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가야유적 보고 후 세 차례 발굴조사
후기 가야 맹주 고령 대가야 무덤·유물 첫 확인

고령산 금귀걸이·원통모양 그릇받침 출토
함안 아라가야·고성 소가야 문물도 나와

순천 가야 유력집단 무덤 방치·파괴 거듭
봉긋 솟은 고분 위에 또 다른 무덤 축조되기도

주민들 재산권 행사 제약 탓 문화재 지정 반대
시 "주민 설득해 문화재 지정 절차 밟을 예정"

전남 순천 운평리고분군 전경. /순천대박물관
순천대박물관 발굴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순천 운평리고분군 전경. /순천대박물관

전남 동부지역에 가야 고분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4세기 말 전후지만, 이 지역에서 가야 고분군이 확인된 건 비교적 최근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순천시 서면 운평리 운평마을에서 처음 조사됐다. 5~6세기 후기 가야 맹주였던 대가야가 만든 고분과 거의 같은 형식의 무덤이 순천에서 나온 것이다.

함께 발견된 부장품(껴묻거리) 토기 유물들도 가야 성격이 짙었다. 특히 고령에 근거지를 두고 번영했던 대가야 토기와 다르지 않은 수입·모방품이 많았다. 시기가 이른 4~5세기 널무덤(토광묘)에서는 고성 소가야 양식 토기도 출토됐다.

이 같은 성과는 2005년 순천대박물관이 운평마을 야산 언덕에 있던 무덤을 대상으로 한 발굴과정에서 확인됐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파악된 봉토분은 10기다. 무덤 양식은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으로 조사됐다. 그 가운데 지름 10~20m 봉분을 가진 고분은 5기. 관을 넣어 두는 널방을 나무로 만든 무덤(토광목곽묘) 15기, 돌덧널무덤(석곽묘) 25기 등 소형 무덤도 일대에 퍼져있다.

이 무덤 유적은 마을주민들이 분묘(사람 시체·유골을 땅속에 파묻은 곳)를 조성하던 중 처음 정체가 드러났다. 박물관은 봉토분 5기를 포함한 일대 발굴조사를 진행, 그 과정에서 4~5세기대 토착 세력 널무덤과 5세기 말~6세기 초 대가야계 돌덧널무덤·돌방무덤(석실묘)이 확인됐다. 이 밖에도 가야 고분 다수가 주변에 분포하는 걸로 알려져 있으나, 조사된 5기 이외에 눈에 띄는 봉분을 갖춘 가야 고분은 운평리에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박물관은 파악했다.

순천시 서면 운평리에 있는 운평리고분군 일대 원경. /순천대박물관

순천대박물관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전남 동부지역에는 4~6세기 전반기에 걸쳐 가야 문화가 닿은 거로 추정된다. 4~5세기 초에는 함안 아라가야, 5세기 중반~6세기 초에는 고성 소가야, 5세기 말~6세기 초에는 고령 대가야 문물이 유적에서 각각 확인됐다. 이는 가야의 직접적인 영향력을 뒷받침하는 자료다. 6세기 중엽 신라에 멸망한 대가야, 소가야 등 가야국들이 200여 년간 전라도 동부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걸 입증하는 구체적 근거로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지배계층 고분에서 출토되는 고령산 수식 금귀걸이(금제 수식부이식)를 비롯해 대형 원통모양 그릇받침(통형기대)도 나왔다. 순천지역 가야 수장층과 대가야 수장층 간 이뤄진 교섭 결과다. 대가야계 고분은 가야 멸망 이후인 6세기 중엽 이래로 단절되는 양상을 보이지만, 대가야계 유물은 지역 산성이나 고분에서 꾸준하게 확인된다. 대가야계 위신재(소유자 신분이나 권력을 상징하는 물건)는 섬진강수계를 타고 남해안 일대까지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고령산 수식 금귀걸이(금제 수식부이식). /순천대박물관
원통모양 그릇받침(통형기대). /순천대박물관
운평리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 유물들. /순천대박물관

