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2차례 올라가 반대 집회
먹을거리 챙겨 즐거운 분위기로
마산시청 점거·삭발 투쟁도 불사

자본 논리에 잠식되지 않은 주민들
평생 살아온 마을 끝끝내 지켜내

찬성 주민들 행정·자본에 이용 당해
빚 떠안은 전 찬성 측 주민 박만도 씨
찬반 주민들 진정서 써 구제 도와

STX중공업 조선 기자재 공장 설립을 반대하기 위해 수정마을 주민들과 수녀들이 마산시청 시장실 앞에서 항의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STX중공업 조선 기자재 공장 설립을 반대하기 위해 수정마을 주민들과 수녀들이 마산시청 시장실 앞에서 항의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2007년 11월 14일, 정부서울청사 법제처 정문 앞에 수녀와 노인들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들은 모두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수정마을에 사는 주민들이다. 마산시가 수정마을에 남은 매립지를 조선 기자재 공장으로 바꾸려 하자, 반대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이날 이후 반대 서울 집회는 11차례 더 열렸다. 불과 7개월 사이 벌어진 일이다. 주민들과 수녀들은 못 해도 한 달에 한 번 서울행에 몸을 실었다. 마산시청과 경남도청 앞에서 열린 집회는 셀 수도 없다. 집회 현장에서 주민들과 수녀들은 몸싸움도 마다치않았다. 머리를 밀고 단식투쟁도 벌였다. 그렇게 주민들은 수정마을을 지키는 일에 자신을 쏟아냈다.

◇뽕짝에 맞춰 데모를 = STX중공업 조선기자재 공장 유치 반대 투쟁은 4년여 동안 치열하게 진행됐다. 멀리서 보면 그렇다. 하지만, 수정마을 주민들과 수녀들은 매 집회를 즐거운 분위기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하루아침에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그랬다. 특히 집회를 주도했던 수녀들의 역할이 컸다.


수정마을에 있는 트라피스트수도원은 평소 주민들과 교류가 활발한 종교시설이 아니었다. 봉쇄수도원으로 사회와 교류가 극히 적었다. 2007년 11월 박석곤 당시 수정마을 STX 주민대책위원장이 수도원을 찾아오기 전까지 그랬다.

수녀들이 박 전 위원장에게 전해 들은 상황은 심각했다. 행정 절차가 마무리 단계인 데다 STX중공업에서 조업을 시작했었다. 그러다 STX중공업 관계자까지 수도원을 찾아와 이주 보상을 제안했다.

수도원은 이 제안을 수용할 수 없었다. 수녀들은 주민이 받을 수 없는 특권은 받지 않겠다고 원칙을 세웠다. 한 수녀는 “주민들만 놔두고 보상받을 수 없었다”며 “이 원칙에 따라 움직이니 주민 곁에서 끝까지 함께 싸우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들은 서울 집회가 있는 날이면 먹거리 준비에 분주했다. 갈 때마다 돼지 한 마리는 잡았다. 여름에는 물김치, 겨울에는 시래깃국을 해갔다. 수정마을에서 난 쌀과 찹쌀을 넣어 만든 주먹밥은 별미였다.

한 수녀는 “우리가 음식을 많이 해 가니 근처 노숙자들도 먹으러 왔었다. 다 같이 음식을 나눠 먹으며 뽕짝에 맞춰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다. 돌이켜보면 참 재밌게 데모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모든 집회가 밝은 분위기에서 열리진 않았다. 이 악물고 싸우기도 했다. 행정의 거듭된 거짓말로 수시로 마산시장실 앞을 점거했던 시절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할머니와 수녀들은 시청 안으로 들어갔다. 시장실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은 할머니와 수녀들은 우비로 서로를 묶었다. 공무원들이 수녀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밤새 STX중공업과 마산시의 부당함에 온몸으로 맞섰다.

STX중공업 조선 기자재 공장 설립에 찬성하는 수정마을 주민들이 모여 시위를 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STX중공업 조선 기자재 공장 설립에 찬성하는 수정마을 주민들이 2008년 3월 모여 시위를 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돈보다 소중한 가치 = 수정마을 매립지에 들어올 시설은 조선기자재 공장이었다. 주민들은 ‘환경오염’을 우려했다. 이미 조선기자재 공장이 들어선 진해 죽곡마을 상황이 어떤지 눈으로 봤기에 그랬다.

