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부터 청어람협의체 중심
함께 나누는 공동체 복원 실험
공유공간 활용 강의·행사 열어
공동 육아와 반찬 수익금 나눔
아파트 안팎으로 연대 힘 보태

각자도생 시대다. 기쁨과 슬픔, 갓 만든 반찬까지 온 동네가 나누던 모습은 간데없고, 명절에 친척 얼굴 보기도 어렵다. 각자 이룬 삶의 성취와 사회적 계급을 어떤 아파트에 사는지로 평가하는가 하면, 그 안에서조차 분양인지 임대인지 따져 묻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다시 연대'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공동체를 이뤄 함께 아이를 키우며 노인의 힘을 빌리는 곳. 이웃을 향한 관심을 넘어 아파트 안팎 노동자들과도 어깨동무를 하는 곳이다. 양산신도시청어람아파트(1724가구) 입주민들이다.

양산시 남부동에 자리한 청어람아파트. /김구연 기자
양산시 남부동에 자리한 청어람아파트. /김구연 기자

◇공동체를 복원하다 = "층간 소음으로 중대범죄가 발생하는 등 여러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죠. 결국 소통이 부족하다고 봤고, 작더라도 우리 안의 공동체를 되살리는 것부터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권현우(46) 양산신도시청어람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이하 입대위) 대표가 '공동체 복원 실험'을 시작한 계기는 사소했다. 사실 공동체라는 개념은 모호하고 막연하다. 권 대표가 생각한 공동체의 모습은 '함께 나누는 집단'이었다. 사람들이 모일 일을 만들고  마음을 나누면, 그 선의가 돌고 돌아 순환하는 그림이다. 만남과 나눔의 과정에서 유대감을 쌓고, 함께 할 일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청어람아파트 입주민들이 회의를 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청어람아파트 입주민들이 회의를 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조금씩 일을 벌였다. 기후위기·글쓰기 등 사람들이 관심 둘 만한 다양한 강의를 열거나, 화합 한마당 행사에서 벼룩시장·그림그리기 대회를 진행하며 입주민 사이 거리감을 줄였다. 지난해 행복 공동 밥상 행사에서는 주민은 물론 미화 노동자들까지 한 끼 식사를 같이했다. 

'더불어 사는 기쁨'을 체득한 사람들은 이제 매달 단지 안팎의 취약 계층에 반찬을 배달하고, 김장을 나눈다. 지난 2년은 입주민들이 아파트에 사는 동안 어느새 잊고 살던 '마을'의 모습을 복원하는 시간이었다.

청어람아파트 노인 회원들이 단지 안팎 취약 계층들에게 나눠줄 반찬을 만들고 있다. /양산신도시청어람아파트
청어람아파트 노인 회원들이 단지 안팎 취약 계층들에게 나눠줄 반찬을 만들고 있다. /양산신도시청어람아파트

◇아파트협의체와 공유 공간 = 아파트 공동체가 여기까지 온 과정에서 '청어람협의체'라는 소통기구와 '청어람작은도서관'이라는 공유공간 두 가지를 빼놓을 수 없다. 

청어람협의체는 공동체 복원 실험을 이끄는 주체이자, 아파트 내 모든 단체가 참여하는 소통기구다. 입대위·선거관리위·송주법위·층간소음분쟁위·헬스장관리위·노인회·부녀회·청년회 등 14개 단체가 참여한다.

입대위는 층간소음·주차 등 보통의 민원 해결을 맡고, 공동체 사업 관련해서는 협의체의 일원으로 소통한다. 때문에 입대위 임기가 끝나더라도 사업이 단절될 걱정이 없다. 정부(입대위)가 국회(협의체) 눈치를 봐야 하는 구조라고 할까. 입대위 외 다른 단체들도 적극적으로 사업 제안을 하거나 실행에 참여하고 있다. 

청어람아파트 입주민들의 소중한 공간인 도서관. /김구연 기자
청어람아파트 입주민들의 소중한 공간인 도서관. /김구연 기자

청어람작은도서관은 대부분의 공동체 사업을 진행하는 공간이다. 원래 노후화해 입주민들이 잘 찾지 않았지만, 2021년 경남도 아파트 공동체 공유공간 조성 지원사업에 선정돼 복합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이 건물에는 원래 여러 자생 단체 사무실도 있었는데, 기꺼이 공간을 비웠다. 현재 청년회 사무실은 교육실로, 부녀회 사무실은 아이돌봄센터로, 입대위 사무실은 헬스장으로 거듭났다. 

