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교 담임 칭찬 덕에 좌절 않고
경제적 난관 극복해 교사 합격
아이들 꿈 보듬는 선생님으로

퇴직 직후엔 우간다 교육 봉사
사업 지원 끌어내 교실도 지어
귀국 후 디지털 강사로 새 출발

최정란,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은 미술 교사로 교단에 섰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1981년 고성회화중학교 교사로 초임 발령을 받아서 2019년 창원 명곡여자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하기까지 37년 이상의 시간을 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해 온 삶은 보람되고 아름다웠다. 이제 최선을 다해 살아왔던 교단의 시간이 끝났지만 그는 학교에서 세상으로 지경을 넓혀서 지금도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최정란 이모작지원센터 협동조합 이사는 40여 년간 교사로 재직했다. /윤은주 시민기자
최정란 이모작지원센터 협동조합 이사는 40여 년간 교사로 재직했다. /윤은주 시민기자

◇절실했던 시기 = 그는 1957년 대전에서 출생했다. 3남 3녀 육 남매의 다섯째, 그가 다섯 살, 막냇동생이 세 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구멍가게를 운영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나이 차가 많이 났던 언니들은 돈 벌러 가고 오빠들은 학교에 다녀서 어린 나이부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눈에 띄지 않는 내성적인 아이였던 그의 마음에 처음으로 희망의 불이 켜졌다. 담임 선생님이 미술 시간에 그의 그림을 친구들 앞에 보여주며 칭찬했다. 그때부터 미술실은 그의 피난처가 됐다. 학원에 다닐 형편이 못 돼서 미술실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결핍은 뜨거운 열망이 되었고, 고교 시절 당시 수도사범대학(현 세종대)에서 열렸던 미술대회에 입상하면서 미술을 향한 열망은 더욱 뜨거워졌다. 

어려운 형편으로 고생하는 가족들에게 차마 대학 진학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어서 가족들 몰래 혼자 예비고사를 치러 갔다. 도시락도 못 싸 점심도 굶으며 시험을 쳤는데 서울 지역과 대전 지역에 지원한 두 곳에 모두 합격했다. 오빠는 여자가 무슨 대학이냐고 기막혀했지만 어머니는 고생한 딸에게 어떻게든 대학을 마치도록 돕겠다며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 

융자로 간신히 학교를 마치고 졸업을 앞둔 시점, 학교 게시판에서 경상남도 지역의 임용공고를 보고 1980년 12월 25일 마산동중으로 와서 시험을 쳤다. 그때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절실한 시기였다.

어머니가 지인의 빚보증을 잘못 서서 살던 집을 날리고 갈 곳이 없었다. 갓 결혼한 오빠의 신혼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얹혀살던 형편이었기에 그에게 취업은 더없이 간절하고 유일한 탈출구였다. 시험을 치고 하루에도 몇 번 우체통을 확인하며 합격 소식을 기다리다 더는 못 견뎌서 교육청에 전화를 걸어 그토록 기대하던 합격 소식을 들었다. 날 듯이 기뻤다. 

하지만 합격 후 발령까지 6개월이 더 걸렸다. 1981년 6월 1일 자로 발령받아서 오빠가 이사 비용으로 준비해두었던 10만 원을 들고 고성으로 와서 어머니와의 생활을 시작했다. 월급날인 17일까지 버틸 수 있을까 걱정될 정도로 빈털터리였다. 결핍을 경험해 본 사람은 소유의 가치를 안다. 첫 월급을 받았던 때, 보너스까지 나오는 달이라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된 듯했다고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최정란 이모작지원센터 협동조합 이사는 40여 년간 교사로 재직했다. /윤은주 시민기자
최정란 이모작지원센터 협동조합 이사는 2019년 창원 명곡여중 교장에서 정년 퇴임했다. /최정란 제공

◇강단 있는 선생님 = 일주일에 27시간 수업하는 일정도 강행군이었지만 말투가 달라서 어려움이 컸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성실로 삶의 난관을 건넜다. 함안종고로 발령받아서 진로 상담 교사 자격을 취득했고, 학교가 막 전산화 단계에 접어들어 최첨단 자격이었던 워드프로세서 1급 자격까지 얻게 되니, 높은 근무평점을 받아 함안종고 최초로 여성부장 교사로 임명됐다. 

이후 교감으로 승진하여 구산중학교 구남분교장에서 1년 근무 후 2009년 내서중학교로 발령받았다. 당시만 해도 여성이 교장·교감 등의 관리자가 되는 경우가 드물었고, 교장도 여성 교감을 꺼리는 분위기가 강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우려를 순식간에 불식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개별 특성화 진로 교육을 했고 개인별 포트폴리오도 만들었다. 이런 노력으로 내서중학교는 대한민국 100대 교육 과정 학교에 선정되었다. 당연히 교장 자격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서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었다. 예기치 않은 일로 교장 임명이 늦어지자 그는 스스로 길을 찾았고 2015년 3월 1일 창원 명곡여자중학교 공모 교장으로 발령받았다.

