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국에 구미호 많다는 '산해경' 기록이 증명
무서운 이야기 고금동서 막론 판타지 장르 정착
국문 소설에서 많이 나타나 설화로도 재 가공
잉어 지렁이 거북 지네…정체 불명 요괴도 등장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 이 한마디에 뒷간에 가지 못하고 꾹꾹 대변을 참았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면 50대 나이는 되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귀신이나 요괴 이야기는 겁을 내면서도 자꾸만 듣고 싶어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도 50대의 어린 시절 못지않게 무서운 이야기를 즐기는 걸 보면 판타지 공포 이야기는 고금동서를 초월한 영원한 이야기 장르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대상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물론 구미호 같이 생명력이 긴 요괴도 있긴 하지만 공포물의 많은 주인공이 자취를 감췄다. 요즘은 확실히 좀비가 대세이긴 하다. 흔히 무서운 이야기의 대명사 ‘전설의 고향’은 주로 귀신 이야기로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 우리 옛 공포물에선 귀신이 으뜸인 줄 알았는데, 사실 옛날 책 속에는 귀신보다 요괴들이 더 판을 쳤던 것 같다.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간한 <한국 고전소설의 요괴>라는 책에서 지금은 존재조차 발견하기 쉽지 않은 요괴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번 ‘전통의 향기’에서는 옛이야기 책에 어떤 요괴들이 출몰했는지 살펴본다.

옛이야기 속 요괴를 소개한 <한국 고전소설의 요괴> 책표지.

◇요괴가 등장하는 주요 책들은 = 이 책을 쓴 이후남 한국연구재단 학술연구교수는 고전 작품 76편에서 요괴 157종을 찾아냈다고 했다. 사실 이런 요괴 이야기는 중국과 일본에 더 많긴 하다. 중국 <산해경>을 비롯해 <수신기>, <태평광기>, <평요전>, <서유기>, <봉신전> 등 요괴를 다룬 수많은 소설이 있고 일본은 ‘요괴학’이라는 학문이 있을 정도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 고전소설에 등장하는 요괴로 “여우나 돼지, 뱀, 거북 등의 동물류가 다수 차지하며 나무귀신이나 중국 도교신을 요괴화한 천리안과 순풍이, 그리고 작품 내 상황과 작가 성향에 맞춰 창작해낸 독특한 요괴 등 천차만별로 섞여 있다”고 했다.

한문으로 된 소설로 <삼한습유>, <옥루몽>, <최고운전> 등 10편이 있고 국문으로 된 중단편소설은 <구운몽>, <금방울전>, <남정팔난기>, <서화담전>, <장인걸전>, <전우치전>, <홍길동전>, <황백호전> 등 48편이다. 또 국문 장편소설에 해당하는 것은 <보은기우록>, <소현성록>, <유씨삼대록> 등 18편이다.

거명한 고전소설들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음직 한데 이런 책에 요괴가 있었던가 싶은 의구심이 들기도 하겠다. <삼한습유>에는 여우와 귀마왕, 구반다, 그리고 적룡이 등장한다. <구운몽>에는 용녀 백능파를 스토킹하는 남해 용왕의 아들 오현이 요괴로 등장한다. <금방울전>에는 신통력을 지닌 금돼지가 <남정팔난기>에는 뱀과 호랑이, 곰, 또 곰과 인간이 낳은 흑선곤, 그리고 청사(靑獅)와 백록(白鹿) 등 많은 동물 요괴들이 출연한다.

또 귀에 익숙한 소설 <서화담전>에는 남자의 양기를 흡수하며 살던 100년 묵은 여우가 등장한다. 여자로 변한 여우는 허운을 유혹하다 서화담 지시에 따라 허운이 여우 입에 있던 구슬을 삼키자 울면서 사라진다. 이런 이야기 원형은 많은 전설에도 스며들어 전해지고 있다. <전우치전>에도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때론 서화담과 전우치가 공동 주인공으로 출연하기도 한다. 그 유명한 <홍길동전>에는 무슨 요괴가 등장하나 싶겠지만 망당산에 사람 모습을 한 짐승 요괴 을동이 나온다.

