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제 역할을 하겠다는 소명감으로

진주 지역의 어떤 현장에도 빠지지 않는 진주YWCA가 궁금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려면 1978년 문을 연 진주YWCA와 오랫동안 함께한 이를 만나야 했다. 24년, 박영선 사무총장과 진주YWCA가 합을 맞춘 시간이다. 24년 동안 쌓인 이야기를 2시간 만에 풀어내야 했기에 인터뷰는 쉴 틈이 없었다. 24년 동안 한 단체에 몸을 담는 건 애정 또는 그 이상의 것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봄날이었다. 복스럽게 만개한 벚꽃나무를 지나 들어선 진주시 상대동 근로자가족복지회관. 이곳 2층 진주YWCA에 가려는 참이었다. 건물 입구에는 1층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이 줄 지어 서 있었다. 아이들 말소리가 새소리처럼 귀엽다. 2층 올라가는 길을 찾아 고개를 돌리자 한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계단을 가리킨다. 계단이 여기 있다고 가리킨 건지 어쩌다 뻗은 손가락이 그쪽이었는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 순간 아이의 미소가 너무나 예뻤다. 진주YWCA 첫인상이 그랬다.

진주YWCA가 위치하고 있는 근로자가족복지회관.

오래된 기억을 되짚는 박 사무총장의 말은 막힘이 없었다. 말씨에서 똑 부러지는 성격이 배어나왔지만 온화한 기운 역시 함께 느껴졌다. 박 사무총장은 결혼을 하고 몇 년 후 진주에 정착했다. 89년 당시는 사회운동이 아주 활발했던 시기로 이것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과 기대도 컸다. 어느 날 아이가 둘인 엄마에게 흔치 않은 기회가 왔다. 같은 교회에 다녔던 전임자가 YWCA 사무총장을 권유한 것이다.

박 사무총장이 일을 시작 했을 때는 모든 것이 덜 갖추어진 상태였다. 처음에 주로 한 일은 도우미 교육을 받은 구직 여성을 일터에 연결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여성이 사회에서 제대로 대접 받는 분위기를 먼저 바랐어요. 초창기에 도우미를 가정부·파출부라는 이름에 맞추어서 아래로 보기도 했고 고용하는 사람들이 자기 기준에 맞춰서 사람을 부렸어요. 임금이나 노동시간도 아무 기준 없이요. 그런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서 기준을 정하고 교육도 했죠. 고용주들 민원이 많이 들어왔죠. 그게 진주YWCA가 시작할 때 사회분위기예요.”

박영선 진주YWCA 사무총장./서정인 기자

시대 따라 진주YWCA 활동도 다양하게 변화

박 사무총장은 시간 흐름에 따른 YWCA 활동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공익적인 틀 안에서 YWCA는 시대와 요구에 맞게 변해왔다.

“환경문제에 주력했어요. 사람들이 합성세제를 많이 쓰면 세탁이 잘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먼저 세제 정량 쓰기 운동을 했어요. 그러다가 아예 합성세제 안 쓰기 운동으로 바꿨는데 그러면 대체품이 있어야 하잖아요. EM(유익한 효과를 가진 미생물)을 사용해서 만든 친환경 가루비누를 업체랑 연계해서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고요.”

다음은 소비자운동이었다. 손익이 달린 예민한 문제를 다루면서 마음 고생을 하기도 했다.

“의약품이 약국마다 가격이 달랐어요. 정보를 아는 사람은 시내 중심가에서 싸게 사고 모르는 사람은 동네 약국에서 더 비싸게 샀죠. 그 문제를 조사했어요. 왜 시내 약국이 싼지, 가격 차이 나는 이유가 뭔 지, 성분 차이가 있는 지. 조사가 쉽지 않았어요.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싼 약국에 가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건 상거래가 무질서한 상태라는 거지요. 성분 차이가 나는 거면 소비자에게 이런 정보는 정확하게 알려야하는 거고요. 약사들한테 엄청나게 항의를 받았죠(웃음).”

박영선 진주YWCA 사무총장./서정인 기자

‘공명선거협의회’ 활동을 할 때에는 새벽에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잠복하기도 했다.

