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중 가장 많은 눈이 내린다는 절기 대설(7일)에 통영을 걸었다. 첫눈이 오거나 비가 내렸다는 수도권과 달리 이곳은 해가 쨍쨍했다. 바람 또한 세차지 않았다. 이날 기온은 10도 안팎. 전날보다 1~4도 오른 날이었다. 다소 누그러든 통영의 날씨가 천천히 길을 걸어보라고 손짓하는 듯했다. 산과 바다를 눈에 담으면서 단숨에 길을 훑었다. 거제와 통영을 잇는 거제대교에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해저터널까지 주요 길목을 둘러봤다. 온종일 이어진 긴 걸음을 마친 뒤 터널 바깥에 서서 저녁놀을 바라봤더니 어느새 하늘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때맞춰 켜진 터널 안 초록빛 조명은 단풍만큼 고왔다.

◇계절 옷 갈아입고 방문객 맞는 세자트라숲 = 통영시 용남면 화삼리에는 생태공원이 있다. 이름은 ‘통영 RCE 세자트라 숲’. 2015년 5월 개장한 이곳은 국내 유일 RCE 공원이다. RCE는 유엔 총회 산하 고등연구기관인 유엔대학이 지정한 지속가능발전 교육거점센터(Regional Centre of Expertise on Education for Sustainable Development)를 뜻한다. 세자트라는 지속 가능성과 공존, 균형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로, 인도·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에서 널리 알려진 고어(古語·오늘날 쓰지 않는 말)다.

세자트라 숲에 들어서면, 줄지어 선 나무들이 계절 옷을 갈아입고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아준다. 공원 앞으로는 넓게 드리운 바다가 빼어난 조망을 한껏 뽐내고 있다. 바닷길을 낀 산책로는 이순신공원으로 이어지는데 이 길목은 오솔길을 정비한 것이다. 조화를 이룬 울창한 숲과 바다가 빼어난 조망을 보여준다.

이곳 산책로는 경사가 완만하다. 거리는 왕복 3㎞로 그리 길지 않다. 산책로 구간에는 솔방울이 많아 이른바 ‘솔밤시 길’이라 불리는데, 이곳은 통영시가 꼽은 걷기 좋은 길 18선 중 하나로 선정됐다. 연못 주위로 넓게 분포한 갈대밭 못지 않게 해안가를 앞에 두고 짜인 숲길이 호젓한 여정을 선사한다.
한적한 바닷가에 자리 잡은 세자트라 숲은 지속 가능한 생활 양식을 터득하고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표방한다. 그래서 이곳은 생태공원뿐 아니라 대강당과 야외공연장, 교육공간, 녹색생활 체험동 등을 갖추고 있다. 다랭이논 손 모내기와 추수, 매실 수확, 유자청 담그기, 김장 체험 등이 이곳에서 계절마다 꾸준히 진행 중이다.

통영 RCE 세자트라 숲. /최석환 기자
통영 RCE 세자트라 숲. /최석환 기자
통영 RCE 세자트라 숲에 조성된 갈대밭. /최석환 기자
통영 RCE 세자트라 숲에 조성된 갈대밭. /최석환 기자

◇용남면에 아로새겨진 ‘옻칠 예술’ 자부심 = 세자트라 숲이 소재한 화남리에는 옻칠 예술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미술관이 자리한다. 숲과 1.4km 거리에 있는 통영옻칠미술관이 그곳이다. 국내 유일 옻칠 예술 전시공간으로, 한국 현대 옻칠 예술의 선구자인 김성수 통영옻칠미술관장이 운영하고 있다.

미술관 입구에는 2m가 채 되지 않는 길쭉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여기에 ‘한국현대 옷칠예술 중심지’, ‘전통의 현대화로 다시 태어난 새로운 영역의 옻칠 회화’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자부심이 엿보이는 안내판이 초입부터 나란하다.

미술관에 들어가면 옻나무에서 채취한 수액을 작품에 덧입혀 제작한 회화와 조형물이 다수 놓여있다. 대부분 중국과 일본, 한국 등 아시아 지역에서 5000년 넘게 활용된 전통 옻칠 공예를 현대 회화에 접목한 작품들이다.

옻칠 목판은 삼베를 입힌 나무판 위에 옻칠과 건조 작업을 수없이 반복하는 작업을 끝내야 비로소 완성된다. 옻에 물감을 넣어 채색한 다음 또다시 옻칠을 덧입히는 일을 수십 차례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면 옻칠 작품들은 광채를 띈다.

