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지난해 2월경 방송된 MBC <일밤-아빠! 어디가?>의 ‘짜파구리’가 시초 격이었던 거 같다. 물론 그전에도 숱한 ‘먹방’(먹는 방송)이 있었으나 거대 식품기업이 생산한 라면을 비롯한 각종 인스턴트 식품이 이토록 노골적이고 또 전면적으로 브라운관을 장악하기 시작한 건 그 즈음이었다.

곧이어 골빔면(KBS2 해피투게더), 짜계밥(KBS2 해피선데이-1박2일) 등이 차례로 등장하더니 각종 예능 프로그램의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로 등록된다. 대략 떠올려 봐도 <일밤-진짜 사나이>, <나 혼자 산다>(이상 MBC), <힐링 캠프>(SBS), <인간의 조건>, <슈퍼맨이 돌아왔다>(이상 KBS2) 등 ‘인스턴트 먹방’이 거쳐 가지 않은 프로가 없다. 라면뿐만이 아니다. 만두 같은 냉동식품부터 온갖 통조림, 과자, 음료 등이 거리낌 없이 화면을 도배하고 있다.

유재석·박명수가 출연하는 <해피투게더-야간매점>은 아예 대놓고 이런 재료들로 먹방을 쏟아내는 프로그램이다. 쉽고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야식이 주제이니 만큼 예의 인스턴트 식품 일색이다. 거의 매회 라면이나 통조림, 소시지, 어묵 같은 것들이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

농심의 ‘짜파구리’ 신문 광고. 짜파구리를 띄운 윤후(가운데 큰 사진) 등 MBC <일밤-아빠! 어디가?> 출연자들이 모델로 발탁됐다.

언론들도 진보·보수 가릴 것 없이 이를 확대재생산하면서 인터넷 클릭 수 올리기에 열중한다. 파급력은 엄청나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엔 ‘해피투게더 야간매점 레시피’란 제목으로 수많은 글이 올라오고 있다.

가장 큰 수혜자는 물론 식품 기업들이다. 동원F&B의 ‘볶음짜장참치’는 지난해 11월 <해피투게더>에 ‘참짜면’(짜장참치 라면)이 소개된 뒤 판매량이 폭증했다. 방송 직후 3일 동안 평소보다 무려 20배나 많이 대형마트에서 팔렸다고 한다. 농심의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 역시 방송을 탄 지난해 2월경 월매출 최고치를 달성한 바 있다.

짜파구리 맛있으세요?

인정한다. 기자도 인스턴트 식품을 먹는다. 고된 노동으로 힘이 들 때, 이것저것 장 봐서 요리하기 귀찮을 때, 특히 라면 같은 경우는 술 먹고 늦은 밤 또는 다음날 ‘해장용’(사실 가장 먹을 만한 순간이다)으로 종종 찾는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맛있다며 적극 권하거나 좋은 음식이라고 떠들고 다니지는 않는다. 화학조미료·첨가물 덩어리라 몸에 좋을 리도 없지만 맛도 다들 그렇지 않은가? 왠지 당겨 야심차게 먹었으나 이내 ‘이걸 왜 먹지?’ 후회하게 되는 그런 음식.

물론 예능에서 인스턴트 식품 먹을 수 있다. 하지만 ‘무릉도원’이니 ‘명품요리’니 허황된 자막을 덧붙이거나 출연자들이 “미친 맛” “대박” 운운하는 건 아무리 봐도 과하다. 아이들이 주로 나오거나 야외에서 진행되는 일부 프로그램은 자칫 ‘순수’와 ‘자연’의 이미지까지 덧씌워질 수 있어 더욱 위험하다.

건강에 미칠 악영향만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이른바 ‘갑질’의 최선봉이자 좋은 먹거리 세상의 주적인 식품 대기업에 부여하는 무한한 면죄부다.

식품 대기업들의 먹거리 생태계 교란은 심각한 수준이다. 인스턴트 식품을 많이 파는 소규모 분식점·가게 등 가난한 영세 자영업자들에겐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무엇이든 잘 팔리면 그만이지 않냐는 반론도 나올 법하다.

그럼 모든 재료를 하나하나 직접 구입해 정직하게 요리하고 장사하는 음식점들은 어찌할 것인가. 또 이들에게 질 좋은 원재료와 양념 등을 팔아 소소하게 먹고 사는 작지만 역시 정직한 식품 제조업자나 시장 상인, 농민 등은 어찌할 것인가. 짜파구리에 ‘눈물 흘릴’ 정직한 짜장면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냉동 만두가 ‘밀어낼’ 맛 좋은 손만두는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음식점들은 이제 괜히 공과 시간을 들여 장을 보고 요리를 할 이유가 없다. 대기업 제품을 사다 쉽게 쉽게 장사하면 되는데 뭐 하러 생고생을 사서 하나.

인스턴트 식품뿐일까. 이미 된장·고추장·간장 등 양념류는 대기업 제품을 쓰지 않는 식당이 드물고,‘어머니의 손맛’은 공장산 화학조미료가 대체한 지 오래다.

식당은 물론이고 가정의 냉장고도 대기업이 만든 각종 반조리·가공식품이 판을 친다. 그렇게 우리 삶은 재벌의 영향력 아래 더더욱 종속되어 간다. 보다 나은 먹거리 세상을 향한 다양한 고민과 시도는 ‘짜파구리 한방에’ 하루아침에 쓸모없는 바보짓이 되고 만다.

KBS2 <해피투게더-야간매점>의 한 장면.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

한 푼이 아쉬운 가난한 자영업자들한테까지 손가락질을 할 수는 없다. 인기를 끌고 있는 한 종편 프로그램의 전매특허처럼, 인스턴트 재료나 화학조미료, 공장산 양념을 쓴다고 ‘나쁜 식당’으로 낙인찍는 건 너무나 가혹한 짓이다.

하지만 공공의 전파를 사용하는 거대 방송사들이나 공인과 다름없는 연예인·방송인들은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켜야 할 최소한의 사회적·윤리적 책임이란 게 있는 법이다. 아무리 기업광고가 주 수입원이라지만, 이렇게까지 발가벗고 대기업의 저질 식품을 띄워줘서야 되겠는가.

우리 아이가 허구한 날 인스턴트 식품만 찾는 세상, 어느 식당을 가도 짜파구리 같은 음식만 나오는 세상,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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