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지 않은 경남 ‘밖’ 가야유적 (2) 부산 생곡동 가달고분군

생곡동 산등성 3만 3057㎡ 분포
4~6세기 덧널무덤·돌덧널무덤
토기·철기·장신구 등 300여 점

'전투 최적화' 지역 파수꾼 추정
성격규명 차원 추가 발굴 필요

부산 강서구에 있는 가야유적 생곡동 가달고분군 전경. /동양문물연구원

김해 가락국은 천혜 항구를 매개로 물류 교역을 꾸준하게 이어나갔다. 철 소재와 철제품을 성장 동력으로 삼았다. 그 당시 많은 사람이 먼저 사려고 할 만큼 인기가 높았던 교역품이 철이었다. 가야 대장장이들은 현지 실정에 맞게 철을 개량해 수출했다.

가락국 시조 수로왕이 김해를 장악하고 나서 지역에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철을 이용한 자체 철기 제작 기술을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이 많이 생산됐던 금관가야에서 중국 선진문물과 일본 원자재가 교환됐고, 가야 여러 나라들의 물품이 김해를 거쳐 중국과 일본으로 넘어갔다. 독자적인 철 생산 체계를 갖췄던 가락국은 다른 가야 집단을 자신의 세력권 아래로 끌어들이면서 경제력과 정치권력을 키워나갔다.

교역 중심지이자 해상강국이던 가락국은 고구려 남정 이후 큰 타격을 입었지만, 지역에서 그 명맥을 이어갔다. 그중 한 곳이 지금 부산 일대였다. 금관가야가 중추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부산은 가락국과 사로국 중간 지점에 있었는데, 4세기 이후로도 가야인들은 부산 지역에 머물면서 고분군과 패총 등 여러 유적을 남겼다.

생곡동 가달고분군 구덩식 돌덧널무덤 전경. /동양문물연구원
부산 생곡동 가달고분군 구덩식 돌덧널무덤 전경. /동양문물연구원

그중 하나인 부산 강서구 생곡동에 있는 가달고분군은 부산에 몇 없는 대규모 가야 무덤 유적으로 평가된다. 국제산업물류지구(5.71㎢)를 낀 산등성이(해발 52m)에 분포하는 이 고분군은 행정구역상 강서구 생곡동 산 93번지 일대에 밀집한다. 봉화산에서 해발 83m 봉우리로 연결되는 산 속 임야에 퍼져있다. 유적 규모는 3만 3057㎡(1만 평)에 이른다. 정확히는 산 정상부터 남동쪽과 북쪽 완만한 경사지에 무덤이 만들어져있다. 4~5세기 전반 덧널무덤(목곽묘)을 비롯해 5~6세기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이 조성됐다.

 

이 유적이 처음 확인된 건 1984년 부산대박물관 지표조사(가야 문화권 정밀지표조사보고서-김해)에서다. 그 뒤 1989~1990년 사이 부산박물관이 가달고분군에서 첫 학술 발굴조사(495㎡·150평)를 벌여 구덩식 돌덧널무덤 15기, 소형 돌덧널무덤 7기, 땅에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묻은 옛 무덤(토광묘) 2기, 독무덤(옹관묘) 2기 등 고분 26기를 확인했다. 부산박물관이 조사에 나섰을 때는 여느 유적과 마찬가지로 도굴 규모가 컸지만, 토기 170여 점, 철기 100여 점, 기타 장신구 30여 점 등 유물 300여 점이 출토됐다.

부산 생곡동 가달고분군 토기 유물. /동양문물연구원
부산 생곡동 가달고분군 토기 유물. /동양문물연구원

여기서 확인된 유물 절반 이상은 토기였다. 굽다리접시(고배), 긴 목 항아리(장경호), 짧은 목 항아리(단경호), 연질옹컵 모양 토기(연질옹), 원통 모양 그릇받침(통형기대) 등 종류도 다양했다. 고배 중에서는 신라 토기도 있었지만, 금관가야를 포함해 비화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계통 토기도 발굴됐다. 철기는 손잡이 부분에 둥근 모양의 고리가 있는 칼(철제삼엽환두대도)과 같은 검을 비롯해 어류를 잡는 데 쓰인 철제 낚싯 바늘과 작살 등이 확인됐다. 장신구는 금동제 귀걸이, 유리옥 등이 나왔다.

