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실책보다 야당 탓으로 책임 전가
혐의 확실치 않자 증거 조작 시도까지

1979년 5월에 부산 동구·서구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에 선출된 김영삼 의원은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면서 직선제 헌법 개정과 박정희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 여당 의원들은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스 기사를 빌미로 10월 4일 사복경찰 400여 명이 국회 본회의장을 봉쇄한 채 김영삼 의원을 제명하였다. 이에 반발한 야당 의원 69명이 10월 13일 국회의원 사퇴서를 제출한다. 당시 여권인 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합동조정회의에서 '사퇴서 선별 수리론'을 제기했다.

국회의원 집단 사퇴와 박정희 정권의 선별 수리론이 불거져 나온 지 3일째인 10월 16일 부산에서, 그리고 5일째인 18일에는 마산에서 민주항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구호는 독재타도·유신철폐로 집중됐지만, 부산과 마산 민심이 들끓게 된 것은 김영삼 의원의 제명이 배경에 있음은 확실하다. 당시에 중앙정보부가 시위 연행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군중심리라고 답한 이들을 제외한 명백한 사유를 댄 이들 중 20% 정도가 김영삼 총재 제명을 들고 있었다.

부마항쟁이 발생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신민당이 배후조종세력이라고 단정하면서, 배후 규명 수사를 독려했다. 부산에 계엄령을 발포한 10월 18일에 열린 안보대책회의에서 "이번 부산사태는 반드시 배후세력이 있다고 생각되며, 반드시 발본 색출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18일 오후 6시 20분 청와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신민당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데, 정보부 정보활동이 그것도 못 잡고 있어"라고 질책했다. 이후 10월 20일과 21일 사이의 안보대책회의 보고에서도 신민당과 불순세력의 조종 때문이라는 보고가 없다는 이유로 정보 부정확이라고 질책을 당했다는 진술이 있다. 이후 중앙정보부 내부회의에서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각하의 지시인데, 부산사태와 관련하여 신민당의 ㄱ(부산 2지구당 부위원장), ㄴ(김영삼의 사촌), ㄷ(2지구당 선전부장), ㄹ(2지구당 총무부장), ㅁ(전 지역구 비서) 등을 반드시 체포하여 배후조종혐의를 규명하라"고 지시한다. 10월 25일 청와대 안보대책회의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은 "부산사태의 요인은 정부 실책보다 김영삼 영향이 더 큰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신민당 배후 조종 수사 지시에 의해, 신민당 불순세력을 A급으로 분류하고, 부산서부경찰서는 9명의 수사대상자를 선정하고, 수사 대상 1명당 2명의 경찰관을 배정해 전담조직을 운영했다. 수사 초기부터 계엄사 합동수사단은 "이번 부산 소요사태는 수사결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특별한 불순 배후조직이 발견되지는 않았다"고 결론 내고 있다. 10월 26일 오후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궁정동 본관 1층 응접실에서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각하의 판단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부산지구의 데모를 신민당이 조종했는지를 아무리 조사해도 남민전과의 관련성은 포착되는데, 신민당이 조종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아서 죽을 지경입니다"라고 고백한다. 부산시 2지구당(김영삼 지역구인 부산 동구와 서구 지역)의 당직자들은 10월 16일 오후 4시에서 6시까지 2시간 동안 시위에는 가담하지 않고 "부산시 중구 광복동 일대 학생데모 사태 광경을 지켜보고, 신민당은 학생데모에 가담할 수 없었으나, 학생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고 증언했다. 배후조종 수사는 술집에서 나눈 이야기, 술값 납부를 데모 조종과 자금 제공으로 몰아가려고 시도했다.

/이은진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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