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투입 철도대 기념 사진첩
허정도 경남도총괄건축가 입수
1926년 8~10월 철길 부설 기록
진군 모습·교량공사 장면 담겨
철도사·건축 기법 등 파악 가능
"식민지·침략 발판 아픈 역사 자료"

창원 분지를 가로지르는 철도 진해선은 오랜 기간 창원지역 주민들의 이동과 물류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다. 〈경남도민일보>는 진해선 건설 초기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사진을 입수했다. 일본군이 진해선 건설에 직접 관여했음을 알려주는 단서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진해선 건설을 주도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시공 주체 등 구체적인 정보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자료는 허정도 경남도 총괄건축가가 일본에서 탈취 유물 조사 활동을 하는 지인에게서 입수해 보관해온 사진첩 일부다. 사진첩은 진해선 건설에 투입된 일본군 장교들이 훗날 당시를 추억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건네받은 것은 자료를 소개하는 일본어 글이 담긴 한 장과 사진 두 장이 실린 세 장 등 모두 넉 장이다.

사진 속 풍경은 멀리 산이 보이고 가까이는 평지가 있는 분지 모습으로 이곳이 창원임을 알 수 있다. 천선천이라고 설명한 곳에 건설 중인 다리 모습, 가벼운 차림으로 침목과 철제 궤도를 깔고 있는 일본군 모습도 보인다. '창원도착광경'이라는 설명이 붙은 면에는 소총을 메고 군장을 갖춘 일본군이 오와 열을 맞춰 창원으로 진군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넓은 논밭과 군데군데 작은 시골집, 그리고 다른 사진에 보이는 흰 옷 입은 창원군민의 순진한 표정과 대조되는 이들의 살벌한 기세는 식민지기에 조선인들이 느꼈을 무력감을 생각하게 한다.

왼쪽부터 '창원도착광경', '창원면부락'이라는 설명. 일본군 연습임시철도대가 창원으로 진군하고 있다. /허정도 경남도총괄건축가

이들은 소개글에 이를 펴낸 의미를 써 놨다. 아래는 전문 번역이다.
 
진해선의 궤도(레일) 부설 및 철제 도리 설치 공사를 연습으로 실시하기로 결정되어 철도1·2 두 연대로부터 구성된 연습 임시 철도대는 이케다(池田) 중좌(국군의 중령에 해당) 통솔 하에 대원 600명이 다이쇼(大正)15년(1926년) 8월 하순부터 10월 중순까지 50일간 풍토와 잘 싸워 글자 그대로 곤고결핍(困苦缺乏)을 견뎌 교가를 가설하는 것만 43일(?) 이 연장만 380여 m, 궤도를 부설한 길이는 13여 리(理·약 21㎞)다. 특히 조선 제2의 길이 터널인 장복산터널(길이 1여 리·약 1.6㎞)을 돌파하여 푸르고 고요한 바다에 모양 좋게 놓인 섬을, 떡갈나무를, 진해를 바라보았을 때의 느낌은 지금 생각해도 더없이 통쾌하다. 돌이켜보면 또한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사진첩을 펼쳐 두고 훗날의 이야깃거리로….   -다이쇼15년(1926년) 11월 엮음- /이창우 기자·허정도 건축가 번역 종합
 
내용을 풀자면 대대급 병력을 갖춘 일본군 연습임시철도대가 1926년 8월부터 10월 중순까지 50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다리 총 380m·철길 약 21㎞를 부설했고, 길이 약 1.6㎞로 당시 국내에서 두 번째로 크고 긴 터널이 된 장복산터널 개통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한국철도공사와 창원시는 진해선이 길이 21.2㎞ 노선으로 1926년 11월 11일 개통했다고 누리집에 밝히고 있다. 개통일에 임박해 실로 단기간에 노선 전체에 해당하는 철도를 깐 것이다. 

허 건축가는 "아마 지금이라면 삼 년은 걸리지 않겠나"라며 "이렇게 빨리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정밀하게 구역을 나눠서 시공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교량 작업은 전체 구간을 다 한 것 같다. 그러나, 교량을 세울 때에 기둥 위에 건너질러 위의 물체를 받치는 구조물인 도리를 설치하고 상부에 철길을 잇는 작업만 맡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조궤 인낙해 작업'이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 일본군 연습임시철도대가 진해선에 궤도를 놓는 모습이다. /허정도 경남도총괄건축가

철도대는 왜 이 시기에, 이곳에 왔을까. 누리망에서 찾을 수 있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의 자료는 개략적인 착수·완공 연도만 설명하고 있다. 상세한 내막을 알고자 한국철도공사 철도박물관의 배은선 관장에게 진해선의 역사를 물었다.

