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구면 장구 북이면 북 타고난 국악 예술인
어렸을 때 부모님 공부하라 대신 악기 사줘
고교 시절 기타에 빠졌지만 손가락 짧아 포기
1995년 농청놀이 상쇠· 2021년 보존회장 맡아

지난해 12월 29일 마산문화예술센터 시민극장에서 ‘창원의 무형문화유산 춤을 재생하다’라는 공연이 있었다. 마산의 명무 이필이, 김해랑, 김애정류의 춤사위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던 특별한 기획이었다. 이 공연에서 창원문화재단 진해문화센터 본부장을 지낸 장순향 김애정전통춤보존회장의 살풀이춤에 장구 장단을 넣던 이를 눈여겨보았다. 그는 장구를 치면서도 한순간도 장순향의 춤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안내 전단을 보니 ‘장구 김만연, 마산농청놀이보존회장, 경남무형문화재 제6호 예능보유자’라고 적혔다.

춤과 어울리는 장구장단이나 판소리에 어울리는 북장단은 어지간한 실력으론 어림도 없다. 정확한 박을 알아야 하고 또한 박의 변화무쌍한 상황에도 즉흥적으로 연희자와 호흡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실력도 있어야 하고 신명도 있어야 ‘고수’가 될 수 있는 분야다. 주변 예술인들에게 김만연이라는 인물에 대해 물었다. 한결같이 돌아오는 답이 “그는 이미 예술이 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기억을 더듬었다. 아하! 그러고 보니 지난해 12월 지역의 소리꾼 정영자의 송음국악예술단 공연 때엔 북채를 잡았구나. 김만연(62)이라는 인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예술’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지난 2일 마산합포구 중앙동 ‘도지정 무형문화재민속예술전수관’ 사무실로 그를 찾아갔다.

김만연 마산농청놀이보존회장이 2일 마산합포구 중앙동 도지정 무형문화재민속예술전수관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정현수 기자
김만연 마산농청놀이보존회장이 2일 마산합포구 중앙동 도지정 무형문화재민속예술전수관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정현수 기자

◇개다리춤을 추던 어린 시절 = “국악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25살 쯤이었어요.” 의외다. 사실 타고난 예술가들 대부분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끼를 보였다고 하던데, 25살이라니. 그 전엔 어떻게 보냈냐니까 어릴 때부터 음악은 하고 싶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TV에 나오던 배삼룡, 구봉서 같은 코미디언들 인기 있었잖아요. 학교에서 종종 배삼룡의 그 개다리춤도 추고 수박 먹으며 씨 발라내는 흉내도 곧잘 냈어요. 우리 학년에 반이 3개였는데, 합동 오락시간에 불려 나가기도 했죠. 저는 내성적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빼지 않고 했던 것 같네요.” 많은 예술인의 공통점이다. 내성적인데 외향적 행동을 보이는 유형. 어쨌든 김만연 회장도 그때부터 끼가 발산되기 시작했다.

김 회장이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동네슈퍼를 운영하던 어머니는 늘 황금심의 ‘삼다도 소식’을 불렀다고 한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배터리 넣어서 사용하는 소형 건반악기를 사주셨어요. 직접 연주하며 골목골목 다니던 행상한테서 샀는데, 나보고 악기를 배워보라고 하신 거죠. 당시 어느 집이나 자식들 공부하란 소리만 하던 시절이었는데 우리 집은 달랐어요.”

어린 아들에게 악기를 사 준 데엔 어머니의 욕심도 한몫했을 듯싶다. 김 회장은 어머니의 애창곡 ‘삼다도 소식’에 곧잘 반주했다고 한다. 김 회장의 음악성은 그때 깨어난 듯하다. “외항선을 타던 외삼촌이 어느 날 집에 왔는데, 길쭉한 하모니카를 꺼내 부는 거예요. 처음 보는 거였죠. 한 번 불러보니까 소리가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그 하모니카를 불고 싶어서 매일 외삼촌 집엘 갔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문을 안 열어주는 거예요. 그 후로 용돈 모아서 하모니카를 사서 부는데, 소리가 그것과는 다르니까 금방 싫증이 나더군요.”

◇손가락이 짧아서 = 김 회장이 본격적으로 음악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중학생쯤, 6살 터울의 고등학생 형과 친구들이 집에 놀러와 대청마루에서 기타를 치고 놀았던 게 계기였다. “그렇게 대청마루에서 기타연주를 하면서 놀더니 갑자기 어디로 간다며 나간 거예요. 기타를 마루에 세워놓았는데, 가서 드르릉 쳐보니 기가 막힌 소리가 나요. 그래서 그걸 들고 형들이 오기 전에 쳐봐야겠다 싶어서 코드도 모르지만 쳐본 거예요.”

