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 작가'로 알려진 이후 꾸준한 작품 활동
플랜트 시리즈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 담아
자존감 되찾게 해준 흔적들 마음에 닿기를

그에게 그림이란 마음을 살피는 행위이다. 온전히 자신을 돌보는 시간, 바로 붓을 드는 순간이다.

박재희(41) 화가를 처음 만난 계기는 지난달 열린 삼진미술관 3기 레지던스 성과공유전 자리였다. 그의 플랜트(PLANT) 연작을 마주하던 시간은 제법 길었다.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보고 한참을 캔버스 앞에서 서성였다. 식물이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다른 형상이 떠오르는 작품은 커다란 여백으로 여유로움까지 지녔다. 서양화가 박재희를 지난 10일 함안군 칠원읍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났다.

박재희 작 'plant' 시리즈. /박재희
박재희 작 'plant' 시리즈. /박재희

◇무심한 듯 강렬한 에너지 뿜는 흔적 = “새하얀 캔버스 위에 묻은 물감 흔적, 그 색은 강렬하고 선은 뚜렷하다. 물감 흔적 덩어리들의 집합은 신비롭고도 교묘하게 식물을 연상시킨다.”(부산 프랑스문화원 아트 스페이스 전시 서문)

올해 3월 박 작가는 부산 프랑스문화원에서 ‘플랜트(Plant)’ 전을 열었다. 초록이 무성한 푸른 잎부터 붉은색이 감도는 잎사귀까지 마치 확대경을 가지고 식물을 형상화한 작품은 실존하지 않는 식물이기도 하다.

그는 “작품이란 이미지 전달인데, 그 이미지는 보는 이의 시각적 경험에 따라 다양하게 볼 수 있다”며 “플랜트 시리즈가 그냥 물감으로 보이든 식물로 보이든 관람자의 시선에 달렸기에 저는 그저 상대가 마음을 살필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할 뿐이다”고 설명했다.

박재희 작업의 큰 주제는 ‘흔적’이다. 팔레트에 물감을 짓이겨 놓은 흔적들을 시각적으로 가시화한다. 그리는 행위를 하던 자유로운 순간의 느낌을, 기운을 표현한다. 그 흔적들을 사진으로 찍어 부분으로 조각내고 연출해 캔버스에 다시 옮기는 길고 험난한 과정을 거친다. 단지 흔적 덩어리에 불과한 것에서 출발해 화면으로 옮겨지면 어떤 물질이자 부피를 가지면서도 에너지를 가진 새로운 개체로 등장한다.

“그림을 그릴 때 가장 먼저 하는 행위가 물감을 짜서 색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림을 그리고자 우연히 물감을 섞다가 본 흔적을 유심히 봤는데 흥미로웠어요. 그 흔적들 속에는 무질서하지만 어떤 에너지들이 녹아 있고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까지 느껴졌다고 할까요. 그런 기운들을 담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졌어요. 그런데 사실 그 기운을 가장 느끼고 싶은 사람은 바로 저였습니다. 결혼과 동시에 찾아온 변화된 삶에서 자존감을 잃어가던 시기에 그림은 저를 지키고 해방감을 주는 버팀목이었습니다.”

박재희 작 'plant' 시리즈. /박재희
박재희 작 'plant' 시리즈. /박재희

◇매 순간 갇혀 있던 무표정한 소녀와 안녕 =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5년 전에 선보였던 박재희의 개인전 ‘분홍색에 갇히다’를 보고 있으면 당시 작가는 어떤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을지 간접적으로 느껴진다. 거울에 갇혀 있거나 유리창에 갇혀 있는 소녀는 멍한 눈빛으로 바깥에 시선을 두고 있다. 온통 분홍색으로 채워진 캔버스에 여백은 찾기 어렵고, 마치 여백을 거부하는 듯하다. 그는 2017년 당시 작가 노트에 이렇게 남겼다.

“분홍색은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분홍은 아주 화려하고 여성스럽고 예쁘다. 반면에 이 사회에서 추구하는 젠더적인 형용사로서 무엇다운, 무엇스러운에 갇혀 있는 억압된 색이기도 하다. 지극히 학습된 색, 그렇게 나에게 학습된 분홍색에 갇혀버린 삶을 상자로 표현했고 그 안의 나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

창원대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에서 대학원 수료 과정을 마친 박재희. 그의 개인전 이력을 살펴보면 2007년 이후 무려 8년 만인 2015년에 두 번째 개인전을 연다. 엄마로 아내로 살아내는 동안에도 그는 붓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아이가 잠들고 나면 조용히 발뒤꿈치를 들고 작은 방으로 갔어요. 캔버스 앞에 앉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죠, 그때만큼은 온전히 저를 드러낼 수 있으니 정말 귀한 시간이라 여겼어요. 물론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게 맞나 계속 그릴 수는 있을까 하는 고민과 걱정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포기라는 단어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나에서부터 주제를 찾고 주변에서 재료를 찾으려 끊임없이 시도했어요.”

박재희 작 'heart' 시리즈. /박재희
박재희 작 'heart' 시리즈. /박재희

◇감각적인 하트 시리즈 작품 찾는 이 계속 = 박재희 하면 ‘하트 작가’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분홍·보라·빨강 마치 립스틱을 뭉갠 것처럼 보이는 그림부터 빛나는 광택 속 물감이 흘러내릴 듯한 그림까지 모든 형상이 하트를 향하고 있다.
그의 작품 중에 지금껏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은 ‘하트(HEART)’ 시리즈로 K옥션(K Aution) 온라인 경매에 꾸준히 올라 있다. 하트는 사랑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시들지 않고 열심히 뛰고 있는 심장 즉 열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랑이란 결국 알아가는 행위입니다. 나를 알아가고 나아가 상대를 알아가는 것으로 생각하는데요. 우리는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합니다. 저 또한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노심초사하던 때가 있었고요. 남들의 시선에 불안해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나는 내 감정에 얼마나 충실한가 질문하게 됐습니다. 캔버스를 거울삼아 ‘나는 나를 사랑하는가’ 묻고 또 물었습니다.”

어느 날 화장대를 정리하는 데 쓰다 남거나 한 번도 쓰지 않은 립스틱이 가득했다. 붉은색 립스틱을 살 때는 당당하고 싶은 마음을 함께 산 것이고, 핑크색 립스틱을 샀을 때는 사랑스럽고 싶은 마음을 함께 산 것 일 테다. 그런 립스틱을 과감히 부수고 으깨보고 싶었다고. 립스틱·마스카라를 종이 위에 이리저리 묻혀보다가 사진으로 찍고 그 부분을 조각 내 캔버스 위에 유화 물감으로 옮기기를 반복하다가 하트 모양에 매료돼 연작을 선보였다.

박재희 화가. /박정연 기자
박재희 화가. /박정연 기자

“하트 시리즈는 굉장히 직관적인 작품입니다. 색감 때문인지 꾸준히 찾는 이들이 많은 시리즈인데,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해준 작품이라 애정이 많이 갑니다. 무엇보다 30대 터널을 통과하면서 자존감을 넘어 자신감마저 되찾게 해준 작품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하트가 심장을 뛰게 하는 시리즈였다면 플랜트는 에너지를 북돋우는 시리즈로 많은 이들의 마음에 닿았으면 합니다.”

/박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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