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사람 구하고 시신 찾는 일까지…

지난 8일이었다. 통영해양경찰서 122특수구조대 박종철 대장을 인터뷰했다. 인터뷰는 통영시 미륵도 옛 통영해경 청사에서 했다. 구조대는 이곳을 사무실로 쓰고 있다.
그는 투박해 보였다. 강해 보이는 턱을 가졌다. 겁이 없는 전사 같았고 상남자형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순수하고 선한 남자의 느낌이 셌다.

“그 시신들…. 맞습니다. 영화 킬링필드 장면 같았습니다.”

통영해양경찰서 박종철(52) 122특수구조대장이 옛 사건을 기억했다.

구조선 위에 건져 올린 시신이 무더기로 싸여 있던 장면, 그는 1993년 292명이 몰살당한 희대의 사건, 서해페리호 침몰 참사를 ‘킬링필드’의 한 장면으로 생각해 냈다.

그해 10월. 그는 쉬고 있었다. 일요일이었는데 긴급 출동 명령이 떨어졌고 급박하게 김해공항으로 이동했다. 공군 수송기를 타고 전북 부안군으로 급파됐다.

이동 중에 ‘전북 부안군 위도’란 말을 듣자마자, 그는 자기와 깊은 연관이 있었던 서해의 작은 섬 위도를 떠올렸다.

/하동정 기자

서해페리호 침몰 참사 현장으로 돌아가다

해경 입사 전, 제주도에서 그는 친구와 함께 폭파와 관련한 일을 했다. 일이 없는 겨울이면 전북 부안군 위도로 갔다. 그 위도 바다에서 수년간 잠수로 해산물을 채취했던 것이다.

자주 왕래해 잘 알고 있던 섬, 그가 수십 번이나 타고 내렸던 페리선이 뒤집혔다는 소식에, 그는 말문이 막혔다. 알고 지낸 위도 사람들 얼굴이 소스라치게 기억됐다.

큰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그 시절이었다. 해양경찰 특수구조대에 들어온 지 고작 2년쯤, 해경 최말단 순경이었던 때였다.

해군 해난구조대(SSU)에서 그는 5년여를 복무했다. 잠수가 주특기였다. 고난도 훈련으로 유명한 SSU 하사관으로 그는 근무했다.

1983년 12월 3일 부산 다대포 남파간첩을 침투시킨 뒤 귀환하던 북한 반잠수정을 인양한 작전에도 그는 있었다. 이런 이력을 가지고 그는, 군 복무 이후 제주도와 전북 위도 등에서 먹고사는 일에 매달렸다.

인연이 있었는지 해양경찰에 특채 입사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만에 그는, 해산물을 잡던 부안군 위도로 얼결에 돌아왔던 것이다. 좋은 일도 아니고, 주민들이 몰살한 그곳 바다로 통곡의 심정으로 돌아온 거였다. 300명 정도가 익사한 그곳, 돌아온 위도 선착장은 절규의 땅이었다.

위도 선착장에서 그는 아는 주민들에게 인사하지 못했다. 통곡을 하고 발을 구르고 망연자실한 그들에게 아는 체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인사를 건네지 못할 만큼, 부두는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아는 얼굴이 많았지만 아는 체를 하지 않았지요. 감정이 북받칠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선착장을 떠나면서, 유족들과 침몰 현장 사이에 그가 있었다.

‘해경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이 이 죽음의 현장에 있거나, 부두에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을 것 같은 생사의 문제 앞에 그는 혼란스러웠다.

서해페리호가 가라앉은 바다 현장은 사람들이 남긴 부유물과 떠오른 시신으로 또 하나의 아수라장이었다.

침몰한 여객선에 수백 구의 시체

수심 30m 해저에 110톤급 여객선이 가라앉은 상황, 그는 ‘한 명이라도 아는 사람이 없길’ 그렇게 빌었다. 참사는 전 국민의 이목이 쏠린 대사건이었다. 침몰로 사고는 인명 구조가 아닌 시신 인양 작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살이 엄청났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런 상황에서 구조 작업은 불가능합니다. 조류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홍수에 쓸려 내려갈 정도로 강했지만 우리는 물밑으로 들어갔습니다.”