미술관 안에는 작품만큼 김 관장 이름이 자주 보인다. 1951년 경남 도립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 1기생으로 옻칠에 입문한 그가 걸어온 길이 상세하게 소개돼 있다. 대학 교수를 역임한 그는 김봉룡을 스승으로 유강렬, 장윤성, 강창원 등에게 공예와 미술을 배웠다. 이중섭은 그의 소묘 선생이었다.

통영 청마문학관. /최석환 기자

◇통영에도 남은 청마 기념관 = 유치환의 일대기를 조명하는 기념관과 그의 생가는 거제에만 있지 않다. 통영에도 만들어져 있다. 이순신공원과 1㎞ 떨어진 자리에 청마문학관과 유치환 생가가 마련돼 있다. 현재 시가 운영·관리 중이다.

이곳 문학관과 생가 주인공은 거제에서 기리는 시인 유치환과 같은 인물이다. 기념관과 생가가 두 도시에 있는 건데 그 배경은 양측이 주장하는 출생지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거제시는 유치환의 출생지를 거제 둔덕면 방하리로, 통영시는 통영 태평동으로 보고 있다. 거제시가 만든 ‘청마기념관’에 가면 둔덕면 방하리 507-5번지, 통영시가 만든 ‘청마문학관’에 가면 태평동 552번지로 되어 있는 것이다.

거제는 유치환 자녀들이 자신들의 아버지 고향이 둔덕면 방하리라 주장하는 점을 근거로 내세운다. 반면 통영시는 유치환 작품 속에 자신이 통영 출신이라고 해온 점을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면서도 통영시는 유치환 생가를 태평동이 아닌 정량동에 만들어놨다.

거제시와 통영시는 출생지 문제를 둘러싸고 법정 다툼까지 벌였지만, 2000년대 소송 이후로도 두 지자체는 문제를 매듭짓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양측 기념관은 유치환 출생지를 거제와 통영으로 서로 다르게 안내하고 있다. 친일 행적이 있는 그를 기리는 기념관을 세금을 들여 운영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어쨌거나 출생지를 두고서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평행선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세병관. /최석환 기자

◇삼도수군 중심 세병관과 동양 최초 해저터널 = 세병관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중심 건물이다. 창건 후 약 290년 동안 조선 삼도(경상·전라·충청도) 수군을 총지휘했던 곳이다. 50개의 커다란 기둥으로 이뤄진 객사 세병관은 통제영을 설치한 이듬해(1605년) 지어졌다.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루와 더불어 조선 3대 누각으로 손꼽힌다.

삼도수군통제영은 임진왜란 발발 다음 해인 1593년 이순신이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면서 만들어졌다. 몇 년간 이리저리 떠돌던 삼도수군통제영은 지금의 자리에 자리 잡게 됐는데 1895년 통제영이 폐지될 때까지 조선의 해군본부 역할을 담당했다.

세병관은 1603년 통제영이 통영으로 옮겨진 후 여러 본부 건물들을 짓는 과정에서 들어섰다. 건물 중앙에 걸린 현판을 비롯해 거대한 건물 크기가 웅장한 면모를 보여준다.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옛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통영 해저터널은 1932년에 만들어진 동양 최초의 바다 밑 터널이다. 미륵도(봉평동)와 육지(도천동)를 연결하고자 만들어졌다. 식민지 경영을 목적으로 오카야마현 어민들을 이주시켰는데 이때 사람들이 쉽게 이동할 수 있게 하려고 터널을 뚫었다. 육교를 지을 수 없다며 터널을 지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강제 동원해 바다 양쪽을 막은 뒤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방식을 썼다. 1년 4개월의 공사를 거쳐 길이 483m 너비 5m 높이 3.5m의 규모로 완공했다. 일일이 손수 터널을 굴착 했는데 공사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선조들의 피와 눈물이 서린 곳인 셈이다. 

통영 해저터널. /최석환 기자
통영 해저터널. /최석환 기자

※길라잡이
남파랑길 28~29코스는 볼거리가 많다. 동피랑, 서피랑, 남망산조각공원, 이순신공원, 박경리 생가 등이 코스 주변으로 엮여있다. 여행길 안내앱 두루누비가 가리키는 구간을 종종 벗어나 주변을 훑어보는 것도 좋은 여행이 될 듯하다.

/최석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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