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과 섬 이은 창선삼천포대교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올라
늑도 유적·단항왕후박나무 등
다리 건너편 볼거리도 풍성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 그건 마치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밀칠 때 나는 마찰음 같았다. 삼천포대교와 창선대교 사이 해협은 일정 주기로 물거품을 일으키며 뒤집혔다 다시 퍼지기를 반복했다. 바위에 부딪힌 바닷물은 사방으로 튀었다. 반면 다리 위에선 풍광만 보일 뿐 물결치는 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차량 소음만이 내내 귓가를 때렸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차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다리 위를 건너갔다. 옷깃으로 파고드는 쌀쌀한 바람 탓에 절로 몸을 웅크리게 되던 지난 22일, 사천에서 만난 남파랑길 모습이다.

삼천포대교. /최석환 기자

◇창선삼천포대교 이야기 따라 풍경 따라
사천과 남해가 이어지는 연결고리, 창선삼천포대교는 국내 최초로 섬과 섬을 이어준 다리다. 이 다리는 단항교, 창선교, 늑도교, 초양교 등 네 개로 구성돼 통칭 창선삼천포대교로 불린다. 2003년 4월 완공된 후 사천 삼천포와 남해에서 두 번째로 큰 섬 창선도를 잇는 가교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길이 3.4㎞에 이르는 이 다리의 시작과 끝이 사천과 남해가 아니던 시절부터 창선 북쪽 끝 단항마을 사람들은 생활권이 사천과 가까웠다. 다양한 어패류가 서식하는 생명이 펄떡거리는 땅이 삼천포였고, 지역민들이 앞바다에서 어업으로 거둬들인 어류를 판매하거나 도선을 타고 항구에서 장을 본 뒤 돌아가던 창구가 삼천포였다. 지역민들이 창선삼천포대교를 단순히 섬과 육지를 닿게 해 주고, 뭍에서 뭍으로 연결 해준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닌 다리로 평가하는 이유다.

다리 밑에서 낚시 중인 사천시민. /최석환 기자

4개 다리는 이런 배경도 배경이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게 외관이다. 언뜻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모두 시공법이 다르다. 각기 다른 개성이 드러난다. 빨간 다리와 바다가 어우러진 풍광이 눈길을 붙잡는다. 그 길을 걸으면 거대한 징검다리를 건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인도가 좁고 바로 옆에 차가 쌩하고 달리는 구간인 게 흠이지만 풍광을 눈에 담긴 좋은 장소다. 앞서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가 전국 도로를 대상으로 예술성, 미관, 역사성 등을 종합 평가해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을 선정해 발표한 바 있는데 창선삼천포대교도 높은 평가를 받아 그중 하나로 포함돼있다.

늑도 유적에 심긴 나무. 이곳 주변이 모두 유적지다. 하지만 늑도가 국제무역 중심지였다는 걸 단번에 알아챌 수 있는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최석환 기자
늑도 유적에 심긴 나무. 이곳 주변이 모두 유적지다. 하지만 늑도가 국제무역 중심지였다는 걸 단번에 알아챌 수 있는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최석환 기자

◇고대 국제무역 거점 늑도
삼천포대교를 건너면 문화유산이 하나 나온다. 늑도 유적이다. 늑도는 삼천포항과 창선도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섬이다. 행정구역상 사천시 대방동에 속하는데 이곳은 흔하디흔한 작은 섬처럼 보여도 사실 숨은 역사가 만만찮다.

과거부터 늑도는 해상 국제무역 거점 역할을 맡던 곳이었다. 한려수도의 중간 관문에 자리해 중심지로 기능했다. 직관적으로 이곳이 유적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건 늑도에서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동안 확인된 유산 면면과 수량을 보면 괜히 거점이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고대 시대에 만들어진 패총(조개더미)과 무덤 주거지를 비롯해 중국계 경질토기, 일본계 야요이 토기, 점토대 토기와 같은 각종 토기 유물이 늑도 곳곳에서 확인됐다. 오수전, 한나라 거울 등도 나왔다. 지금까지 확인된 출토 유물만 1만 3000여 점에 이른다. 이례적인 규모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돼있는 늑도 유적은 지정 규모가 15만 7904㎡다. 하지만 여러 차례 진행된 문화재 조사·연구기관 발굴조사 결과를 놓고 보면 늑도는 섬 전체가 청동기시대부터 삼한시대, 고려·조선시대로 이어지는 국내 최대규모 문화유적으로 평가된다. 국외 유물이 다수 확인된다는 점에서 고대국가 초기 단계에 형성된 복합유적이자, 한·중·일 간 고대 동아시아지역 문화교류 증거를 보여주는 귀중한 학술 자료라는 학계 평가도 나온다.