2019년 2월까지 4년간 그는 명곡여자중학교의 다정하고 따뜻하지만 강단 있는 교장 선생님이었다. 2억 원을 지원받아 문화적으로 낙후 지역이던 학교에 예술꽃 씨앗 학교 사업을 했다. 그 돈으로 학생들이 만화·애니메이션·사진·회화 등 다방면의 예술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아이들의 마음에 심어준 씨앗이 머지않은 내일에 예술 꽃으로 피어나리라 믿고 있다.

최정란 이모작지원센터 협동조합 이사는 정년 퇴직 후에는 아프리카 우간다로 떠나 현지 아이들을 가르치는 봉사 활동을 했다. /윤은주 시민기자
최정란 이모작지원센터 협동조합 이사는 정년 퇴직 후에는 아프리카 우간다로 떠나 현지 아이들을 가르치는 봉사 활동을 했다. /최정란 제공

◇코이카 해외 봉사단 = 퇴직을 1년여 앞두고 제3의 삶을 고민하다가 퇴직자 연수에서 코이카 해외 봉사단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다시 가슴이 뛰었다. 1년여를 운동과 외국어 공부 등으로 준비하며 지원서를 냈다. 가족들에게 평생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1년의 휴가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퇴직일인 2019년 2월 28일을 하루 앞둔 날에 최종 합격 통지를 받고 퇴임 직후 강원도 영월에서 2개월간 연수를 거친 뒤 5월 6일 아프리카 우간다로 떠났다. 우간다의 은산지 중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생활 여건은 힘들었지만 최고로 보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아픔도 있었다. 그가 아프리카에 가 있는 동안 어머니와 언니가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황급히 귀국해서 장례를 치른 뒤 아픔을 아픔만으로 묶어두지 않는 그의 성정이 빛을 발했다. 조의금 중 500만 원을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장학금으로 기탁해 마스크를 기부하고, 많은 아이가 학업을 계속하도록 도왔던 것이다. 이 일이야말로 아이들 인생을 바꾸는 프로젝트가 되었다.  

우간다로 현지 사람들과 찍은 기념 사진. /윤은주 시민기자
우간다로 현지 사람들과 찍은 기념 사진. /최정란 제공

그런가 하면 코로나19라는 복병으로 11개월여 활동을 한 뒤 본부의 긴급 대피 명령을 받고 이틀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 일도 있었다. 어떤 방법으로 더 의미 있게 아프리카 학교를 도울지 고민하던 중 교사 관리와 교실이 가장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코이카에 사업 지원을 요청해 3만 달러 지원을 결정받아 교사 출퇴근 지문인식 시스템 도입과 교실 증축 계획을 세웠는데, 귀국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직접 관리 감독하지는 못하지만 방법은 있었다. 왓츠앱과 이메일 등으로 소통하며 결국 애초의 계획을 완료했다. 멀리서 아프리카의 우간다 중등학교에 교실을 짓고 지문인식기를 도입했으며 은산지 중등학교와 창원 도계중학교 간 국제 학생 작품 교류전을 개최했다. 그러는 틈틈이 학교 등을 찾아 아프리카 교육 현실에 관한 강의도 했다. 파견 교육 당시 가장 걱정거리로 비쳤던 그는 가장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해낸 사람이 됐다. 모든 사업을 종료했을 때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이제 또 이모작지원센터 협동조합을 출범해 재능을 기부하고 있다. /최정란
그는 이제 또 이모작지원센터 협동조합을 출범해 재능을 기부하고 있다. /최정란

◇더 바쁠 앞으로의 나날 = 2021년 4월 말, 2년간의 코이카 프로젝트를 끝내고 그는 경남인생이모작지원센터에서 스마트폰 교육 강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또다시 새로운 길을 발견한 것이다. 8주간의 교육 후 자격증을 받았지만 성에 차지 않아 서울에서 교육받았다. 이후 유튜브 크리에이터 지도사, 디지털 튜터 자격을 받고 지금은 창원 시내 도서관과 각 기관 등에서 강사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과 의기투합해서 2022년 12월에 이모작지원센터 협동조합을 출범해 재능을 기부하고 지식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디지털 소외 계층을 위해 재능을 기부하며 지식을 나누고 '드리미초이'란 필명으로 블로그를 운영하며 1일 1포스팅을 실천하고 있다. 코이카 봉사활동 경험을 담은 <코이카 해외 봉사단 선정과 활동 노하우>란 전자책을 펴내고 경남인생이모작지원센터에서 수기를 써 상을 받기도 했다. 2023년에는 창원시 블로그 기자단으로 선정돼 활동 중이며 어떻게든 아프리카와의 인연도 계속 이어 나갈 예정이니, 어쩌면 앞으로의 시간이 지금까지의 시간보다 더 바쁠 것 같다.

누구나 늙음을 맞게 된다. 인생 절정의 시간은 지나고 이후에 무엇이 기다릴지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늙음이란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임을 최정란, 그를 보며 다시 생각한다. 오늘도 열심히 디지털 교육 현장을 누비는 그는 여전한 현역, 나이를 초월한 아름다운 청년이다. 

/윤은주 시민기자(수필가·꿈꾸는산호작은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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