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결심해 태백에 간 남녀
발걸음 멈추는 상황 계속돼
쓸쓸하지만 무겁지 않아 '여운'

조이슬 영화감독
조이슬 영화감독

 

책상 앞에 한 남자가 앉아있다. 말라죽은 화분들과 빈 소주 병. 휑뎅그렁한 냉장고 안에는 소주 한 병과 밧줄이 놓여있다. 알코올성 치매를 앓는 '모인'. 매일 죽음을 결심하지만 매일 그 결심을 잊어버린다.

방 안에 한 여자가 앉아있다. 아무렇게나 쌓인 책들과 카펫 한 장뿐인 방.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여자는 눈물을 흘린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남자 목소리에 깊은 한숨을 내쉬는 '화림'. 무력함과 우울함에 죽음을 결심한다.

〈온 세상이 하얗다〉 영화 장면.
〈온 세상이 하얗다〉 영화 장면.

<온 세상이 하얗다>는 자살을 결심한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 자살할 곳으로 함께 떠나는 로드무비이다. 더는 삶을 버텨낼 이유가 없어 죽음을 결심한 모인과 화림이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시간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무언가 다른 결을 발견할 수 있다. 

집 앞에서 우연히 만나 술을 마시게 된 두 사람. 모인과 화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까워지지만 치매를 앓는 모인은 매일 아침이 되면 낯선 눈빛으로 화림을 바라본다. 언제 불청객이 나타날지 모르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 두려웠던 화림. 때문에 화림은 매일 다른 이름과 직업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모인과 함께 지낸다.

기댈 곳 없는 남녀가 한집에서 함께 지내지만 이 둘은 서로에게 기대지 않는다. 오랫동안 곁에 둔 죽음만이 그들의 기댈 곳이다. 무미건조한 표정과 대화들만 오가고, 집은 늘 어둡다.

강원도 태백에서 죽기로 한 그들은 마침내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태백까지 가는 길에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일이 자꾸만 생긴다. 내일 죽기로 했지만 뜻밖의 소식에 들뜬 마음이 되기도 하고, 세계의 평화를 걱정하며 언쟁을 하고, 자살하려는 사람을 말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까지 한다. 자살하려는 사람을 말려 실컷 욕을 먹은 뒤 식탁의자를 낑낑거리며 나르는 모습이 애잔하다.

김지석 감독은 영화보다 CF 감독으로 널리 알려졌다.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에서는 눈길을 사로잡는 영상미보다 인물들의 일상적 행동과 잔잔하고 섬세한 감정 묘사에 공을 들였음이 느껴진다. 깊은 우울감을 직관적으로 연출한 부분과 인물들의 대화 구성에서 독특한 신선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모인으로 분한 강길우 배우 연기가 영화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든다. 열린 결말로 관객들에게 몫을 던지는 영화이지만 닫힌 결말을 선호하는 관객들은 엔딩 크레디트까지 꼼꼼히 챙겨 보시기를 추천 드린다.

〈온 세상이 하얗다〉 영화 장면.
〈온 세상이 하얗다〉 영화 장면.

누구나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잘 살아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잘 살고자 노력할수록 마음 한쪽에 부풀어가는 작은 우울감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가 있다. 모인과 화림의 무표정한 얼굴이 컴퓨터 화면에 비친 필자의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가 끝난 후 떠오르는 많은 질문을 곱씹다 보니 해가 떠올랐다. 간밤의 고민은 잠시 넣어두고 아침을 챙겨 먹고 다시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전쟁이 나야 전쟁터죠, 평소엔 그냥 숲이고"라는 영화 속 모인의 말이 떠오른다. 내 마음도 언제나 평온한 숲이길 바라본다.

/조이슬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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