 나아진 선거문화가 일하는 보람이라면 미흡한 점이 일하면서 아쉬운 부분이 되겠네요.”

추형관 경상남도선거관리위원회 사무처장./박일호 기자

언제나 조심스러운 정치 얘기

“양복 단추를 푸시지요.”

사진기자가 주문했다. 양복 단추를 채운 채 의자에 앉으니 어색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자세로 그렇고 옷맵시도 불편해 보인다는 지적이었다.

“양복 단추를 잘 풀지 않는데….”

추형관 사무처장이 단추를 풀고 의자에 다시 앉았다. 사진기자에게 지적(?)을 받아서인지 앉은 자세가 편하게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주문이 몇 차례 더 되풀이됐다.

추형관 경상남도선거관리위원회 사무처장./박일호 기자

선거관리위원회 일은 잘하면 본전이다. 시비 없이 선거가 잘 끝났다고 해서 누구도 선거관리위원회 역할을 따로 인정하지 않는다. 기껏 선거문화가 나아졌다고 정리할 뿐이다. 하지만, 선거 결과나 과정에 시비가 붙으면 그 원망은 오롯이 선거관리위원회로 집중된다.

“무엇보다 공정성을 의심받을 때가 가장 힘들지요. 일부 후보나 캠프에서는 단순한 실수를 정략적으로 이용할 때도 있어요. 물론 실수가 없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한정된 인력이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면 실수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나마 실수를 한 게 있어서 비난받는 일은 좀 낫다. 선거에서 졌다고 그 분풀이를 선거관리위원회에 하는 후보나 캠프에 대해서는 추형관 사무처장도 아쉬울 수밖에 없다.

“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은 특정 정치 세력이나 후보 편을 들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지요. 개표 부정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데, 개표 현장에는 각 정당마다 참관인이 있고 정당과 이해관계가 없는 참관인도 있습니다. 게다가 개표 현장 위원장은 법관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중립·엄정·공정 등은 선거관리위원회가 기관 이름에 항상 짝지으려는 말이다. 추형관 사무처장 말투는 조용했고 단어 선택도 조심스러웠다. 감정이 앞서는 표현은 상당히 드물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수 없는 선거관리위원회 일이라는 게 그를 그런 쪽으로 몰아붙이는 듯했다. 추형관 사무처장에게 일상에서 정치적 견해를 밝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예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는 편입니다. 다른 사람과 만나면 특정 정당을 언급하지 않지요.”

그렇다고 아예 정당 이야기를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일 자체가 정당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될 일도 아니고.

“굳이 당명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A당, B당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동료에게도 정당·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지요. 외부 사람에게 얼마든지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고충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토론회 같은 자리에 가면 유난히 곤혹스럽다.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거듭 조심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이 보면 답답하게 보이겠지만 사소한 의심도 받지 않을 수 있다면 차라리 답답하게 보이는 게 낫다.

“직원들에게 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라고 당부합니다.”

처지가 그렇다 보니 술자리도 자연스럽게 피하는 편이다. 취미는 30년 정도 우표를 수집하고 있고 아내와 드라이브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라고 했다. 시간 되면 산책하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덧붙였다. 추형관 사무처장은 1988년에 결혼을 했고 아내는 선거관리위원회에서 함께 일하던 공무원이었다. 그리고 부부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다.

보람과 어려움 그리고 외로운 일

선거관리위원회 업무는 선거 기간에 집중되는 특수성이 있다. 유권자는 보통 5년에 한 번 열리는 대통령 선거와 4년에 한 번 열리는 국회의원 선거 정도만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선거관리위원회가 평소 한가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국회의원 선거 중간에 4년에 한 번씩 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열린다. 2년에 한 번씩 총선과 지방선거는 되풀이된다. 그 사이 대통령 선거가 있고 해마다 재·보궐선거가 끼어든다. 선거를 건너뛰는 해는 없다고 보면 된다.

올해는 제6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6월 4일에 열린다. 경남은 도지사와 도교육감, 시장·군수 그리고 광역·기초의원 등을 선출해야 한다. 여기에 정당 투표까지 더하면 이번 지방선거에서 유권자가 찍어야 할 투표용지는 7장이다.

“특정 기간에 일이 집중되는 게 어렵고 또 선거 때마다 새로운 제도가 생기는 것도 힘든 일이지요. 선거 관련법이 바뀌면서 선거 제도, 단속 대상 등을 선거 때마다 새로 적응해야 합니다.”

특히 이번 6·4지방선거에서 주목해야 하는 제도는 바로 ‘사전 투표’이다. 5월 30~31일 전국 어디에서라도 가까운 투표소만 가면, 등록 절차 없이 본인 확인 후 투표할 수 있는 제도이다. 사실상 투표일이 3일이 되는 셈이다.

“유권자 참여 폭을 획기적으로 넓혔다고 생각합니다. 전국 동시 선거에 처음 적용하는 제도로 차질이 없도록 모의실험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도내 곳곳에서도 시연을 하고 있고요. 보통 지방선거 투표율이 50~60% 정도인데 이번 사전 투표 제도를 통해 투표율이 70% 정도 나왔으면 좋겠다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추형관 사무처장은 특별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말투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하지만 30여 년 공직생활에 대한 자부심까지 애써 감추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 1991년, 1992년 통합선거법을 만드는 과정에 이바지했던 것이 가장 기쁩니다. 또 2005년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정치자금과장을 했는데 정당법과 정치자금법 개정에도 참여했습니다.”

더불어 부산에서 근무할 때 직원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만든 ‘선거박사’ 프로그램에 대한 자랑도 빼놓지 않았다. 이전까지 없었던 선거법 관련 활용 툴을 직원들 힘으로만 만들어낸 것 자체가 흐뭇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경남에서 열렸던 선거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선거로는 1991년 지방선거를 꼽았다.

“사무관이 되고 치른 첫 선거였습니다. 1991년에 각 지방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지도과가 생겼는데 처음으로 지도과장을 했지요. 저를 포함해 직원이 3명이었는데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래도 첫 선거였고 별 사고 없이 잘 끝냈기 때문에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6·4지방선거를 앞두고 유권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부탁하자 추형관 사무처장은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1995년 6월 제1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를 시작하고 19년이 지났습니다. 지방선거만 보면 성년이 된 셈이지요. 우리 모두가 승복할 수 있는 바르고 깨끗한 선거,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선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경상남도선거관리위원회가 유권자에게 투표를 독려하고자 내세우는 문구가 이렇다.

‘나와 가족을 위해 투표, 바르고 깨끗한 선거 투표로 응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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