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별아 작가가 쓴 소설 속 논개
사랑한 이의 애국을 따름으로써
더 큰 사랑 배운 사람으로 표현

촉석루에서 본 변함없는 남강
굽힘 없는 그 정신이 흐르는 듯

'국민학교' 시절에 나는 논개가 기생이되 의롭다고 배웠었다. 지금은, 논개는 경상우병사 최경회의 부실이었고 기생으로 신분을 위장했다고 읽고 있다. '기생이되'라고 할 때 '-되'는 대립적인 사실을 잇는 데 쓰는 연결 어미이다. 기생과 의로움은 대립하는 심상이라는 말일 터이다. 부실은 첩을 일컫는 다른 말이다. 부실과 첩은 같은 말이나 첩이라 하면 부정적인 어감이 더 든다. 당사자도 그렇고 첩을 둔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다. 시절이 하마 변한 게 언제였던가. '기생'과 '의로움'을 대립하는 심상이라 말하는 게 논리적이지 않고, 부실이든 첩이든 남성 중심의 소유적 표현이 더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시절이 되었다.

최경회의 부인 김 씨는 남편에게 논개를 부실로 맞을 것을 청원한다. 숙부의 모략에 팔려 갈 뻔한 모녀의 곤궁한 처지를 구해준 이가 최경회였다. 의탁할 사람이 되어준 이도 최경회였다. 부실이라 마다할 처지도 아니었거니와 최경회의 부실일 수 있어서 기꺼운 일이었다. 소설에서 이야기가 그렇다는 말이다.
 

진주성 남쪽면은 남강이 자연 방어선 역할을 했다. /경남도민일보 DB
진주성 남쪽면은 남강이 자연 방어선 역할을 했다. /경남도민일보 DB

◇두 번의 진주성 전투 = 임진년, 선조 25년, 1592년 4월에 일본은 조선을 침략한다. 일본은 그들의 통일 전쟁으로 쌓은 무력의 경험에서부터 준비한 전쟁이었고, 조선으로서는 일본의 흉계를 짐작하면서도 대비하지 못한 전쟁이었다. 5월에 일본군은 한양에 닿았다. 한양을 내어주는 데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임금 된 자는 다급히 도성을 버리고 피난하였지만 조선의 민과 군은 싸움을 이어갔다.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연일 승전하였고, 전라도로 향하던 일본군은 진주성에서 막혔다. 진주대첩은 전쟁의 판도에 큰 영향을 끼친 전투로 평가된다.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온전히 보호하여 의병 활동과 이순신의 수군 전력을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일본군의 파죽지세는 평양성까지였다. 평양성에서 조명연합군에 패하고 행주에서 권율에게 크게 패한 일본군은 1593년 3월 부산포로 총퇴각한다. 왜란 1년 만이다. 부산포에 머물며 일본은 화친 협상을 시도한다. 표면적으로는 화친(和親)이었으나 실제 사정은 화친(火親)이었다. 일본군은 임진년(1592년) 진주성 전투에서의 패배가 뼈아팠다. 1953년 6월에, 10만의 일본군이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였다. 

"진주성이 무너지면 일본군은 호남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을 확보하게 되는 셈이었다. 그리하여 일본군이 호남평야를 장악하게 된다면, 이순신의 수군에게 길이 막혀 군량 보급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평양에서 북진을 멈춰버린 일본군에게 또다시 날개를 달아주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진주성을 포기하라는 군령을 최경회는 거부했다. 조정의 입장에서는 무단으로 입성한 반란군이었으나 백성들은 그들을 충의군이라 불렀다. 최경회를 비롯한 삼장사(三壯士)는 일본군을 피해 성안으로 피난 온 백성들을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죽을 각오로 입성(入城)하였으니 죽을 자리였다. 최경회를 따라 논개도 진주성에 들었다. 소설에서 이야기가 그렇다는 말이다.
 

김별아는 소설 논개에서 보국(輔國)의 기치에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여장부로만 그녀를 그리지 않았다. 사진은 논개제 세부 행사 가운데 하나인 의암별제를 진행하는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김별아는 소설 논개에서 보국(輔國)의 기치에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여장부로만 그녀를 그리지 않았다. 사진은 논개제 세부 행사 가운데 하나인 의암별제를 진행하는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주논개면 어떻고 기생 논개면 어떠리" = 당시 논개가 기생이었는지 부실이었는지 아니면 둘 다였는지 아직도 논란이 되곤 한다. 어제의 일도 사실 여부가 논란되는데 이미 역사가 된 일을 어찌 정답인 냥 확신하랴. 그래서일 것이다. 역사의 인물은 논란으로 종종 오해되거나 과장된다. 현대의 필요에 따라 대의명분으로 포장된다. 논개가 죽은 곳과 태어난 곳, 묻힌 곳의 지자체가 경쟁적으로 추모제를 진행한다. 경쟁적인 지자체의 마음 씀이 느껍지만은 않다.

