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침략 피해 가장 컸던 경남
기근·전염병에 식인 행위까지
지배 세력, 체제 유지에 안간힘
유교 이념 강화에 불평등 커져

1592년 음력 4월 14일, 일본군 14만 명이 조선으로 향하면서 7년 전쟁은 시작되었다. 일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짐작한 조선 정부는 일부 대비를 하고 있었으나 그렇게 많은 병력이 침략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수백 년 동안의 내전으로 다져진 일본군의 전투력도 대단했지만 대규모 병력에 놀란 경상도 지역 방어 책임자들이 물러서는 일이 더 문제였다. 

그렇게 경상도 지역은 속절없이 일본군의 손에 떨어지는가 싶었다. 일본군은 경상도 지역에 병력을 드문드문 배치하고 일본 장수는 지방관을 자처하고, 그동안 양성한 통역관을 통해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경상도를 일본의 영지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 후방 보급 부대를 습격하고, 이순신이 남해안 제해권을 장악하고, 초유사 김성일을 통해 지역 방위 체계를 회복하면서 일본군은 전쟁 수행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결국 일본군은 진주성 전투, 한산도 해전, 전라도 침공전에서 모두 패하면서 전쟁 수행이 어려워졌고 명나라군 마저 참전하게 되자 전 병력을 경상도 동남해안 일대로 후퇴하면서 7년 전쟁의 1막이 끝났다. 이어 1597년에도 일본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이순신이 부재한 조선 수군을 대파하고, 병력을 집중적으로 동원해 전라도를 점령하고, 조선 백성을 학살하는 등 과거와는 달라진 모습을 보였으나 큰 변화는 없었다. 곧바로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복귀한 조선 수군에 패배했고, 한양 공격도 조선·명나라 연합군에게 막히면서 별수 없이 경상도 동남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쌓은 왜성으로 철수했다. 일본군 지휘관들에게 이 전쟁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고, 일본 내 영주였던 그들은 소유한 인적·물적 자원을 한없이 소모하는 이 전쟁을 더는 감당하려 하지 않았다.

왜성에 눌어붙은 일본군을 조선·명나라 연합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몰아내려 했으나 그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러던 중 전쟁의 시발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 퇴각이 결정됐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일본군 퇴로를 끊고 큰 피해를 줬고,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동래부사 송상현을 기리는 부산 안락서원. /부산시
동래부사 송상현을 기리는 부산 안락서원. /부산시

◇엄청난 피해를 본 경상도 = 전쟁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지역은 당연히 경상도였다. 특히 동남해안 지방은 오랫동안 일본군 주둔으로 수탈당했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기근이었다. 1592년 일본군이 침공해 온 시기는 보리 수확 직전이었다. 가장 배고픈 시기에 일본군이 쳐들어오면서 피난민이 된 경상도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이듬해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경상도 서부 내륙지역만 온전했을 뿐 1·2차 진주성 전투 경로에 있었던 함안·창원 지역과 휴전협정 이후 일본군 퇴각로에 있었던 상주·성주·구미를 포함해 경상도 중동부 지역은 2년 연속 곡식을 거두지도, 농사를 온전히 짓지도 못했다. 그러자 전염병이 발생했다.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전염병이 번져 나갔고 수많은 백성이 1592년에서 1594년 사이 사망했다.

선산 김씨 족보에 따르면 이들은 지역 최대 유지 집안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김취문·김취기 형제는 일가와 노비를 이끌고 금오산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1592년 8월부터 9월 사이 전염병으로 김취문·김취기 일가는 절반 가까이 죽었다. 선산 김씨는 이 시기 32개 집안 가운데 10곳이 대가 끊겼다. 이러한 선산 김씨 일가의 비극은 경상도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다수 백성들은 피난민이 되었지만, 일부 백성들은 강도떼가 되었다. 당시 경상도를 둘러본 안집사 김늑은 조선 조정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경상도에서 토적(土賊·강도떼)들이 일어나 수십 명씩 무리 지어 대낮에도 재물을 빼앗고 인명을 살상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는데 처음 일어났을 적에 소탕하지 않으면 뒤에 도모할 대책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본도의 기근이 날로 심해지고 질역(疾疫)이 끊이지 않아 쓰러져 있는 시체들이 즐비하여, 그 참혹한 정상을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모든 곡식의 종자 역시 전부 떨어져 전라도에서 수송해 올 곡식만을 날마다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습니다. 조정에서는 전라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지시해 그들로 하여금 곡식을 급히 운반하여 경상도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소서."