수정마을 주민 이판국(65) 씨는 “죽곡마을은 쇳가루 때문에 생물은 살 수 없는 지경이었고 그게 바람에 날려 온 동네가 쇳가루로 뒤덮여 있었다”며 “조선소 밀집 지역을 여러 군데 가봤는데 문제가 안 되는 곳이 없었다”고 말했다.

수정마을을 집어삼키려는 행정과 자본의 탐욕은 수년간 마을을 들쑤셨다. STX중공업과 마산시는 개발 보상금을 내걸어 공동체를 반으로 갈랐다. 하지만 주민들은 평생 일궈온 삶의 터전과 아름다운 자연을 끝끝내 지켜냈다.

반대 투쟁을 함께한 한 수녀는 “경제 발전이라면 행정이든 기업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순박한 시골 할머니들이 그런 이들에 맞서 폭력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도 이겼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평생 피 흘리며 밭일하고 홍합 까던 여자들은 알았던 거다. 마을을 담보로 나오는 보상금이 내 돈인지 남의 돈인지. 그리고 그분들은 같이 땀 흘려 일하고 밥해 먹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라고 전했다.

◇경제 논리에 파괴된 공동체 = 2011년 5월 16일 통합 창원시는 STX중공업이 수정산단 조성 포기 의사를 밝혔다고 발표했다.

행정과 기업의 탐욕에 멈춰버린 수정마을의 시간이 다시 흘렀다. 멈춘 시간 속에서 수정마을 주민들은 찬성과 반대로 극명하게 갈렸다. 주민 힘으로 무분별한 개발을 막아냈지만, 깊어진 감정의 골은 풀어 갈 숙제였다.

반대 주민들은 찬성 주민들에게 마산시와 수정마을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날 선 말을 들어야 했다.

당시 반대 측 노인회장이었던 김복영(84) 씨는 “반대 투쟁할 때 찬성 측과 많이 싸웠다. STX가 철수하고 이삼 년 정도는 서로 말도 안 섞고 알은 체도 안 했다. 어떻게 보면 10년 넘게 척졌는데 한 번에 풀리는 게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조선기자재 공장 유치 문제는 찬성 주민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경제 개발 논리 앞에 주민들은 행정과 기업에 철저히 이용당했다.

수정뉴타운추진위원회 위원장이던 박만도 씨는 찬성 주민이었다. 이 일로 빚만 1억 5000여만 원을 떠안았다. 당시 찬성 주민에게 지급됐던 발전기금 가운데 미사용 금액 반환이 늦어지며 이자가 불어났다.

원금은 모두 상환했지만 건강 악화로 일을 못 하게 되면서 이자를 갚을 능력이 없어졌다. 박 씨는 본인 명의로 된 집, 통장, 차량 등이 압류돼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다고 호소했다.

박 씨는 “조선소 유치할 때는 공무원이고 STX중공업이고 우리 집에 살다시피 했다. 보상금 받을 때도 빨리 다른 주민들 설득하라고 부추기기만 했지 그 돈이 어디서 어떻게 나온 건지는 한참 뒤에 알았다”고 말했다.

이어 박 씨는 “내가 그 돈을 빼돌리지도 않았고 심지어 원금은 다 갚았다. 이제 와 한 개인에게 1억이 넘는 돈을 갚으라는 건 가혹한 일 아닌가. 당시 행정 책임도 있는 만큼 창원시가 대승적으로 판단해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수정마을 주민들이 박 씨 사정을 듣고 그를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는 것이다. 찬반 할 것 없이 대다수 주민이 박 씨 이자를 탕감해달라는 진정서에 동의했다. 보상금 관련 문제인 만큼 반대 주민 입장에서 달갑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흔쾌히 박 씨 구제에 힘을 보탰다.

박석곤 전 수정마을 STX 주민대책위원장은 “반대 주민 모두가 달가워하진 않았지만 설득으로 진정서에 서명을 받아냈다”며 “이 진정서가 앞으로 마을 화합의 계기로 큰 역할을 해주리라 믿는다”고 전했다.

/박신 김다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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