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경제적 고난 끝에 별세한
어머니 권찬주 형 김광열 씨
뒤늦게 3.15의거 참여자 인정
유족 "이렇게 잊히나 싶었다"

3.15의거 때 억울하게 아들을 잃은 김주열 열사 어머니 고 권찬주 여사, 형 고 김광열 씨 등 김주열 일가가 이후로도 힘겨운 삶을 이어왔던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 3.15의거 진실규명 과정에서 그들이 겪었던 고난이 다시 한 번 드러났다.

권찬주 여사, 김광열 씨는 지난달 30일 진실화해위원회에서 3.15의거 참여자로 인정받았다. 지난 5월 12일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가 진실규명을 신청한 지 6개월여 만이다. 권 여사는 3.15의거 직접적인 참여자는 아니지만 이후 이어진 4.11항쟁, 4.19혁명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만큼 진실규명 결정을 받았다. 김 씨는 김주열 열사와 3.15의거에 참여했던 사실을 인정받았다.

권 여사가 처음 마산에 온 날은 3.15의거 사흘 뒤인 1960년 3월 18일이다. 그는 아들 김주열이 사라졌다는 것을 큰아들(김광열 씨)에게서 듣고 전북 남원에서 곧장 마산으로 달려갔다.

마산에 도착한 권 여사는 길 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아들 행방을 물었다. 아들을 찾기 위해서라면 시청, 경찰서, 검찰, 언론사, 자유당 당사 등 가리지 않았다. 3.15의거 이후 쥐 죽은 듯 조용했던 마산에 권 여사의 안타까운 사연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아들을 찾지 못했다. 몸 상태가 급격히 악화한 권 여사는 결국 4월 11일 남원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권 여사가 남원으로 향하고 있던 오전 11시 무렵 마산항 중앙부두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신이 떠올랐다. 김주열 열사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마산의 민심이 들불처럼 타올랐고, 사람들은 또 한 번 거리로 나왔다.

그 사이 도립마산병원(현 마산의료원)에 안치돼 있던 김주열 열사 시신은 4월 13일 밤 비밀리에 고향 남원으로 옮겨졌다. 김주열 열사는 다음날인 14일 고향 선산에 묻혔다. 제대로 된 장례 절차도 없었다. 권 여사를 비롯한 가족은 김주열 열사의 마지막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김주열 열사 동생인 김길열(66·경기 김포) 씨는 “경찰이 밖으로 못 나가게 감시하는 바람에 어머니조차도 형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없었다”며 “시신도 탑차에 짐짝처럼 싣고 와 부패가 심한 상태였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김주열 열사가 고향 땅에 묻히고 그의 아버지는 5년 뒤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은 식구들은 곧바로 짐을 싸 큰형이 있던 서울로 갔다. 권 여사는 서울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자식들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갈 무렵 이번에는 큰아들 김광열 씨가 1984년 마흔두 살에 뇌출혈로 쓰러져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3.15의거 때 함께 거리로 나섰던 동생 김주열의 손을 놓쳤다는 죄책감에 평생 고통스러워하던 형이었다. 큰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있고 5년 뒤 어머니 권 여사마저 69세로 별세했다.

큰형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김주열 열사를 기억하는 이들은 더욱더 줄어갔다. 김길열 씨는 “4.19혁명 관련 단체에서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우리 가족을 찾지 않았다”면서 “유일하게 4.19혁명 유공자 가족으로 혜택을 받던 어머니가 안 계시니 김주열도 자연스럽게 잊혀 가는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뒤늦게나마 이뤄진 진실규명 결정을 반겼다. 아들로서, 동생으로서 먼저 떠난 가족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편,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는 이달 안으로 국가보훈처에 권찬주 여사를 4.19혁명 유공자로 서훈을 신청할 예정이다.

/박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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