운평리고분군은 순천지역 토착 세력과 소가야, 대가야, 백제 등의 다양한 요소가 섞여 만들어진 형태다. M1호분과 M2호분은 무덤 축조 방식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한편, M2호분과 M5호분은 소가야와 깊은 관련이 있는 장방형(직사각형) 돌무덤 형태로 축조됐다. 무덤별로 만들어진 시기 차가 있긴 하나, 운평리고분군 축조집단은 대가야뿐 아니라 소가야, 백제 등 여러 문화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운평리고분군은 대가야와 연맹체를 이루었던 임나4현(任那四縣:사타·모루·상다리·하다리 등 가야지역 4곳을 일컫는 말) 중 하나인 '사타'(沙陀)의 실체를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학계에서는 섬진강 서쪽 해안 전남 동부권(순천·광양·여수)을 임나4현으로 보는 것이 통설인 반면, 일본은 영산강 유역 일대로 보는 견해가 대세다. 왜계(일본계) 유물이 아니라 대가야계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된 사례를 볼 때 운평리고분군은 일본 학자들을 중심으로 나오고 있는 임나일본부설(일본이 고대 한반도 가야지역에 임나일본부라는 기관을 두고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설)이 허구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무덤돌이 바깥으로 노출돼 있다. /최석환 기자 
운평리고분군 봉토분 주위로 대나무가 심겨있다. 유적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최석환 기자 

지난 6일 오후 운평리고분군 유적 현장 방문에 동행한 박성배 순천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전남지역 가야사를 밝히는 데 중요한 유적이라고 설명했다. '전라도=마한과 백제 영향권'으로 여겨졌던 영토 관련 통념에 균열을 내는 유적이라 의미가 남다르다는 것이다.

박 학예사는 "운천리고분군은 전남 동부지역 최대 규모 고분군이자, 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가야 고총고분군"이라며 "전남 동남부 지역에서 봉분이 있는 대가야계 고분은 여기 말곤 없다"고 했다. 이어 "최소 도 지정문화재로 지정해도 될 만큼 중요한 유적으로 꼽히지만, 유적은 비지정문화재로 남아있는 상황"이라며 "주민 반발이 심해 관리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고 말했다.

유적 일대에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민묘가 들어섰다. /최석환 기자

이날 찾은 고분군 분포구역은 대나무숲과 주민 농경지, 민묘, 태양광발전기 등이 들어서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였다. 최근까지도 주민들에 의해 민묘가 새로 만들어진 모습도 눈에 띄었다. 봉긋 솟은 봉분은 대나무에 뒤덮여 있어 코앞에 다가서도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맞은편 능선에 있던 또 다른 봉분은 현대식 무덤이 조영돼 고분 위에 또 다른 무덤이 새로 조영된 구조를 보였다. 이 무덤은 본모습을 완전히 잃은 모습이었다.

이날 만난 마을주민들은 운평리고분군이 마을에 분포한다는 건 안다면서도, 동네 안팎이 문화재 유존구역으로 묶여 있어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라고 토로했다. 이광휴(76) 운평마을 이장은 "문화재 때문에 주민들이 상당한 피해를 보고 있다"며 "고분군이 있는 산이 우리 종중 땅인데, 자기 땅이라도 마음대로 만질 수 없는 상황이다. 문화재 지정은 주민 모두 반대하고 있다"라고 했다.

운평마을이 고향이라고 밝힌 남양원(79) 씨는 "어렸을 때부터 밭에서 토기 조각이 많이 나왔어도 문화재라는 걸 몰랐다"면서 "하지만, 지금은 다들 문화재가 마을에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개인 사유재산을 가지고도 마음대로 개발을 할 수 없어서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닌데 그런 상황에서 유적을 문화재로 지정한다는 건 있어선 안 될 일"이라고 했다.

순천시는 운평리고분군이 중요한 유적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당장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절차를 밟을 계획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주민 반발이 심해 문화재 지정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견해다. 장여동 시 문화재활용팀장은 "10년 전 도 지정문화재로 지정하려고 했었는데 주민 반대가 커 지정하지 못했다"며 "시점은 특정하기 어렵지만, 주민들을 설득해 차근차근 지정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끝>

/최석환 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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