공유공간에서는 어린이들이 윷놀이하며 뛰어놀고, 어린이집·유치원 행사도 연다. 주민들이 수시로 열리는 강연을 듣는 곳이기도 하다. 입주민이자 공유공간 자원활동가 황은희(49) 씨는 "다른 아파트에 살 때는 이웃들과 복도에서 만나도 인사도 안 했고, 학부모로 만나는 정도가 다였다"라며 "청어람에 처음 왔을 때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였지만, 작은 도서관이 공유공간으로 거듭난 뒤 교류가 많아지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청어람아파트 주민들이 관리동에서 열린 장터에서 반찬을 사고 있다. /김구연 기자
청어람아파트 주민들이 관리동에서 열린 장터에서 반찬을 사고 있다. /김구연 기자

◇아이와 노인이 공동체 중심 = 박은숙(44) 청어람작은도서관장은 "책은 교육실에서 읽으면 되고, 목적에 맞게 이용할 수 있으니 편안하게 와달라고 안내했더니 입소문을 탔다"라며 "지금은 남녀노소, 다른 아파트 입주민까지 편안하게 찾는다"라고 말했다. 어른들끼리 친해지는 일은 덤이다. 아이들이 모이자 어른들도 자연스레 친해졌다.

노인들이 공동체를 가장 앞장서서 끌어나가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올해 도서관 안에 아이돌봄센터가 만들어졌는데, 청어람아파트 노인회원들이 급식을 직접 한다. 

전향미(40) 돌봄교사는 "일하는 엄마들은 아이들 점심이 제일 걱정인데, 청어람 쉼터(노인정) 어르신들이 집밥처럼 맛있게 만들어주신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이 하나를 낳으면 온 마을이 돌본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곳에 딱 어울리는 말"이라고 말했다. 

청어람아파트 어린이들이 단지 내 도서관에서 윷놀이를 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청어람아파트 어린이들이 단지 내 도서관에서 윷놀이를 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온 아파트 사람들이 모이는 화합 한마당 행사에서도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아이들은 번호표를 받아 서로 안 쓰던 물건을 나누고, 노인회·부녀회는 떡볶이와 어묵을 만들어 손주들에게 먹인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행복한 하루다. 

노인들은 그 외에도 공동체 중점 연대 사업들을 뚝심 있게 이끌어간다. 노인회원들은 매달 입주민에게 반찬을 만들어 파는데, 그 수익금은 그대로 취약계층 반찬나눔·김장행사 비용으로 쓰인다. 다른 단지 사람들도 소문을 듣고 반찬을 사러 오기도 한다. 

청어람아파트 한 가족이 경남도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청어람아파트 옆 단지에서 놀러온 가족이 경남도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공동체 안팎에 넘치는 연대 = 연대는 때로는 단지 안으로, 때로는 단지 밖 사회 문제로 이어졌다. 예를 들면, 청어람 사람들은 경비·미화 등 아파트 노동자들을 공동체 일원으로 대접한다. 한 밥상에 초대할 뿐 아니라 노동 문제도 외면하지 않았다. 

김명순(65) 청어람아파트 미화팀장은 "재활용장이 만들어지고 나서는 일이 많아졌는데, 계약된 노동 시간이 부족해 더 일하면서도 당연하게 생각했다"라며 "입주민들이 먼저 나서서 1시간 추가 임금을 받게 해 주니 너무 고마운 마음"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입주민들이 조선하청 노동자를 위해 노란 목도리를 뜨고 있다./양산신도시청어람아파트
지난해 11월 입주민들이 조선하청 노동자를 위해 노란 목도리를 뜨고 있다./양산신도시청어람아파트

권 대표는 "최근 아파트들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관리비 절감 명목으로 노동자를 해고하거나 노동 시간을 줄이는 방법을 쓰는데, 그러면 절대 기준 시간 안에 일을 끝마칠 수 없다"라며 "청어람은 원래 더 드려야 할 추가시간 임금을 돌려드린 것뿐"이라고 말했다. 

청어람아파트 입대위는 용역업체 계약을 갱신할 때, '미화원 고용 승계'를 입찰 조건으로 걸었다. 아파트와 1년 계약을 해놓고, 미화노동자와는 364일 계약을 해 연차 수당을 미지급한 한 용역업체를 상대로 부당이익금 반환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미화노동자들이 입주민들을 가족처럼 느끼는 이유다.

청어람아파트 아이들이 단지 내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다. /김구연 기자
청어람아파트 아이들이 단지 내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다. /김구연 기자

청어람아파트 뜨개질 교실 참여자들이 자발적으로 노란 목도리를 떠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에게 전달한 일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공동체 밖에서 연대할 곳을 찾은 사례다. 이들에게 응원의 편지를 쓴 최예서(11·양산 가양초교 5학년) 양은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노동자에게 말했다.

"편지가 도움이 됐다니 기뻐요. (보내주신) 유자청도 맛있게 먹을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저씨들 파이팅!" 

/이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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