배 관장은 1986년 일본에서 발간, 자신이 번역에 참여해 국내에 나온 <조선교통사>라는 책을 소개했다. 관련 사실은 여기에 잘 나와 있다. 이 책은 일제 시기 조선총독부가 작성하다 전쟁과 해방으로 맥이 끊긴 조선 철도의 역사를 일본으로 돌아간 총독부 교통국 직원들이 정리해 맺은 것이다. 

배 관장은 "강점기에 조선인들은 중요한 직책을 맡지 못했기에 관련 내용을 알 수 없었고, 또 관련 문서들은 전쟁으로 유실되거나 해방 때 일제가 파기했기 때문에 이 시기 교통 건설에 관한 역사는 사실상 이 책에 모든 것을 기대고 있다"며 "국내 철도 개통 100주년인 1999년 나온 <한국철도 100년사>도 이 책을 많이 참고했다"고 설명했다.

책을 보면, 진해선 건설은 1910년 일본 육군 참모본부에서 사전 답사를 하는 등 계획부터 군이 개입해 이뤄졌다. 건설 목적이 애초 군항과 경부선을 연결하려는 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여러 사정으로 착공이 미뤄지다가 1920년에야 착공됐다.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으로 예산에 문제가 생겨 다시 공사가 중단됐다가 1925년 12월 다시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장복산터널은 1921년 12월 공사에 돌입해 이듬해부터 남북 양방향에서 굴을 파 나가기 시작했고 1924년 도갱 작업을 마친다.

'단상'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연습임시철도대가 진해선 내 교량에 '도리'를 설치하는 임무를 맡았다. /허정도 경남도총괄건축가

연습임시철도대는 이런 긴 과정의 막바지에 창원으로 온 것이다. 허정도 건축가가 추정했듯 철도대는 광궤 철도 부설 훈련을 겸해 궤도 부설 작업에 투입됐다. 책은 철도대가 1926년 8월 22일과 8월 30일에 나눠 창원에 도착한 뒤, 이튿날인 31일 작업에 착수했다고 말하고 있다. 철도대는 매일 10여 시간씩 작업했고, 9월 21일에는 야간 작업을 하다 교량이 낙하해 3명이 사망하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 이들은 10월 12일 작업을 종료하고 이어 14일 진해를 떠났다. 

사진은 이런 설명들을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문자 기록으로 짐작만 가능했던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게 한다는 데 가치가 있다는 평이다. 

배 관장은 "당시 상황은 <조선교통사>에 설명돼 있지만, 그 모습을 이 정도 해상도로 보게 된 것은 처음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 철도사는 기록이 한정된 만큼 왜곡이 많았는데, 1999년 이후 디지털화 등으로 많은 사람이 자료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교정이 많이 됐다"며 "이렇게 자료들이 모이고 사람들이 보게 되면서 역사 발굴의 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들은 소개글에 이를 펴낸 의미를 써놨다.

물론 조심스레 평가해야 할 지점이 있다. 진해선이 창원지역 사람들에게 여러 편의를 주었음에도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와 대륙 침략 발판을 목적으로 지어졌고, 활용됐다는 점을 알아야 하듯 말이다. 

배 관장은 "<조선교통사>는 철저히 총독부 직원, 즉 일제의 시각으로 적혔다는 점을 알고 내용을 받아들여야 한다"라며 "이 자료들도 그런 점을 고려해 그 의미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허정도 건축가는 "이 자료들은 당시의 철도사와 건축기법에 관해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면서도, 독자들에게 이번 자료 공개를 식민지기 아픈 역사를 되새기는 계기로 삼길 당부하는 말을 남겼다. 그는 "창원 원주민들은 우리가 주권을 가진 1970년대에마저 농토를 반 강제로 빼앗겼는데, 하물며 일제시대에 철도를 놓으며 원주민들의 입장을 배려했겠는가"라며 "사진을 통해 국권을 잃은 아픔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자료가 지닌 공공성을 생각해 공개하게 됐다"며 "나중에 창원박물관이나 기록관이 생기면 자료를 주신 분께 원본 기증을 부탁해 볼 생각이다"라고 말을 맺었다.
/강찬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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