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체 디자이너' 글씨 만드는 일에 한글 정신 새겨
마을 상표 만들고 사회적 가치 실천 기업 돕기도

창원웅남초 6학년 강병호 군은 남 앞에 서지 않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어느 날 그는 전교 회장으로부터 생각지 못한 칭찬을 듣는다. 

"난 병호 글씨체가 부러워."

그 기억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남아있다. 그리고 14년 뒤 대학 졸업을 앞둔 그는 버스정류장 안내판에 적힌 서체가 '서울남산체'라는 걸 알았다. 창원만의 고유 서체를 만들고 싶었다. 서체 제작 기업인 윤디자인에 입사지원을 했다. 디자인팀에는 낙방했지만 다시 지원해 영업기획2본부에 입사했다.

이제 서른 다섯이 된 그는 캘리그래피(멋 글씨) 작가, 한글 서체 디자이너로 불린다. 정작 그는 자신을 '한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난 병호 글씨체가 부러워." 강병호 씨는 어릴 적 이 칭찬을 들은 걸 계기로 서체 디자이너 길에 접어 들었다. /강병호
"난 병호 글씨체가 부러워." 강병호 씨는 어릴 적 이 칭찬을 들은 걸 계기로 서체 디자이너 길에 접어 들었다. /강병호

◇글자를 좋아하는 사람 = 서체 디자이너는 글자 모양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서체 제작은 그저 멋진 글자 몇 가지를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한글 3000자 전체 구조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서체는 '글립스'라는 제작 프로그램으로 만든다. 강 씨는 "글립스로 들여다보는 일은 아주 미세한 차이를 반복적으로 들여다보고 고치는 것의 연속"이라며 "어떨 때는 시간 낭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가 서체를 만들고 싶은 이유는 확고하다. 그는 "서체 제작으로 한글을 보존한다"며 "한글로 어떤 일을 했는지 미래 세대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강 씨는 "한글은 언제 어떻게 창제됐는지 그 과정이 역사로 남아있는 유일무이한 문자"라면서 한글 우수성을 강조했다. 그는 지역마다 울타리가 되는 도시 안내판에 그 도시만의 서체를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소중한 문자를 활용해서 말이다.

각 지역이 정체성을 나타내는 건 상징물뿐만 아니라 서체로도 가능하다. 지역 서체는 도시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미래상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 서체가 있거나 개발 중인 시군은 아직 50여 곳밖에 되지 않는다. 이를 100곳, 200곳으로 넓혀 나가려 한다. 실제 그런 일을 해나가고 있다.

직접 만든 건 2019년 '서울 마포구', 2020년 '강원문화재단' 서체다. 곧 출시를 앞둔 서체는 '충남 부여군', '서울 금천구'다.

서체를 만드는 과정은 종이 위에 쓰는 것에서 시작된다. 디자이너가 쓴 글씨를 그래픽화하고, 이를 한글 3000자에 적용한다. 

2016년 열린 한글날 경축식 행사 모습. 강병호 씨가 쓴 '온 세상 한글로 비추다'가 행사 한 면을 가득 채웠다. /연합뉴스
2016년 열린 한글날 경축식 행사 모습. 강병호 씨가 쓴 '온 세상 한글로 비추다'가 행사 한 면을 가득 채웠다. /연합뉴스

그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성과는 한글날 공식 행사에서 선보인 글씨다. 2016년 '온 세상, 한글로 비추다'와 2017년 '마음을 그려내는 빛, 한글'을 썼다. 그는 "2년 연속으로 쓴  최초 작가인 걸로 안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강 씨는 한글이 지닌 아름다움은 그 자체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존경하는 바다 한동조 선생님 작품이 교과서에 실려 있는 걸 봤다"며 "글자 '온유'에서 온유함을, '화평'에서 화평함을 담아내더라"고 말했다. 그는 한동조 선생을 보며 글씨에 마음을 담는 게 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닮아가려 부단히 노력한다.