“해경과 해군, 민간 잠수부까지 구조에 동원돼 있었고, 구조대가 대거 몰려든 상황에서 시신 인양에 대한 의지는 높았습니다. 하지만 서로 얽히고 설키면서 인양 활동이 효율적이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지휘 체계가 갖춰진 해경 단독 인양이 더 효율적이었습니다.”

상황은 끔찍했다.

침몰한 페리호와 구조선을 로프로 연결해 이동과 안전을 먼저 확보했다. 하지만 물살이 문제가 됐다. 침몰한 배를 자주 탔고 선체 구조와 이 바다를 가장 잘 아는 그였기에, 그는 앞장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탁류로 해저는 캄캄했다. 선체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몸은 강풍을 맞은 방패연 같았다. 급물살은 로프와 몸을 90도를 만들 정도로 거셌다. 선체 안으로 들어간 순간, 거짓말처럼 물살을 느낄 수 없었다. 물살이 느낄 수 없는 대신, 여객선 안은 적막함과 괴기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캄캄한 여객선 안을 더듬다, 뭔가 어깨에 부딪히고, 발끝에 뭔가가 슬쩍 부딪힌 다음 뭔가가 사라지길 수십 회…. 컴컴한 주위를 살피며 뿌연 바닷물에 눈이 조금 익숙해지던 그때, 그가 비춘 불빛에 드러난 것은 온통 주위를 감싸는 수백 구의 시신이었다. 위아래, 그리고 사방에서 시신이 유령이 돼 그를 감싸고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몰살의 현장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까마득했다.

인양을 위해 한 시신의 팔을 잡았을 때 그 뻣뻣한 느낌, 시신은 아는 섬마을 주민들이었고 함께 해산물을 잡고 함께 마시고 노래 불렀던 주민들이었다.

말 못 할 아픔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그는 시신을 더듬었고 팔을 잡았고, 지옥 같은 현장에서 그들을 밖으로 데려가기 위해 몸서리쳤다.

   

한 구, 두 구, 시체 인양작업은 보름째 계속됐다. 2인 1조로 시신을 잡고 끌어올릴 때 그는 입을 막고 절규했다.

시신을 찾았고 찾은 다음 배 바깥으로 나가면, 이때는 서해의 거센 해류가 그와 시신을 후려치며 떼어내려 했다. 로프를 놓을 수 없듯 시신을 놓을 수 없었다.

“잠수는 매뉴얼에 따라 해야 합니다.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서해안의 경우는 물이 약할 때 하루 두 번 정도 작업해야 하지만 워낙 국민적 관심 사건이었던 지라 우리는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끓어 올린 시신만 3~40구, 쉬기 위해 구조선 위에 올라섰을 때마다 그는 시신이 무더기로 쌓인 갑판을 봐야 했다.

“아직도 그 시신들이 기억납니다. 영화 킬링필드에서 학살당한 시체가 쌓인, 바로 그 장면 같았습니다.”

서해페리참사는 그에게 상황과 구조의 현실을 가르쳤다. 구조의 질서와 효율적 구조 방식, 상황 판단에 대한 잠수부의 물속 역량, 구조대원의 감정 억압, 이 세기적인 사건을 통해 그는 잔인하게 사고 환경을 배웠고 경험했다.

“페리참사는 인간이 만들어낸 대재앙이었습니다. 승선인원 초과 탑승, 출항 조건에 맞지 않는 강풍 상태 출항, 안전 불감증이 만들어낸 참사였지요.”

기본적 판단 잘못이 학살과도 같은 300명 목숨을 몰살시킨 이 사건은 그에게 강박증과 같은 안전 문제를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서해 섬을 오가던 100톤짜리 배 한 척이 가라앉았다고 생각할 문제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서해페리참사로 292명이 사망했고 당시 구조대는 292명의 시신을 인양하면서 작전을 끝냈다.

항상 그런 것처럼 구조대의 작전은 시신을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끝이 났다. 고생 고생해 시신을 가족에게 인양하는 순간 가족은 오열하게 되고, 구조대원들은 통곡 소리를 들으며 현장을 떠난다. 여기까지가 구조대 작전 종료 시점이다.

