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자유·안전·재산 지켜야 할 정부
이태원 참사에 책임지는 지도자 없어

군대에서 경계근무를 해본 사람은 안다. 경계 근무할 때 외부의 침입보다는 내부 당직사관의 순시를 더 신경 썼던 것을. 민간기업에 다녀본 사람도 안다. 성과를 많이 내는 직원보다 회장님에게 충성하는 직원의 승진이 더 빠른 경우가 많다는 것을. 그래서 '대통령 각하' 경호는 '신변경호'가 아니라 마음까지 헤아리는 '심기경호' 수준이어야 한다는 차지철의 경호론은 오늘도 여전히 진리이다.

이태원 참사도 그렇다. 윤석열 대통령 발언처럼 '드론 등 첨단 디지털 역량을 활용한 크라우드 매니지먼트' 기술이 없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한국은 디지털 강국이다. 기술이 인력이 예산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다. 많은 인파가 모인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통신사들의 '인구밀집 데이터'는 '단위 면적당 인원'을 기반으로 한 경찰의 측정방식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다. 참사 당일 인파를 경찰은 10만 명으로 추산했지만 통신3사 데이터는 피크타임이었던 오후 10시에 12만 2204명이었다고 정확하게 밝히고 있다. 한국의 이통사들은 이러한 '지역별 혼잡 정도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정부 당국에 제공한다. 데이터는 활용되지 않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대형 스크린의 서울시 지도에 교통상황과 재난 현장 등 각종 빅데이터 3200만 건, 서울 시내 1200여 대 CCTV 영상정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정보 등을 실시간 제공했던 박원순의 '디지털 시장실'은 오세훈 시장 취임과 함께 철거되었다. 인파가 위험 수준으로 몰리는 지역에는 지하철역을 정차하지 않고 통과시키는 아주 기본적인 결정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너무나 당연한 결정들이었는데. 세월호 이후 경찰과 소방기관 등 관계기관이 하나의 통신망을 이용해 빠르게 대처하자는 취지로 1조 5000억 원을 들여 구축한 '재난안전 통신망'도 작동하지 않았다. 관할 구청장은 퇴근길에 잠깐 현장을 둘러보고는 집으로 갔다.

같은 날 일본은 도쿄 신주쿠에 수백 명의 경찰을 동원해 인파를 통제하고 사고예방에 총력을 기울였다. 한국의 경찰은 이태원 현장에서 멀지 않은, 집회 신고조차 없는 대통령의 사저 경호에 2개 기동대나 투입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국민 안전이 아니라 높은 분의 '심기'였을지 모른다. 참사를 재난으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고쳐 부르라는 중앙재해대책본부의 요구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이런 와중에 대통령의 멘토라고 주장하는 천공이 "이태원 참사는 엄청난 기회"라고 하거나 전광훈 목사가 "이태원 참사는 북한 공작"이라는 발언은 역겹기까지 하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여기까지 왔는가? 전근대가 임금은 부끄러움이 없다는 군왕무치(君王無恥)라는 말로 대변된다면 근대는 '사회계약론'이다. 국민이 자신들의 신체의 자유와 안전, 재산을 지키고자 만든 것이 정부이고 사회라는 것이다. 그날 이태원에 정부는 어디 있었는가? 뉴욕타임스는 참사 이틀 뒤 "명백하게 피할 수 있는 사고"였지만 "(한국)정부기관 어디도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고 비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렇게 회고했다. "비가 오지 않아도, 비가 너무 많이 내려도 다 내 책임인 것 같았다. 아홉 시 뉴스를 보고 있으면 어느 것 하나 대통령의 책임 아닌 것이 없었다. 대통령은 그런 자리였다." - <운명이다> 중. 지도자는 레토릭이 아닌 '등'으로 말하는 자리다. 지도자는 비판이 아닌 책임지는 자리인 것이다.

/김석환 부산대 석좌교수 전 한국인터넷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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