◇마을 정체성을 한글로 = 강 씨 활동은 글씨를 잘 쓰는 작가로 끝나지 않는다. 

특히 눈에 띄는 활동은 '마을 상표(브랜드) 만들기' 사업 참여다. 강 씨가 한국표준협회 지속가능도시추진단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마을 상표 개발 과정을 이끌었다.

올해 6월에는 창원시 진해구 경화동 마을 상표를 만들었다. 주민 참여형으로 만들어 그 의미는 더 깊다. 

도시 상표를 만들려면 조사가 첫 단계다. 국내외 상표를 조사하고 공유해 주민들과 디자인 방향성을 세워나간다. 마을 상표명을 개발하고자 주민들과 핵심 단어를 도출해냈다. 이 과정만 여러 차례 거쳤다. 70개 단어 중에서 '니캉내캉 다가치센터'를 선정했다.

이후 주민들이 디자인에 영감이 될 마을 상품과 상징성 등을 발표했다. 그 중 온새미로, 경화역, 기찻길, 유년층·노년층의 조화 등이 꼽혔다. 디자인은 최종적으로 기찻길, 벚꽃을 조화롭게 활용했다. 

도시 상표는 명함, 봉투, 초청장, 주차 방문증에 삽입된다. 마을 입구에 보이는 간판, 현판, 안내판 등에도 들어간다. 마을에서 만드는 종이가방, 상자, 스티커, 포스터에도 활용한다.

강 씨가 지역 기업과 마을 상표를 개발한 것은 2018년부터 27개에 달한다. 경남에서는 창원시 진해구 경화동 외 △거제시 토바기협동조합 도랑사구 △통영시 해담영농조합법인 △고성군 고자미영농조합법인 △창원시 회성마을 △창원시 어울림소계 상표 개발에 참여했다.

강 씨는 오는 22일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열리는 국제학술대회 '한류문화콘텐츠로서의 한글'에 참여한다. '지역문화콘텐츠에 기반한 도시 디지털 서체 개발'을 발표한다. 그는 "국립한글박물관은 한글 디자이너인 아내가 일하는 곳이기도 하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강병호 씨가 경남도민일보 독자들을 위해 직접 쓴 손 글씨.
강병호 씨가 경남도민일보 독자들을 위해 직접 쓴 손 글씨.

◇"아빠는 한글을 참 좋아해" = 강 씨는 2017년 서울에서 '카리타스씽킹'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기업을 컨설팅한다. 

강 씨는 "한글은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이타적인 마음으로 창제한 문자"라며 "그걸 본떠 카리타스(caritas·이타적인) 씽킹(thinking·사고)이라 회사명을 지었다"고 말했다. 

강 씨 회사 매출은 해마다 상승하고 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두 배가량 늘었다. 하고 싶은 한글 관련 일을 했을 뿐인데 일어난 현실이다. 

강 씨가 기대하는 매출액은 따로 없다. 하지만 매출을 늘려야 할 이유는 명확하다. 강 대표는 "나 같은 사람을 채용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채용 기준도 이타적인 마음이 있는 사람, 한글과 맥을 같이하는 사람으로 하고 싶다고 전했다. 

자신에게는 윤디자인이 그 디딤돌이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강 씨와 카리타스씽킹이 그 역할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강 씨는 모교 교수로 활동하고 싶다는 포부도 함께 나타냈다. 그는 "경남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은 꿈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강 씨는 지난달 30일 태어난 자녀를 언급했다. 태명은 '하랑이'다. 강 씨는 "하랑이에게 한글이 창제된 배경을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글씨가 하랑이 닮았네' '글씨가 아주 예쁘네'라고 자주 칭찬해주려 한다. 그가 초교 6학년 때 칭찬을 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하랑이는 신나서 더 자주, 더 예쁘게 한글을 쓰려고 노력할 것이다. 강 씨는 "내 꿈과 이상보다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해야 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오늘도 아이에게 "아빠는 한글을 참 좋아해"라고 말하려 노력하고 있다. 

/주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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