동양문물연구원이 2012년 7월부터 10월까지 진행한 발굴조사에서도 삼국시대 토광묘 19기, 앞트기식 돌방무덤(횡구식 석실묘) 2기, 돌방무덤(석실묘) 3기, 옹관묘 2기 등이 확인됐다. 연구원은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 토광묘가 조성되고, 5세기 중반에 구덩식 돌덧널무덤이 축조되기 시작하다 6세기 중반에 다시 돌방무덤으로 전환된 것으로 추정했다. 토광묘와 돌덧널무덤을 축조한 집단은 시기를 달리해 각각의 묘역을 조성한 동일 계통 집단으로 볼 수 있는 반면, 석실을 축조한 집단은 석곽묘 집단과 혈연 등의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 가능성도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부산 생곡동 가달고분군 2호 앞트기식 돌방무덤 전경. /동양문물연구원

앞서 조사된 고분 규모나 출토유물을 볼 때 가달고분군은 김해 대성동고분군이나 양동리고분군과 같은 유력 집단 중심지와는 거리가 멀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16일 오후 가달고분군 현장에 동행한 이현주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과 김은영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은 지역 내 중간 지배계층 고분으로 추정했다. 검과 칼 등 무기가 다수 출토된다는 점에서 대성동고분군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던 파수꾼 역할을 하던 집단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이 실장은 “부산박물관 조사 당시 옹관묘를 제외한 17개 고분에서 대도와 작은 철도 등 15점이 나왔다”며 “거의 한 고분에서 하나씩 칼이 나왔는데 무기 출토량이 많은 걸 보면 가달고분군에 있던 세력은 군사적인 강도가 높은 편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가야가 철의 왕국이라고 해서 모든 집단이 철제 무기를 많이 보유하고 여러 무기를 부장해서 죽는 걸로 알지만, 주로 전략적 요충지에서 갑옷이나 무기가 많이 나오는 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고분마다 칼이 나오는 걸 봐서는 검술에 능한, 대성동고분군으로 가는 길목에서 경비 역할을 하던 전투에 최적화된 집단이었던 걸로 보인다”고 했다.

부산 생곡동 가달고분군으로 가는 길. 100m가량 올라가면 가야 무덤유적이 나온다. /최석환 기자
고분군 앞 일대 전경. 부산 국제산업물류지구에 공장이 대거 들어서 있다. /최석환 기자

이날 찾은 가달고분군은 잡목과 수풀이 우거진 채로 방치돼 있었다. 숲속에 남아 있는 이 유적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소형 무덤이라 커다란 봉토분을 가진 고분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일대에는 민묘(민간인 무덤)가 다수 조성돼 있었으며, 땅속에 묻혀있어야 할 무덤 돌들이 바깥으로 노출돼 있기도 했다. 유적이 있는 산 밑으로는 부산시가 조성한 국제산업물류지구 공장단지가 대거 밀집된 모습이었다.

단지 내에서 만난 노동자들은 일터 바로 앞산에 가야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4~5년 정도 단지 내 철강회사에서 일했다는 한 노동자(50)는 “문화재가 있다는 걸 주변에서도 얘기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며 “다들 고분군이 있다는 건 모르고 있다”고 했다.

1989년 김해 일부 지역이 부산시 강서구로 편입되기 전인 김해군 녹산면 생목리 시절부터 가달마을에 살았다고 밝힌 한 주민은 고분군 존재를 안 지 오래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내가 어릴 때는 고분군이 있는 산이 소몰이하던 곳이었다”며 “더 예전에는 고려장 터로 사용된 걸로 안다”고 했다. 이어 “고분에서 도굴하는 외지인을 예전에 자주 봤다”면서 “푹푹 땅을 찌르고 파기에 어릴 땐 대체 무얼 하는 건가 싶었는데, 뒤늦게 도굴꾼이 동네에 많이 왔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생곡동 가달고분군 무덤 돌. 땅 속에 있어야 할 돌이 밖으로 노출돼 있다. /최석환 기자
부산 생곡동 가달고분군 무덤 돌. 땅 속에 있어야 할 돌이 밖으로 노출돼 있다. /최석환 기자

부산박물관 측은 가달고분군 일대가 4~6세기대 고분군으로 부산지역 고대사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 성격 규명 차원에서 발굴조사를 추가로 진행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밝혔다.

이 실장은 “지역 파수꾼 역할을 하던 집단이 이곳에 있던 걸로 보이는데 명확한 성격 규명을 위해 발굴조사가 진행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팀장은 “고촌리고분군에 비해 가달고분군은 무덤 규모가 촘촘하진 않지만, 500기 이상의 고분이 분포할 수도 있을 거다”라면서 “고분 주변에 있는 나무 뿌리가 더 이상 자라지 못하도록 잘라내는 작업을 하는 등 유적 관리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석환 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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