◇요괴들의 정체는 = 고전소설의 요괴는 동물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중에서도 여우가 으뜸이다. 한 작품에 두 마리 이상이 등장하는 때도 있다. 여우 설화는 동아시아에 걸쳐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다. 특히 <산해경>에 청구산 또는 청구국에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가 산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청구’라는 지명은 중국에서 보면 동방을 가리킨다. 이건 한국에 여우 설화가 많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록이기도 하겠다.

책 368쪽 ‘부록2. 한국 고전소설 속 요괴 이미지’에 실린 요괴들을 살펴본다. 여우 말고는 모두 낯설어서 어렸을 때 한 번이라도 들어봤던가 싶은 요괴들이다.

구두장군 아귀./책갈무리
구두장군 아귀./책갈무리

먼저 <김원전>에 나오는 ‘구두장군 아귀’, 태항산 보신동에 사는 머리가 아홉 개 달린 요괴다. 키가 30m에 달하며 나이가 억만년이다. 성기가 없어 음양의 이치를 모르면서도 미녀를 좋아해 소굴에 납치해온 여자가 3000명이나 된다. 입에서 물, 불, 바람, 호랑이, 표범, 승냥이 무리가 나오기도 하고 화살과 돌이 쏟아지기도 한다. 머리가 아홉인 이유는 꼬리가 아홉인 구미호처럼 뭔가 강력함에 최고의 완결 숫자인 9를 부여하려는 동아시아인들의 인식에서 비롯됐다고 보인다.

여우정령 모습./책 갈무리
여우정령 모습./책 갈무리

그다음 수많은 소설에 등장하는 여우 요괴 ‘구미호’는 누런 색의 눈을 가지고 있으며 사나운 이빨에 몸은 작고 붉은색 털이 났다. 그의 능력은 달의 정기를 흡입하고 인간에게 빙의해 조종한다. 이 여우는 <삼한습유>에 등장하는 요괴다.

올출비채 모습./책 갈무리
올출비채 모습./책 갈무리

‘올출비채’는 <삼강명행록>에 등장하는 흑거란 명장 올출탑목아의 딸이다. 태어났을 때 어깨뼈에 날개가 돋았고 14일 만에 말을 했다. 눈썹이 날카롭고 얼굴엔 하얀 분칠을 두껍게 했다. 옷은 푸른 저고리에 명주 치마를 입었으며 힘이 센 데다 무예가 뛰어나고 물속에서도 오랫동안 숨을 참을 수 있다. 결혼하고서는 행인을 유혹해 인육으로 만들어 팔며 생활한다.

은행나무 귀신 모습./책 갈무리
은행나무 귀신 모습./책 갈무리

‘은행나무 귀신’은 <황장군전>에 나오는 식물에 빙의한 요괴다. 눈은 4개이며 1000년을 살았다. 날씨를 조종하거나 지진도 일으킬 수 있고 분신술도 쓴다. 몸은 황금색이고 팔이 여섯 개다.

응천대장군 모습./책 갈무리
응천대장군 모습./책 갈무리

‘응천대장군’은 <태원지>에 나오는 해적 요괴다. 키가 4m 50㎝인데 온몸이 쇳덩어리다. 그의 능력을 보면 가히 천하무적이다. “물에 빠지지 않고 불에 타지도 않으며, 추우와 더위를 전혀 느끼지 못하였다. 또 새와 짐승들이 그를 대적할 수 없을 만큼 힘이 셌다. 이뿐 아니라 바람과 구름, 우레와 비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고 물속의 여러 생물을 부리는 요술이 있었다.” 응천대장군이 등장하는 <태원지>에는 긴 수염에 새 부리를 가지고 흰옷을 입은 쥐 요괴와 이무기, 원숭이, 지네 등의 요괴도 등장한다.

이 밖에 옛이야기 단골 등장 요괴로 <고려태조>에 나오는 이슴이라는 이름의 금잉어, <반필석전>에 나오는 표수읍 관사 앞 못 속의 큰 지렁이, <이두충렬록>에서 노인으로 변신해 신검을 뺏으려는 거북, <한씨보응록>에서 해마다 처녀 한 명씩 바치게 해 잡아먹는 큰 지네, 그리고 동물도 아닌 것이 식물도 아닌 것이 정체가 불분명한 요괴도 여럿 등장한다. 아무래도 이런 허황한 판타지 이야기가 예나 지금이나 인기를 끄는 이유는 실현 가능성이 없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접할 수 있기 때문 아닐까 싶다.

/정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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