동래성 발굴 중 발견된 7년 전쟁 당시 유골. /경남문화재연구원
동래성 발굴 중 발견된 7년 전쟁 당시 유골. /경남문화재연구원

◇피난·수탈·기근·전염병에 식인 행위까지 =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따르면 백성들에 비해 사정이 나았던 한산 통제영에서도 수많은 병사가 굶주림과 질병으로 쓰러졌다. 이순신이 1594년 봄에 보고한 장계에 따르면 삼도 수군 1만 7000여 명 중 사망자가 1904명, 감염자가 3759명에 달해 병력의 3분의 1 가까이를 기근과 질병으로 잃었다.

강도떼가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이 쓰러져가는 경상도 지역에서 식인 행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593년 일본군 퇴각로 일부 지역에서 나타난 식인 행위는 1594년에는 경상도 각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신을 먹었지만, 나중에는 산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었다. 강도떼는 가장 만만한 사람을 사냥 대상으로 삼았다. 이 시기 홀로 길을 걷다 강도떼에게 잡아먹힌 사람이 흔했다. 

구미 지역 유학자 장현광은 <피난록>에서 지역의 유생 김석규가 실종되자 "서로 잡아먹는 자들의 손아귀에 잡혀 죽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어 장현광은 "가장 극단적인 상황은 식인 행위였는데 부자간에, 형제간에, 그리고 부부간에 서로 잡아먹었다"며 "이런 변고는 천고(千古)에 없던 일들이다"고 탄식했다.

피난-수탈-기근-식인행위-전염병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사이클이 경상도에서 1592년부터 1594년까지 계속 이어졌다. 1594년 여름부터 전염병이 누그러들고, 전투가 뜸해지자 피난민들은 마을로 돌아와 농사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1597년 일본군이 재차 침공하면서 간신히 정착했던 백성들은 다시 흩어졌고, 일본군이 집중적으로 노예사냥을 하면서 많은 백성이 끌려갔다. 이 시기 조선인 약 10만 명이 노예로 끌려갔고, 다수는 경상도 백성들로 추정된다. 

◇더욱 강화된 유교 이념 = 거대한 실패와 참상을 겪은 후 역사는 보통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게 된다. 하나는 과거를 반성하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체제로의 개혁을 시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반대로 과거를 반성하기보다 실패한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동한 경우가 더 많다. 예를 들어 중세 말 기독교 유럽 사회에서 십자군 전쟁의 실패, 교회 부패와 타락으로 기독교 체제가 흔들리자 지배 계층은 이단 심판, 마녀사냥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체제를 보전하려 하였다.

조선 또한 비슷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백성을 지키지 못한 책임에 몰린 조선 지배 계층은 대대적으로 향약을 보급하고, 서당·서원·향교를 각지에 세워 유교 이념 강화에 힘썼다. 

가정 내에서도 유교 이념에 따른 불평등이 강화되었다. 예를 들어 <분재기(分財記·조선시대 양반 집안 재산 분배를 기록한 문서)>에서 7년 전쟁 직후(1600년)까지 24건의 상속 중 21건이 남녀 구별 없는 완전 균분상속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와 말기에 이르면서 우리가 아는 대로 장자 중심, 남성 중심 불평등 상속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조선 정부는 부족한 조세를 채우기 위해 백성들에게 물품을 받고 벼슬을 파는 납속을 장려하였다. 이에 따라 수많은 백성이 '양반'이 되었고, 그들은 지역 기존 양반들의 유교적 방식을 따라하면서 유교 이념은 더욱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끝으로 동아시아 판도 또한 크게 변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르던 영주들이 7년 전쟁으로 큰 피해를 봤고, 경쟁 세력인 도쿠가와 막부가 최종적인 승자가 되었다. 명나라와 조선이 쇠퇴하자 여진족은 기회를 얻었다. 역사는 돌이킬 수 없었고, 좋든 싫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끝> 

/임종금 시민기자(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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