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로 전 세계적 인기 얻은
여배우 '주디 갈랜드' 실화 다뤄
성장-절정 연대기식 서사 생략
죽기 전 마지막 투어 집중조명
불운 이면의 치열한 삶 보여줘

어릴 때부터 노래를 곧잘 했던 내게 집안 어르신들은 ‘가수 될 생각은 말고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들 말했다. 정작 가수가 될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노래 말고도 그랬다. 사생대회나 백일장에서 상을 타올 때마다 어른들은 비슷한 얘길 반복하셨다. 그러고 보면 어릴 때 우린 뭐든 참 곧잘 한다. 욕심도 많고 꿈도 많아서 하루걸러 하루씩 하고픈 게 달라진다.

어느덧 직장생활 10년 차를 바라보는 시기가 오니 어릴 때 내게 쥐어졌던 선택지들은 모두 과거가 된 기분이다. 김광석의 노랫말처럼 내가 떠나보낸 것도, 떠나온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다른 길로 들어서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단 생각과 함께 우리는 희망이란 단어와 점점 멀어진다. 지금 서 있는 길 위에서 앞을 향해 걷는 것 말곤 대안이 보이지 않는 평범한 삶, 그럼에도 여전히 젊은 삼십 대 중반의 기로에서 과연 막연한 희망은 구원이 되어줄 수 있을까?

영화 <주디> 속 한 장면. /갈무리

하지만 되레 ‘걸어가는 게 삶의 전부이자 그 자체로 희망’이라 말하는 영화가 있다. 주제곡이 'Somewhere Over The Rainbow'라는 점에서는 아이러니한 느낌을 주지만 말이다. 제목이 주는 어감처럼 전 세계인에게 막연한 희망과 동경을 품게 해줬던 이 노래는 러닝타임 100분이 넘도록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프닝 시퀀스부터 엔딩에 이르기까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머릿속에는 하나같이 그 노래가 울리고 있을 것이다. 희망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주인공의 삶 위에, 무지개를 그리는 희망찬 멜로디가 100분 내내 머릿속에서 아이러니하게 얹어진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함은 “걸어가는 게 희망”이라는 주인공의 읊조림과 함께 영화와 합치되면서, 이 영원불멸할 불후의 명곡은 80년이란 세월이 지난 2020년에 이르러 재해석된다.

영화 <주디> 속 한 장면. /갈무리

영화 <주디>는 가장 화려했던 인생의 정점이 모두 트라우마로 남게 된 스타의 이야기이자, 두 발의 마찰력만으로 자신의 인생을 짊어지고 나아가는 한 여자의 실화를 다룬다.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 역으로 전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던 ‘주디 갈랜드’는 대형 자본이 투입된 미국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희생양으로 가장 앞서 언급되곤 하는 인물이다. 굴곡지고 어두운 인생사와 약물 과다로 유명을 달리한 점 때문에 여자 버전의 마이클 잭슨으로 비유되기도 하는 그녀는 최근까지도 우리나라의 한 TV 프로그램에서 가장 불행한 스타 1위로 꼽혔다.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는 그렇게 기억되고 있었다.

영화 <주디> 속 한 장면. /갈무리

영화는 그녀가 47세로 죽기 직전인 1969년의 마지막 투어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불운’ 이면의 모습을 그려낸다. <보헤미안 랩소디>나 <로켓맨> 등 최근 제작되었던 비슷한 부류의 영화들은 어린 시절부터 스타가 되기까지의 성장기와 마지막 절정기를 아울러 보여주면서 서사가 축약되거나 인물이 단편적으로 그려지는 약점을 지녔었다. 반면에 <주디>는 누구나 기억하는 그녀의 전성기를 과감히 생략함으로써 러닝타임을 확보하고, 영화상 ‘현재’ 시점을 더 깊게 파고드는 데 시간을 아낌없이 사용한다. 그 결과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추억하기보다는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의 과거와 싸우고 현재를 견뎌내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기꺼이 해냈는지’를 재조명하며 이를 절절하게 각인한다. 다른 영화들과 달리 눈이나 귀가 아니라 마음을 울리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영화 <주디> 속 한 장면. /갈무리

수많은 그녀의 명곡 중 영화에서 처음 부르는 노래는 그래서 더 의미 있다. 가장 유명한 곡으로 그녀를 소구하는 대신 'By Myself'가 선택되었다는 건 그만큼 주디의 일생을 경외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자본시장이 만들어낸 주디의 상징 같은 노래 대신 주디 본연의 애티튜드를 보여주는 노랫말을 택했기 때문이다. 결국엔 잊히는 게 스타의 숙명이겠으나 “잊지 않을 거죠? 기억해줘요”라는 막바지의 대사는 미디어에 비친 비극적인 그녀의 서사 대신, 끝까지 삶을 갈망하며 시대를 꿋꿋이 버텨온 훗날의 ‘주디’로 기억해달라는 의미가 아닐까. 첫 곡의 가사에 담긴 바로 그 모습으로.

“이제 홀로 나의 길을 갈 거야. 날아가는 저 새처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 나만의 세상을 만들 거야. 누구도 나보다 더 날 잘 알 순 없어. 이제 홀로 나의 길을 갈 거야.”

/전이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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