“그때에는 선거철에 불법 행위를 많이 했어요. 어느 날은 새벽에 한 후보가 산악회 회원들 등산을 보내준다는 제보가 들어왔어요. 남자활동가하고 같이 새벽에 카메라를 메고 나갔어요. 장소에 도착하니까 대형 버스가 있고 남자들 몇 명이 서 있는데 너무 무서웠어요. 그래도 뒤에서 숨어서 촬영을 하는데 거리가 멀어서 잘 잡히지도 않았어요. 그러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자기들 비상연락을 돌려서 흩어지기도 했어요. 거리에서 선관위하고 캠페인도 하고요.”

2000년부터는 기본적인 ‘인권’에 다시 집중하는 시기였다. 이때 시작한 다문화가정관련 활동은 지금까지 진주YWCA의 핵심사업으로 활발하게 이어져오고 있다.

“사람에 대한 대우가 너무 안 좋은 거예요. 직장이나 학교에서요. 먼저 우리 회원들 자존감 높이는 인권교육을 시작했죠. 청소년 문제에도 가까이 접근하고 YWCA 청소년 사업에서 우선 청소년 회원의 입장을 많이 담으려고 했고요.”

2014년도 사회통합프로그램인 1차 한국어교실 개강./진주YWCA

인권이라는 광범위한 주제에서 결혼이주여성 관련 사업을 특성화 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시작은 2008년 만난 두 명의 이주 여성으로부터였다.

“이주 여성 두 명이 미용실에서 일을 하는데 한글도 모르고 의사소통이 잘 안되니까 답답해서 상담을 요청하고 싶은데 할 데가 없다고 주변 분이 저희한테 연락을 하셨어요. 점심 시간에 미용실을 찾아갔고 주변 중국집에서 얘기를 나눴어요. 저희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이니까 접근하기 쉽지 않았어요. 고민한 끝에 먼저 한국말부터 알아야겠다 싶었어요.”

그렇게 진주YWCA는 첫 한글교실을 열었다. 두 사람만을 위한 한글교실이었다. 미용실을 다니는 두 사람 일정에 맞춰 수업 시간도 들쑥날쑥 했다. 시간이 갈수록 학생이 점점 늘었고 생활적응훈련, 인식개선활동 등으로 활동영역이 넓어졌다.

“국가·동아리별로 모임을 하고 다문화중창단도 만들었어요. 우리도 예전에 영어 배울 때 팝송으로 먼저 배운 것처럼 재밌게 한글을 익히라고 만들었는데 이 중창단이 인기가 많아서 합창제에 나가기도 하고 찾아가는 공연 활동도 해요. 대곡초등학교 같은 경우는 다문화에 굉장히 관심이 많아요. 대곡초등학교, 금곡중학교 학예제때 우리 이주여성들이 가서 프로그램 같이 하면서 음식도 만들어먹고 각 나라별로 조를 만들고 이주여성들이 일일교사로 참여하기도 하고요.”

결혼이주여성취업지원센터

진주YWCA에서는 이주 여성의 정서적인 안정 이외 현실적인 문제도 함께 고민한다. 대표적인 것이 취업이다. YWCA 사무실 옆 나란한 공간에 있는 ‘결혼이주여성취업지원센터’. 이주여성들은 이곳에서 취업에 필요한 교육을 받고 적성을 찾기도 한다.

결혼이주여성들이 구직활동을 하면서 면접을 보고 있다./진주YWCA

“올해가 4년째예요. 프로그램 기획해서 노동청에 제출했고 기쁘게도 취업지원센터가 우리한테 왔는데 만만치 않더라고요. 경제는 어렵고 점점 진주는 소비도시고요. 일반인도 취업이 힘든데 의사소통이 어려운 이주여성을 취업시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어요. 훈련부터 했죠. 베트남이나 필리핀이 수공업이 발달한 나라예요. 손으로 만드는 걸 잘 해요. 미싱으로 옷 리폼을 하거나 수세미를 만들었어요. 대학교랑 연계해서 ‘잡페스티벌’도 하고 회사들도 구인처로 부르고요. 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노동부에서 하는 사업이니까 실적을 보여야 하는 거죠.”