그 기분 알 것 같다. 처음 만져보는 기타의 그 매력적인 소리가 어린 김 회장의 마음을 얼마나 흔들었을까. 그 흔들린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또 있었다. 아버지가 방에서 아들의 기타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김 회장은 그 이듬애 생일 때 아버지 손에 끌려 중앙시장으로 갔다. 아버지는 어느 레코드사에 들러 당시로는 꽤 괜찮은 기타를 선물로 사주셨다. 김 회장은 내친김에 서점에 들러 악보집도 샀다. 본격적인 기타 독한의 시작이었다.

실력도 나날이 늘었다. 기타도 클래식으로 갈아탔다. 철 소리가 나는 포크와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클래식 기타의 부드러운 소리에 다시 푹 빠졌다.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어서 기타학원에 다녔다. “당시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제대로 된 기타연주를 들어보지도 못했죠. 그게 아직 마음에 남아 있어요.” 기타연주에 대한 욕심은 점점 거세져 갔다. 급기야 당시 기타협회 회장의 제자가 직접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고 용돈을 털어서 찾아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기타를 배웠다. 그런데 고난도의 연주법을 배우면서 기타에 대한 열정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연주할 때마다 삐빅거리는 소리가 나요. 트레몰로 주법으로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을 연주할 때 손가락을 길게 잡아야 하는데, 제 손가락이 짧다 보니 제대로 잡히지가 않는 거예요. 다른 곡들도 보니까 내 손가락으로 연주하기 어려운 게 많고. 그렇다고 손가락을 따낼 수도 없고. 하하하.”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후배들과 그룹사운드를 만들기도 했단다. 연습 장소가 마땅하지 않아 후배 집 외양간에서 연습했는데, 워낙 소란스럽다 보니 동네 아줌마들이 난리가 났다고. 그렇게 김 회장은 서서히 기타와 멀어졌다.

◇잠들어 있던 본능을 깨운 동네 연희단 공연 = 25살 즈음에 동네 부잣집에서 잔치가 열렸다. 그 잔치에 전문적인 연희단이 와서 공연했다. 김 회장이 보기에 동네에서 지신밟기하는 수준의 연희가 아니었다. 그 공연을 보면서 가슴이 그렇게 뛰는 것을 처음 느꼈다.

“북소리 징소리 장구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확 들어온 거지요. 서양음악을 이미 해놓은 상태다 보니까 그 소리가 크게 다가온 거죠.” 그래서 창원공단 안에 있는 노동풍물단에도 기웃거리게 되고 노인정에 가서도 장구를 배우고 했단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장구를 쳤단다. 그때가 1987년이었다. 풍물을 하다 보니 농청놀이도 알게 되고 1989년에는 농청놀이 부설 단체인 마산 두레농악에 들어가 제주에서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 장려상을 받았다.

그 이후로 김 회장은 민속예술 보전의 길을 한결같이 걸어오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경남무형문화재 6호 마산농청놀이 예능보유자다. 1995년 당시 예능보유자였던 배종국 선생의 건강이 악화하면서 상쇠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그는 두말하지 않고 그러겠다고 한 뒤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2021년엔 구상훈 전임회장이 돌아가시면서 회장을 맡아 단체를 이끌어오고 있다. 마산농청놀이는 매년 만날제 기간에 정기공연을 연다.

농청놀이 첫째마당 기제./마산농청놀이
농청놀이 첫째마당 기제./마산농청놀이
농청놀이 둘째마당 기싸움./마산농청놀이
농청놀이 둘째마당 기싸움./마산농청놀이
농청놀이 셋째마당 축원./마산농청놀이
농청놀이 셋째마당 축원./마산농청놀이
농청놀이 넷째마당 흥취와 회향./마산농청놀이
농청놀이 넷째마당 흥취와 회향./마산농청놀이

◇마산농청놀이란 = 마산의 전통 민속놀이로 마산회원구 봉암동 반룡산(팔룡산)에 있는 상투바위에 고사를 지냄으로써 풍작을 기원하는 제의성이 강한 백중날의 행사로 이어져 왔다. 시작된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조선 숙종(1700년) 대부터 자연 발생해 연례행사로 치러졌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중단되었다가 1981년 10월에 다시 발굴되어 1983년에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농청놀이의 핵심은 기(旗) 싸움으로 총 4개의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상투바위로 떠나기 전에 기제(旗祭)를 올리는 마당, 둘째는 구강농청패와 봉정농청패로 나뉜 두 농청패의 기싸움 마당, 셋째는 기싸움이 끝난 뒤 음식을 차려놓고 ‘성신선고’라는 기도문을 올리는 축원마당, 마지막 넷째는 흥취와 회향 마당으로 농청원들이 술과 음식을 실컷 마시고 먹으며 농청 간에 씨름 등 여러 놀이를 하며 마무리한다.

김 회장은 농청놀이를 잘 보전하는 한편 스스로 늘 부족하다고 여겨 배우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판소리고법 예능보유자 김청만 선생으로부터 15년째 북장단을 배우고 있다.

/정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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