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가 있기에 ‘오늘’이 있다
배달호•이영일•변우백 등 열사추모사업 이어져
부울경노동역사관 건립 주민 반대로 난항

민주노조 건설을 강조했던 정경식(1959~1988) 열사, 정리해고와 파견법을 반대했던 최대림(1957~1998) 열사, 손배가압류 문제를 알린 배달호(1953~2003) 열사에 이르기까지 경남 지역에는 10여 명의 노동열사가 있다.

이명순 부울경열사정신계승사업회 사무국장은 “오늘날 노동자들의 권리는 세월이 지나 저절로 생기지 않았고, 열사들이 자본과 정권에 맞서 싸웠기 때문에 얻게 됐다”며 “이들을 기억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써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 현장의 굽이진 길목마다 열사들이 버텨줬기에 ‘오늘’이 있다. 그들이 남기고 떠난 저항정신은 더디게나마 세상이 점점 나아지도록 만드는 동력으로 남았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은 잊히기 마련이지만, 쉽지 않다. 노동열사의 치열한 삶을 잊지 않고 기리는 사람들을 만나봤다. 

 

지난 9일 배달호 열사 추모 20주기를 맞아 김창근 전 금속노조 두산중공업지회장이 헌화를 기다리고 있다. /김다솜 기자
지난 9일 배달호 열사 추모 20주기를 맞아 김창근 전 금속노조 두산중공업지회장이 헌화를 기다리고 있다. /김다솜 기자


◇기억하고 추모하는 노동자들 = 매년 1월 9일이면 두산에너빌리티(옛 두산중공업) 정문에서 추모제가 열린다. 손배가압류에 몰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배달호 열사를 기리기 위해서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배 열사 추모제에 수천 명의 인파가 모였었다. 

올해도 배 열사를 기억하기 위한 걸음이 이어졌다. 이성배 금속노조 두산중공업지회장은 “두산중공업지회 조합원 절반 이상이 배 열사 분신 사건 이후에 입사했다”며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배 열사를 기억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우조선해양에는 다섯 명의 열사가 있다. 이석규(1966~1987) 열사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면담을 요구하다가 경찰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동갑내기 이상모·박진석(1969~1989) 열사는 노동자 탄압에 항거해 분신했다. 박삼훈(1955~1995) 열사는 노동자의 열악한 처우를 알렸고, 최대림 열사는 정리해고와 파견법 입법화에 맞섰다. 

금속노조 대우조선해양지회는 매년 5월 말부터 6월 초를 열사정신계승 기간으로 정하고 있다. 지난해 5월 30일에는 다섯 열사를 기리는 추모제를 열었다. 박삼훈 열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네 명은 가정을 꾸리지도 못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유가족들에게 황금빛 훈장과 감사패를 안겨줬다.

지난해 여름 이석규 열사 유가족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전달했다. 국민훈장은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 분야 공적이 있는 자에게 수여되는 훈장이다. 대우조선해양지회는 다른 열사의 유가족에게도 감사패를 직접 제작해 건네기도 했다. 

열사추모사업을 맡은 정종근 금속노조 대우조선해양지회 문화체육부장은 “열사들이 있어 노동조합이 있다고 생각하고, 유가족들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며 “해마다 열사 묘역을 방문해 벌초를 하고 제사도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금속노조 SNT중공업지회에는 이영일(1962~1990), 림종호(1964~1994) 열사가 있다. 이 열사는 노동조합 탄압에 맞서 분신했다. 파업 과정에서 46억 원에 달하는 손배가압류가 걸리고, 노동조합 집행부가 줄줄이 잡혀가던 시기였다. 

림 열사는 1992년 정부가 제시한 총액임금제에 반발해 굴뚝 농성을 벌였다. 교도소 수감생활을 하다가 독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총액임금제는 총액 기준 5% 이내 임금 타결을 봐야 하는 제도다. 당시 림 열사는 총액임금제가 노동자 임금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반대했다. 

윤정민 금속노조 SNT중공업지회장은 “노동절마다 양산 솥발산에서 추모행사를 하고, 5월 3일에는 중식 집회를 열어 애도하고 있다”며 “전현직 노조 간부 중심으로 열사회를 조직해 회비도 내고, 열사기념사업도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지난 2020년 SNT중공업지회는 열사 문학상 공모전도 진행했다. 

지난 2008년 5월 16일 두산중공업 하청 노동자로 일하던 변우백 열사는 지게차에 깔리는 사고를 겪었다. 변 열사는 생전 진보정당 활동을 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 처우 개선에 힘써왔다. 그의 동지들은 노동운동가 고 변우백 동지 추모모임을 결성해 매년 기일에 투쟁 사업장에 기금을 전달하고 있다. 

지난 9일 배달호 열사 추모비 앞에서 지역 노동계 인사들이 헌화하고 있다. /김다솜 기자
지난 9일 배달호 열사 추모비 앞에서 지역 노동계 인사들이 헌화하고 있다. /김다솜 기자

◇노동역사관 건립은 지지부진 = 열사들을 추모하기 위한 또 다른 움직임이 있다. 바로 부산울산경남노동역사관 건립이다. 열사정신계승사업회는 노동자 투쟁 역사를 기록·보관·전시·교육하기 위해 노동역사관 건립을 제안했다. 

노동역사관에는 열사의 삶과 투쟁을 조망하는 추모 공간을 만들고, 열사 기록을 담은 전시도 진행할 예정이다. 전체 예산 규모는 약 32억 원. 민주노총 부울경지역본부와 시민사회단체 등 104개 단체가 힘을 보태 마련했다. 그러나 지난 2018년 건립사업 계획 수립 이후 5년이 지나도록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지난 8일 노동역사관 건립 예정 터인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금곡리로 향했다. 터 입구에는 하얀색 천막이 펼쳐져 있고, 금곡마을 주민들이 모여있었다. 마을주민들은 2021년 12월부터 노동역사관 건립을 반대해왔다. 

마을 이장은 “조용히 살고 싶어서 마을로 들어온 주민이 많다”며 “노동역사관이 들어서면 마을이 시끄러워져서 주민들이 살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그는 마을 길목이 좁아 교통사고 위험도 크고 인근 축사에서 키우는 소들도 안 좋은 영향을 받게 될 거라고 우려했다.

한 마을 주민은 “민주노총에서 사고가 난 사람들의 유품이 여기 전시되는 것 아니냐”며 “유품은 흉물이기 때문에 찜찜하다”고 말했다. 일부 주민들은 민주노총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난 8일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금곡리 부울경노동역사관 부지를 찾아갔다. 입구에는 역사관 건립 반대 주민들이 천막을 펼쳐놨다. /김다솜 기자
지난 8일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금곡리 부울경노동역사관 부지를 찾아갔다. 입구에는 역사관 건립 반대 주민들이 천막을 펼쳐놨다. /김다솜 기자

열사정신계승사업회는 확약서 작성, 마을 운영위원회 논의, 설명회 개최, 마을 지원 등을 약속했지만 마을주민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김대식 열사정신계승사업회장은 “해당 부지는 영남전인학교로 쓰여 예전에는 수련회가 많이 열린 곳”이라며 “노동역사관이 들어서더라도 소음, 교통 문제는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김 회장은 “울주군 건축위원회 심의에서 8명 가운데 6명이 찬성하고, 나머지 2명은 보류와 화해 권고 의견을 내자 울주군은 소수 의견을 반영해 건축 행위 불가를 판정했다”며 “행정소송으로 건축 행위 허가를 받고, 주민들과 원만한 협의를 해나가겠다”고 덧붙였다.

/김다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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