단항왕후박나무. /최석환 기자
단항왕후박나무. /최석환 기자

◇이순신 장군과 인연?...단항마을의 왕후박나무
늑도에서 남해 단항마을회관 방면으로 쭉 걸어가면 ‘단항왕후박나무’가 나온다. 조그마한 섬 대초도와 소초도를 싸고도는 창선면 외곽 마을에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이 나무는 남부지방에서 자라는 늘푸른나무과인 후박나무와 쌍둥이만큼이나 가까운 사이다. 이름도 생김새도 비슷하다. 단순히 잎이 조금 더 넓다고 해서 앞에 ‘왕’이란 접두사가 붙여졌다고 한다.

창선도 섬마을 들판에 단독으로 자라는 왕후박나무는 키가 8.6m, 밑동 둘레 11.1m에 달한다. 문화재 지정 당시에는 완벽한 반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갖추고 있었으나, 1995년 태풍 제니스 영향으로 모양이 크게 훼손됐다. 사다리꼴로 가지가 길게 자라고 있다.

동네에서는 이 나무가 이순신 장군과 인연이 있다는 말이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창선도에 머물면서 왕후박나무 주변에 자리를 잡고 승전의 기쁨과 쓰라림을 동시에 추슬렀다는 설이 그것이다. 사실로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나무 규모만 놓고 보면 여러 사람을 품기에 적합한 장소처럼 보인다. 지금도 이 나무는 마을 주민들과 방문객들에게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단항마을에서 만난 풍경. /최석환 기자
단항마을에서 만난 풍경. /최석환 기자

◇호젓한 걸음, 느릿한 시간
단항마을에서 벗어나 섬 안쪽을 파고들면 중앙에 산자락 여럿이 우뚝 솟아있다. 코스대로라면 가지 않아도 될 길이지만, 이날은 대사산 정상(261m)에 올라 금오산성이라는 이름의 성곽과 마주했다. 고려 말~조선 초에 만들어진 성곽이다.

남해금오산성. /최석환 기자

창선 동쪽 해안과 삼천포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성벽이 있다. 산성으로 오르기까지 경사가 급해 접근이 쉽지 않았는데 막상 올라 보니 아찔한 마음은 어느새 사라졌다. 바다를 시원하게 볼 수 있는 성곽은 아니나, 겨울 산에 몸을 기댄 채 호젓하게 풍광을 즐기기엔 충분했다. 공기까지 맑아 산행 끝 휴식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 하나를 넘어 동대만 간이역으로 이어지는 길을 밟았다. 동대만 간이역은 남해군이 조성한 관광시설이다. 철길도 없는 남해에 웬 간이역이 있나 싶었는데 특산물 장터와 음식점, 승마랜드 등 문화·관광시설이 들어선 곳이었다. 건물 외관도 역사와 비슷했다.

간이역 앞은 갈대숲이 넓게 퍼져있다. 고즈넉한 운치를 뽐내는 장소다. 눈길 주는 곳마다 갈대 밭이다. 평평한 땅 위로 갈색빛이 도드라진다. 아이들과 함께 찾은 남해 주민들도, 화사한 복장을 한 외지인들도 이곳에서는 잠시 발길을 멈췄다. 그 뒤로 보이는 바다와 어우러진 풍광을 눈에 담으면서 차츰차츰 그 매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길라잡이
남파랑길 36코스는 사천에서 출발해 남해로 이어지는 구간이다. 창선삼천포대교 건너 왕후박나무~창선면행정복지센터까지 코스가 짜여있다. 여러 산자락을 거쳐야 도착지에 도달할 수 있다. 남해까지 와서 산만 타는 건 심심한 일일 수 있으니 주변 관광지를 연계해 길을 훑는 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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