서해페리참사 후 구조 작전 투입된 그와 대원 모두는 1계급 특진했다.

“바다 속이나 어둠 속에서 시신을 발견하면 놀랍고 두려울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서해페리참사 때는 조금 달랐습니다. 구조 당시에는 슬픔이나 아픔 같은 것을 솔직히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시신을 가족에게 인계하고, 돌아서는 순간, 그때 기분이란… 감정을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내 사전에는 노(No)란 없다

해군 해난구조대(SSU)로 있다가 그는 제대했다. 1990년 당시 해양경찰 특수구조단을 만들 당시 특채되면서, 잠수를 특기로 한 특채 1기가 그였다.

/하동정 기자

그가 책임자로 있는 통영해경 122특수구조대는 해난 사고의 모든 현장으로 출동한다.

122특수구조대를 알 만한 최근 가장 두드러진 사건은 지난 2월에 일어났다. 부산 영도구 태종대 해상 기름유출 당시, 터진 선체 벽을 손으로 틀어막은 해양경찰 2명이 크게 드러난 적이 있는데, 이들이 해경특수구조대다.

박종철 대장은 진해에서 태어났다. 해경에 입사 후 98년부터 4년, 2006년 이후 2년을 제주 해양경찰서에서 근무했다.

당시 제주도 앞바다인 동중국해에 중국 어선이 얼마나 많은지, 레이더 화면을 채워버릴 정도였다. 당시 그가 나포한 중국 어선은 30척 이상이었다.

중국어선이 한국 해역으로 월선하면서 비상이 걸렸던 적이 종종 있었다. 파도가 워낙 세 단속이 어려운 날이 많았다.

   

그날, 함장 앞에 선 그는 “내 사전에는 노(No)란 없다”고 단정하고 보트를 내렸다. 파도가 치솟고 보트가 파도를 뚫으며 수백 미터를 전진하던 순간, 갑자기 함정에서 급하게 “돌아오라”는 무전이 떨어졌다.

“단속하러 출발한 보트가 워낙 파도가 높으니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거였습니다. 도저히 불안해 안 되겠다며 함장이 돌아오라고 한 거였는데 명령에 따랐지만, 나는 지금도 그렇고 당시에도 겁을 몰랐습니다.”

통영해경 122특수구조대원은 모두 9명, 지난해 2월 그는 통영으로 왔다. 비번 등을 빼고 하루 5명이 현장에 투입하게 되고 이들이 하루를 현장에서 책임을 지고 있다.

바다 실종 사건 대부분은 특수구조대가 활동하게 된다. 유족들이 들이닥치고, 시신 수습이 늦어지면 유족들은 “뭘 하기에 시신을 찾지 못하냐”며 구조대를 탓하거나 시비를 거는 일도 많다.

“우리 일이라는 게 고맙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직업입니다. 특수구조대는 유족들에게 시신을 넘겨주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유족은 시신을 확인하고 오열하고 통곡하는데, 이때 우리가 하는 일은 조용히 돌아서는 것입니다. 대원들 중에는 힘들어서 눈물을 흘리기보다, 유족들 눈물 때문에 돌아서면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게 우리 일입니다.

아들이 인정해준 삶, 두 아들 모두 해경 되고파

30년 전, 그는 진해에 놀러 온 제주도 여자를 사랑했다. 함께 낚시를 한 것 등이 계기가 돼 결혼했다. 함께 두 아들을 길렀다.

아이들에게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보여주고 싶었고, 종종 아들을 해경 특공대 체육실에 데리고 가곤 했다. 운동도 하고, “사람 살리는 일이 아빠의 일”이라고 아들에게 말하곤 했다.

“지금, 아들 둘 모두 해양경찰 특공대에 들어오려 합니다.”

   

큰아들은 현재 대위로 레바논에 파견 나가 있고, 둘째는 소위로 복무 중이다. 두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고 싶어한다는 것에 그는 최근 크게 감동 받았다.

“아들 둘 모두가 해양경찰관으로 들어오고 싶다는 게 자식들이 아비의 삶을 인정하고 이해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때만큼 행복한 적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는 종종 서해페리 참사를 생각한다.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는 사건…. 그때를 생각하면서 그는 삶을 감사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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