중소기업·미용실·병원·보건소 등 다양한 곳에서 취업 성과를 내고 있긴 하지만 이주여성이 취업을 하는 건 아직까지 어려운 일이다. 이주 여성에 대한 낮은 인식부터 신용보증에 관한 부분까지. 현실적인 벽이 구인처와 이주여성 사이에 있다. 박 사무총장은 관련 단체들과 협의해 효과적인 취업구조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쳤다.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다문화 관련 활동을 하는 단체가 진주에 여러 곳 있는데 네트워크가 약해서 정보공유가 잘 안 되다 보니 비슷한 사업을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다문화가정지원센터가 행정이 직영하는 곳이니까 중심이 되어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요. 각 단체 특성을 살려 역할을 나누어서 더 효과적으로 활동 했으면 하는 마음이죠.”

다문화중창단이 노래 연습을 하고 있다./진주YWCA

지금은 탈핵

YWCA는 탈핵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진주YWCA 역시 그 열기가 뜨겁다.

“작년과 올해는 탈핵운동을 집중적으로 하고 있어요. 지금 핵발전소가 경남·경북에 거의 다 있잖아요. 하나 터지면 여기는 사람이 살수 없어요. 고민을 시작했고 전문가를 모시고 계속 교육을 받았어요. 핵발전소 수가 많은 나라에서 문제가 터졌기 때문에 다음에는 프랑스 그 다음이 한국이에요. 전문가들이 그렇게 보는데 정부는 대안도 고민도 없어요. 핵 마피아와 함께 핵발전소에 투자하고 있죠. 알고 보니 대안이 없는 게 아니었어요. 원전 관련 대기업에게 투자하는 돈을 자연재생에너지 개발에 투자하면 된다는 거죠. 행정기관과 간담회를 하면 늘 우리나라는 땅이 좁아서 안 된다고 해요. 그러면 전문가와 함께 다른 에너지정책을 제시하기도 해요. 그런 걸 고민하지 않는 문제도 짚고요.”

진주YWCA는 부산을 중심으로 탈핵 활동을 하는 것은 물론 전국 52개 지역 YWCA가 매월 셋째 주 화요일에 벌이는 ‘탈핵 불의 날’ 퍼포먼스에도 참여할 계획이다.

좀 더 정책적인 접근도 하고 있다. 박 사무총장은 방사능 안전급식 조례를 만드는 일에 뜻을 함께 하고 있다. 1차로 조례 발의는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에 막혀 일단 보류된 상태이며 재발의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제 역할 속에서 지역과 함께 할 뿐

박 사무총장은 20년이 넘는 ‘장기 근속’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는 것에 대해 솔직하게 풀었다.

“누군가는 우리가 장기집권을 한다고 얘기해요. 그러면 전 그렇게 하는 이유를 얘기해요. YWCA가 역사가 있다 보니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에게는 젊은 활동가들에게 부족한 연륜과 경험이 있죠. 사람을 조화롭게 배치하고 우리 일을 외부에 설득할 수 있는 다른 성격의 역량이 있는 거죠. 그래서 소모임 활동가는 젊은 사람이 하고 리드하고 생각을 심어주는 역할은 연륜이 있는 사무총장이 하는 거라고 반론을 하죠.”

단순한 반박은 아니었다. 기본적인 욕구조차 채우기 힘들었던 1920년대 다른 누구보다 앞서 사회문제에 접근했다는 YWCA로서의 자부심이 박 사무총장을 단단히 지지하는 듯 했다.

“우리의 전문성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이 많은데 초창기에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 다양한 영역을 YWCA가 다루었고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박 사무총장은 나이를 밝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자신의 활동과 아이디어에 나이라는 선입견이 덧대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라고 했다. 나이가 필요하다면 50대 중반 정도로 넣어달라 말하며 웃었다.

박영선 진주YWCA 사무총장./서정인 기자

“끊임없이 공부하고 아이디어를 내요. 젊은 사람 못지않은 역동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요. 올해는 양성평등 강사 쪽으로도 활동하고 싶어서 일 년 동안 정기적으로 서울에 가서 훈련을 받을 거예요. 음악과 댄스에도 관심이 많은데 실버 밴드 같은 것 만들고 싶어서 드럼도 치고요. 호른도 연습해요. 스포츠댄스도 우리가 강의 만들면 제가 제일 먼저 등록해서 배우고 해요. 이런 것에서도 행복을 찾죠. 사실 YWCA에 몸 담지 않았다면 많은 걸 모르고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YWCA 덕분에 불편하지만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현실을 많이 알게 되었고 지역사회와 같이 해나갈 수 있었던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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