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중국·일본 자국 이익 우선 외교
맹목적 줄서기 아닌 자주성 회복 시급

일본도 그렇지만 한국 고위 관료들의 자존감은 엄청나다. 그런 관료들이 상대적으로 낮춰보는 정부 부처가 외교부이다. 외교부는 지정학 리스크에 대한 치열한 고민 없이 늘 미국 뒤에 줄만 서면 되기 때문이라는 게 술자리 조크이다. 격동의 시기였던 19세기 말 조선도 그랬다. 독자적 외교라는 개념은 아예 없었고 중국만 보고 있었다. 1880년 일본에 갔던 김홍집은 주일 청국공사관 참사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들고 온다. 한국으로 치면 중앙부처 3급 과장 정도가 조선의 살길이라며 적어 준 것이 약 6000자 분량의 <조선책략>이다. 요지는 중국과 친하고(親中國) 일본과 맺고(結日本), 미국과 연결(聯美國)해 자강을 도모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힘없는 나라가 다른 나라의 선의에 기대 생존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조선책략>은 고종을 비롯한 조선 지도층의 바이블이 되었고 멕시코 전쟁 등 국내 문제로 국외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었던 미국은 영토적 야심이 없는 동양의 수호천사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그럴듯한 가치와 미국의 이익이 충돌하면 늘 자국의 이익을 선택해온 것이 미국 역사이다. 최근 한국 보수 엘리트들의 바이블은 피터 자이한의 <각자도생의 세계와 지정학>, <붕괴하는 세계와 인구학> 같은 책들인 것 같다. 피터 자이한이 바라보는 미래는 이렇다. 자원도, 내수시장도 없는 수출 중심 국가, 저출생·고령화라는 최악의 인구구조를 가진 한국은 독자적인 생존이 거의 불가능하다. 2030년대가 되면 한국의 수출 주도 경제모델은 더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는 일본이 미국을 대리해 중국을 견제하고 패권을 행사할 것이므로 한국은 그 질서에 동참하고 경제적으로는 일본과 사실상 융합하는 길을 모색하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단언한다.

요즘 한국 외교의 방향과 많이 닮아 보이지 않는가? 자이한은 미국의 탐욕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2023년 1분기 동안 전 세계 전기자동차 판매는 30%가 늘었지만 지난해 IRA법으로 테슬라보다 비싸진 현대자동차 그룹은 '글로벌 톱 10' 가운데 유일하게 판매가 줄었다. 1980년대 미국은 '반도체 협정'을 통해 당시 세계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 반도체산업을 초토화했다. 미국은 한국 메모리반도체 기업에 대해서도 보조금을 빌미로 미국 내 공장 이전과 프로세스 공개 등을 요구하고 있다.

2021년 한국 무역흑자는 295억 달러, 이 가운데 241억 달러가 대중국 무역 흑자였다. 지난해 대중 무역흑자는 12억 달러로 줄었고 전체 무역수지는 472억 달러 적자였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이 적자를 기록한 것은 14년 만의 일이었다. 2023년은 더 심각하다. 5월까지 무역적자는 295억 달러, 지난해 62% 수준이다. 대중 무역적자는 4월 기준으로 101억 달러, 수출은 1분기 28%가 감소해 주요 국가 가운데 낙폭이 가장 크다. 반면 미국과 중국간 교역은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도 지난 4월 중국 방문에서 전략적 자주성을 강조하면서 160대 항공기와 16척 선박을 팔았다. 미국 애완견이라는 놀림을 받는 일본도 한국과는 달리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살상용 무기 지원 요구를 거절하고 경제적 지원에 그쳤다. 143년 전 <조선책략>에서 생존의 핵심 비결은 '세력균형'이었다. 조선이 망한 것은 맹목적 줄서기를 하면서 이를 '균형 외교'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김석환 부산대 석좌교수 전 한국인터넷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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