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을 이룬 꽃들 관계 맺음 표현
수직-수평적 구조 다양한 존재
창원 대산미술관서 9회 개인전

꽃이 피고 지듯, 사람 사이도 피고 지는 인연이 있다. 관계란 어쩌면 장미처럼 매혹적이고 야생화처럼 끈질기다.

캔버스 위에 수 놓인 꽃을 보니, 모두 짝을 이루고 있다. 아홉 번째 개인전 ‘관계(Relation)’를 펼치는 이정림(60) 화가를 지난 11일 창원 대산미술관에서 만났다. 전시는 이달 31일까지 계속된다.

◇환대와 위로의 산물, 꽃 = 그림 속 꽃에는 향기가 없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 만남에는 향기를 불어 넣는 꽃이 때때로 필요하다. 누군가의 탄생을 축복할 때, 때로는 어느 생을 향해 애도를 표할 때 건넨다.

“꽃은 살면서 기쁘거나 슬프거나 모든 날 등장하는 매개라고 생각됩니다. 축하 의미를 담아 꽃을 선물할 때도 있고, 공간마다 환대의 의미로 꽃을 장식해 두기도 하니까요. 또한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 우리는 국화꽃 한 송이로 명복을 빕니다.”

이정림의 작품 속 꽃들은 위아래, 좌우 쌍으로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꽃은 관계 그 자체를 내포한다. 수직적 관계 또는 수평적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만물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구부터 이와 대조적으로 동등한 위치로 대하려는 노력이 그곳에 있다. 자연을 개발해 인간의 손아귀에 넣고 싶어 하는 욕망, 대자연의 품에서 공존하며 살아가는 연대감도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작품 속 꽃들은 홀로 있지 않습니다. 굵거나 얇은 넝쿨로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눈에 띄게 강하게 연결되어 있거나 자세히 들여다봐야 알 수 있는 것처럼 때로는 희미하게 연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꽃은 흙의 기운을 받고 자란다. 가려져 있지만 빼놓을 수 없는 토양을 표현하고자 이 작가는 캔버스 밑 작업에 많은 시간을 투여한다. 손으로도 뭉개고, 롤러를 활용해 밀기도 하고 태양과 바람이 지나간 자리를 표현하고자 애쓴다.

그의 캔버스를 채운 꽃들은 얼핏 보면 대부분 활짝 핀 상태다. 꼼꼼히 살피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운 존재가 있는데, 바로 시든 꽃이다.

“꽃은 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 있어요. 제 할 일을 다하고 지거나, 꼿꼿하게 고개 들고 있다가 줄기가 꺾인 상태도 있고, 세상사를 담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창원 대산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이정림 화가를 지난 11일 만났다. /박정연 기자
창원 대산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이정림 화가를 지난 11일 만났다. /박정연 기자

◇남미·아프리카에서 얻은 선물 = 이정림은 초기에 야생화를 주로 그렸다. 지천으로 널린 꽃, 누가 알아봐 주지 않아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존재를 표현했다. 그런 그에게 남미·아프리카에서 보낸 시간은 작품 활동에도, 삶의 지향점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0년 전 남미와 아프리카에 3년 정도 체류하면서 그곳에서 제 삶도 작품도 많이 돌아보게 됐습니다. 남편이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KOICA) 파견사업에 통신 분야 전문가로 뽑혀 국외로 나가면서 동행하게 된 것이 계기였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미술 수업으로 봉사도 하고, 작품 활동도 하면서 많은 분들 응원 속에 에콰도르 한인회관에서 생각지도 못한 개인전까지 열 수 있었습니다.”

9.11테러 이후 물감 반입도 어려운 먼 땅에서 재료를 겨우 구해서 그리고 또 그렸다. 그곳에서 이젤은 사치였다. 해거름 39도를 웃도는 기온 속 땀에 붓이 미끄러지는 환경에서도 온전히 그림을 그릴 수 있어 마냥 행복했다.

“유럽에 비하면 문화 강국은 아니지요. 남들은 그곳에서 무슨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겠느냐고 했지만, 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산이 주는 기운과 화산 지대에서도 살아가는 풀과 잡초, 꽃까지 생명력 넘치는 대자연을 매일 마주하는 일만큼 값어치 있는 삶이 어디 있을까 여겼습니다.”

그의 작품에 주된 소재가 꽃이라는 점에서는 변화가 없지만 표현하는 방식은 달라졌다. 문양의 반복과 색채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몸에 헤나를 그려 넣듯이 캔버스 위에 꽃을 한땀 한땀 수놓았다.

“탄자니아 잔지바르행 여객선에서 제 앞에 앉은 어떤 여성의 손을 보게 됐는데, 꽃문양 장갑을 끼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타투 일종인 헤나였습니다. 너무나도 세밀한 아라베스크 문양은 저에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기하학적인 대칭 구조는 신비함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작가는 작품 중심부에 큰 꽃을 그려 디자인적인 느낌을 주고, 주변을 채우는 작은 꽃들을 유기적으로 배치해 모든 개체는 연결되어 있음을 표출한다.

이정림 작 '관계' 시리즈. /이정림
이정림 작 '관계' 시리즈. /이정림

◇전업 작가로 오롯이 서기까지 = 창원미협 소속인 이정림은 2010년 창원 대동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지난해 김해 호수갤러리에서 8회 개인전 열고서 대산미술관서 선보이는 이번 9회 개인전은 어느 때보다 의미 있다. 10여 년 운영하던 미술학원을 정리하고 전업 작가를 선언하는 전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또 아이를 키우면서 그림 그리는 시간을 확보하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하루하루 시간과 사투를 벌이는 거죠. 먹고사는 문제도 중요하니 미술 학원을 운영했는데, 여러 고민 끝에 지난해 문을 닫고 작품 활동에 더욱 매진하기로 했습니다.”

2~3년마다 개인전을 열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부단히 그리며 버텼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자존감이 커졌다.

“전시장에 들어오는 사람들 표정을 유심히 봅니다. 꽃을 마주하는 이들 대부분은 활짝 미소를 짓는데, 그 표정을 보고 작가로서 힘을 많이 얻습니다. 아름답기만 한 꽃이 아니라 에너지를 전하는 전달자 역할을 때로는 하지요. 앞으로도 작품을 통해 환한 기운을 나누고 싶습니다.”

/박정연 기자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