역사를 역사로 읽는 것과 역사를 소설로 읽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역사를 사료로 이해하고 분석하다 보면 역사의 인물은 이념이나 가치에 갇힌다. 순정한 이념과 가치에 따라 지나치게 엄정해진다. 삶은 누구도 그렇게 엄정하게만 두지 않는다. 나는 역사의 인물도 피와 살과 숨결이 있는 사람으로 읽고 싶다. 김별아는 소설 <논개>에서 보국(輔國)의 기치에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여장부로만 그녀를 그리지 않았다.

"이제 논개의 반지는 다섯 개가 되었다. 운명의 장난질 속에 필사적으로 새끼를 지키고자 버둥질하던 어미가 물려준 은지환, 자신이 못다 한 사랑을 맘껏 누리라며 현부인 김 씨가 남긴 금지환, 자식을 잃은 설움을 곱씹으며 죽음보다 못한 삶을 잇는 슬픈 어미의 옥지환, 그리고 혼약의 정표로 최경회에게서 받은 순금 쌍가락지까지. 그것이 어찌 단지 세상의 값어치로 셈하여 따질 금이며 은이며 옥이기만 하겠는가."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좇게 되고, 사랑함으로써 더 많은 사랑을 배워가는 사람으로서 논개가 그렇게 나볏할 수가 없다. 
 

논개 표준 영정
논개 표준 영정

◇진주성을 걷다 = 진주성의 정문인 공북문을 지나자 오른쪽으로 전각이 하나 섰다.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아내고 불리한 전황을 뒤집어 전열을 가다듬는 계기를 마련한 진주대첩의 승리자 '김시민 장군 전공비'이다. 전공비를 등지고 촉석루로 향한다. 촉석루 옆에는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의기사가 있다. 

의기사(義妓祠)에 걸린 논개의 영정을 눈여겨본다.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죽었을 때 나이가 20살이었다. 영정 속 논개가 너무 중후한 듯싶다. 20살은 발랄할 나이인데. 저 중후한 논개의 영정 이전에 의기사에 있던 영정은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것이었다. 진주 시민 단체에서 김은호가 그린 논개의 영정을 떼어냈다. 

의기사에는 다산 정약용의 글과 매천 황현, 진주 기생 산홍의 시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정약용이나 황현은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산홍은 누구인가? <쉽고 재미있는 경남의 숨은 매력>에서 김훤주(경남도민일보 출판국장)는 산홍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산홍은 1900년 전후에 살았던 진주 기생으로 용모가 아름답고 서예도 곧잘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산홍을 을사오적의 하나인 이지용이 첩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에 산홍은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비록 천한 기생이지만 사람 구실을 하고 사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했답니다.' 

김별아는 소설 <논개>에서 논개의 어릴 적 동무이며 기녀가 된 '업이'의 기명을 산홍으로 쓰고 있다. 진주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조선인을 학살하였다. 학살당한 이가 6만 명이라고도 했고, 또 누구는 2만 명이라고도 했다. 학살의 증거로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어 도요토미 히데요시한테 바치고 받은 코 영수증이 국립진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진주시 촉석루 내  논개의 영정과 신위가 모셔져 있는 의기사에는 산홍이 일본에 협력하는 양반들의 행실을 꾸짛는 글이 있다. /경남도민일보 DB
진주시 촉석루 내 논개의 영정과 신위가 모셔져 있는 의기사에는 산홍이 일본에 협력하는 양반들의 행실을 꾸짛는 글이 있다. /경남도민일보 DB

학살은 전쟁의 승전보였다. 전승 축하연이 열린다는 말에 논개는 산홍을 통해 기안(妓案·기생 명부)에 이름을 올린다. 산홍은 논개가 창기로 오해받을 것을 염려하나 논개는 "나는, 나를 모르면서 하는 사람들의 말 따위는 상관없다"고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김별아 소설 <논개>에서 읽은 산홍과 김훤주의 <쉽고 재미있는 경남의 숨은 매력>에서 읽은 산홍이 다른 인물이면서도 같다. 

의기사를 나와 촉석루에 옮겨 앉았다. 소설 <논개>에서 최경회는 촉석루에서 마지막으로 시 한 수를 읊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 

촉석루의 세 장사는
잔을 들고 웃으며 저 강물을 가리키노라
강물은 변함없이 도도히 흘러가니
저 물이 마르지 않는 한 내 혼도 죽지 않으리!

촉석루에서 남강 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의암으로 내려갔다. 김별아는 소설 <논개>에서 그녀의 마지막을 '단단하고 날카로운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라고 썼다. 

/이헌수 시민기자(메깃들마을학교 운영위원)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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