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잃는 건 행복 상상할 근간 잃는 것
이태원 참사에 깊은 사회적 위로 필요

인간은 아무 의미도 없는 우주에서 행복이라는 상상을 하며 산다. 생명이란 원래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해 물이 만들어진 것처럼 '나'란 존재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수 있다. 모든 동식물도 이러한 자연법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 인간만이 상상을 하며 상상을 믿고 상상을 실현하며 산다. 행복과 사랑이라는 어떤 과학적 근거도 댈 수 없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상상하고 실현하며 산다. 그 상상을 존재의 의미로 믿고 산다. 그렇지 않으면 나란 존재의 의미나 가치를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당신과 나란 존재의 의미는 원래 없었다는 게 정답일 것이지만 반면 나의 존재 의미는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된다. 결국 사람은 스스로 의미를 상상으로 만들어내고 실현하려 애쓰며 사는 존재다.

이러한 상상은 슬프고도 직설적이게도 '존재의 무의미함'이 진실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무의미함이라는 진실을 찾은 사람만이 참다운 자신의 존재 의미도 찾을 수 있고, 그 무의미함에 맞닥뜨린 사람만이 존재 가치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절망 속에 떨어져 본 사람이 희망의 소중함을 더 깊이 아는 것과 같다. 우리가 사람과의 관계나 일상생활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더 이상 행복을 상상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행복을 상상할 수 없는 결핍된 조건들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결핍은 지극히 원초적 결핍성에 기인한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은 그 결핍을 채우고자 만나고 관계를 맺으며 사랑을 한다. 그 결핍이 사람들을 연결하고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이루는 원동력이 된다. 아이가 혼자 살 수 없어 부모에 의지해 자라고 늙은 부모는 자식에 기대어 산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하고 가족을 이루며 행복을 구가한다. 인간만이 느끼는 존재의 무의미함과 원초적 결핍에 대한 저항이자 적극적 대처며 상상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여전히 특별한 조건이 갖춰지면 더 특별한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거라 여긴다. 어떤 이는 돈을 모으는 데서 행복과 사랑의 조건을 찾기도 하고 여행이나 예술활동이나 남들보다 높은 지위나 권력을 갖는 데서 찾기도 하거니와 자신이 하고 싶은 그 무엇인가로부터 행복과 사랑을 상상하며 각자 삶의 의미를 찾는다. 구체적으로는 남들보다 큰집, 좋은 차, 멋진 옷, 높은 연봉, 학력과 스펙, 크고 늘씬한 몸매, 예쁜 얼굴 등이 갖춰지면 더 행복할 거라 믿는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지만 그건 행복이라고 하기보다는 자기만족감이거나 욕심 충족이거나 우월감 같은 비뚤어진 행복감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남들과의 비교우위를 통한 행복을 찾다가 더 큰 불행을 만나기도 하는 것이 사람살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이태원 참사는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근본적 행복감의 원천을 빼앗긴 참사일 것이다. 가족을 잃고 사랑을 잃고 행복을 상상할 근간을 잃은 참사다. 깊은 사회적 위로가 필요한 시점이다.

/도정 승려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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