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 당시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삼청교육대·형제복지원서 인권 유린

국가 폭력이란 국가가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개인이나 집단에 헌정질서에 반하는 공권력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ㄱ 씨는 20대 초반의 남성으로, 1979년 부마항쟁 당시 부산 신창동 국제시장에서 11명이 근무하는 골덴의상실에서 미싱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1979년 10월 17일 오후 8시, 부산 국제시장에서 시위를 구경하다가, '뭐가 뒤에서 머리를 치는 것 같더니만, 기절을 당한' ㄱ 씨는 경찰서 차 위에서 구둣발로 차서 깨어났다. 경찰버스 안에서도 전투경찰의 폭행은 이어졌고, 중부산경찰서에서 머리를 맞으며 조사를 받았다. 경찰 기록에는 '대청동 국제시장 부근에서 불법시위, 50~60여 명의 데모대에 동조하다가, 검거되었다'고 기록되어, 10월 23일 즉결 심판을 받고, 15일 구류를 산 뒤 11월 6일에 석방되었다.

석방 후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1980년 8월 어느 날 새벽 경찰에 잡혀가, 수영비행장 내 군부대에서 4주가량의 삼청교육대 순화훈련을 받았다. 이를 진술한 녹음 기록에 ㄱ 씨는 "이놈의 새끼들 한번"이라고 분노를 표현하며 진술을 계속하였다. 아마도 부마항쟁 시기에 시위도 안 하고, 15일 구류를 살았는데, 또다시 이유도 없이 잡혀가 훈련을 받은 데 대한 원망 때문이라 추측한다.

당시 부산 해운대경찰서 형사계 관리반장을 맡은 김형우는 "1980년 6월 중순 관내 17개 동에 있는 불량배와 파렴치범, 사기범에 대한 자료를 보름 안에 수집하라는 부산지방경찰청의 지시가 있었고, 경찰서별로 삼청교육대 대상자 검거인원이 책정되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따라서 검거된 사람 중에는 "주민의 지탄을 받거나, 불건전한 생활영위자"도 2만 2000여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ㄱ 씨는 C급으로 분류되어 "군부대에서 강제로 삭발당하고, 사실상 매일 구타와 기합의 연속 속에서 군 기본훈련을 받고" 풀려나왔다.

ㄱ 씨는 1984년에 또다시, 누명을 쓰고 형제복지원에 3년가량 수용돼 강제노역을 하다가 1987년 탈출에 성공한다. 형제복지원은 1975년 12월에 제정된 내무부 훈령 410호의 업무지침을 가리킨다. 훈령 1장 1절에 "걸인, 껌팔이 등 건전한 도시질서를 저해하는 부랑인을 신고, 단속, 수용, 보호하고 귀향 조치 및 사후관리"하여 "도시생활의 명랑화를 기하고 범법자 등 불순분자의 활동을 봉쇄하는 데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설립된 복지원 중의 하나다. ㄱ 씨는 형제복지원 수용과정을 진술하면서 "뭐 증거가 있나, 뭐 죄가 있나, 떠들기를 했나, 이거 뭐" 하고 다시 분노를 표출하였다. 그는 형제복지원 수용소 내에서 "사람을 오함마(큰 망치)로 패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ㄱ 씨의 20대는 국가 폭력으로 망가져 버렸다. 삼청교육대의 경험에 대한 로르샤흐 반응 특성을 검사한 논문에은 "삼청교육대 훈련 집단 경험은 정신병리가 만성화되어 환경을 효율적으로 지각하지 못하고, 공격적인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자신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국가는 헌법 10조가 말하는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가진다"는 정신을 위반하고, 오히려 ㄱ 씨 인생을 망가뜨림으로써, 기본적 인권을 침해하였다.

/이은진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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