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의거 역사적 의미 재조명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제안

1960년 사회경제적 분석 통해
민중봉기 성격인 3.15의거 규명
지역 민주화 단체 간 연대도 강조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저항한 3.15의거 당시 급증한 마산 인구, 전국적인 경제 위기 등에 관한 사회경제적 분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3.15의거의 민중봉기 성격을 더 자세히 규명하자는 제안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17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3.15아트센터에서 ‘3.15의거의 역사적 재조명과 기억’이란 주제로 학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 주임환 3.15의거기념사업회장, 오무선 3.15의거희생자유족회장 등 3.15의거 참여자와 희생자 유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서익진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 위원은 주제 발표에서 역사적으로 인정받으며 안정화 단계에 접어든 3.15의거가 오히려 ‘성공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서 위원은 “군부독재 시기 왜곡 당하며 시민 기억에서 잊힌 3.15가 1987년 절차적 민주주의가 들어서며 본격적인 인정 투쟁이 시작됐다”며 “이후 2010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는 등 여러 성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3.15의거 정신을 계승할 세대가 보이지 않고 여러 사업이 지역에만 국한된다는 한계도 있다”며 “3.15의거 관련 사업회들은 조직 유지와 조직 논리에 빠져 3.15의거를 사유화하려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지난 17일 개최한 3.15의거 학술 토론회에 참석한 오제연(오른쪽 셋째)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박신 기자
진실화해위원회가 지난 17일 개최한 3.15의거 학술 토론회에 참석한 이은진(오른쪽 넷째)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이 발언하고 있다. /박신 기자 

이어 서 위원은 현시점에 3.15의거가 직면한 문제 해법을 제시했다. 3.15의거 직전 경제적 배경에 관한 연구다.

서 위원은 “3.15의거 직전 마산은 귀환 동포, 전쟁 피난민 유입으로 인구가 급증한 도시”라며 “1950년대 말에는 미국 원조 급감, 태풍 피해 등으로 실업자도 대거 양산돼 사회 구조가 불안정했다”고 말했다.

이어 “3.15의거사에서 비교적 잘 드러나지 않는 노동자나 시민 역할을 이러한 연구에서 밝혀내야 한다”며 “본격적인 학술 연구가 진행되면 3.15의거가 마산에서, 누구에 의해, 왜 일어났는지가 명확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 위원은 이와 함께 △지역 민주화단체 간 연대 △3.15의거 부상자·참여자 명예회복 및 배·보상 △정기적인 학술 토론회 개최 △3.15의거사 개정판 발간 등을 제안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마산합포구 자산동에 있는 3.15의거탑 위치에 담긴 상징성을 주제로 한 발표도 있었다. 조정우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3.15의거탑을 중심으로 마산 형성 과정을 분석했다.

조 교수는 “마산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거주하던 신마산과 조선인과 일본인이 뒤섞여 살았던 구마산으로 나뉜다”며 “해방 이후에는 여러 행정시설이 모여있던 신마산과 상업과 교통 중심지 역할을 했던 구마산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3.15의거는 구마산에서 모인 군중이 시청, 경찰서 등이 있던 신마산으로 진격하는 과정”이라며 “신마산과 구마산의 경계가 지금 무학초등학교, 3.15의거탑이 세워져 있는 곳으로 가장 격렬했던 지점 가운데 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조 교수는 3.15의거탑의 진면모를 보려면 정면이 아닌 뒤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3.15의거탑 옆에 있는 동상이 가리키는 곳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동상을 보면 두 명은 학생이고 한 명은 지식인인데 이들이 공통으로 가리키는 방향은 무학초등학교”라며 “우연한 일치일 수도 있지만, 기념물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상징성을 부여할지는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박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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